겁외사는 진리를 깨달아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고자 했던 성철스님의 생애를 드러내고 있는 절로 마당 한가운데에 스님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성철스님은 영원한 진리, 대자유인의 길을 불교에서 발견하고 투철한 참선수행으로 대도를 성취했다. 평생을 ‘부처님 법대로’ 살다 가신 우리의 큰 스승 성철스님. 불기 2556(서기 2012)년은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불교신문과 성철스님문도회는 성철스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동기획물을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 스님의 탄생-출가-수행-오도-전법교화-열반 등 스님의 향훈(香薰)이 서린 도량을 순례하는 이 글은 3월부터 월2회 싣는다.
대자유인의 길, 불교서 발견
평생을 부처님 법대로 살다
세속의 시간 공간 벗어나
진리와 함께 하는 절
도첩, 누더기 두루마기
친필 법어 등은 포영당에…
“눈을 밟으며 들길을 걸을 때
모름지기 허튼 걸음을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마침내 후인의 길이 되리니”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성철스님(1912~1993)의 행적을 따라 떠나던 날 2월 중순인데도 동해안에 많은 눈이 내렸다. ‘100년만의 폭설’ ‘동해안과 중부지역에 눈 폭탄’ 등으로 일컬어진 큰 눈은 그로인한 피해액만도 150여억 원으로 잠정 추산되었다. 정부는 눈 피해지역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특별구호대책에 나섰다. 눈폭탄 소식에 발걸음을 뒤로 미루려다가 생각을 돌렸다. 미리 잡아놓은 날이었기도 하지만 눈이 많이 왔다고 가려던 길을 미룰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큰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당신의 출생지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를 찾아 나섰다. 다행이랄까 산청은 서부경남쪽이라 큰 눈은 잦아들었다. 미루지 않고 예정대로 나서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은 순례의 길이다. 그 길이 날씨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없는 게 아닌가. 그 길은 또한 나 스스로 정한 구도의 길이다. 그러니 더욱이나 딴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성철스님의 생가는 지금 옛 모습을 살려 복원해 놓았고 그 터에 절을 지어 겁외사(劫外寺)라 하고 있다.
성철스님은 1912년 음력 2월19일 태어났다. 부친 이상언과 모친 강상봉 사이에서 3남4녀중 장남이다. 속명(俗名)은 영주(英柱)이고 법호는 퇴옹(退翁), 법명은 성철(性徹)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자치통감(資治通鑑: 중국역사를 기록한 책)까지 배운 뒤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배우지 않고도 학문의 깊은 이치를 스스로 깨달았다. 늘 ‘영원에서 영원으로(From Enternity to Enternity)’라는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철학 문학 의학 등 동서고금의 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그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
<사진> 생가를 복원한 ‘율은고거’
어느 날 한 노스님이 건네 준 영가대사(永嘉大師: 674~713, 중국 스님)의 증도가(證道歌: 도를 깨친 노래)를 읽고 캄캄한 밤중에 밝은 횃불을 만난 것처럼 홀연히 심안(心眼)이 밝아짐을 깨달았다. 그 길로 지리산 대원사(大源寺)로 가서 중국 대혜스님(大慧: 1088~1163)의 글 서장(書狀)을 읽고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는 무(無)자 화두를 들고 불철주야로 참선 정진하였다. 정진 40일 만에 화두가 동정일여(動靜一如)에 이르게 되었다. 1936년 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여 백련암에 주석하고 있던 하동산(河東山: 1890~1965)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受戒得度) 했다.
성철스님의 생가터에 세워진 겁외사는 진리를 깨달아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고자 했던 스님의 생애를 드러내고 있는 절이다. 겁외사(劫外寺)라는 이름은 세속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진리와 함께 하고 있는 절이란 뜻이다.
스님의 집안은 대대로 지리산 자락 인근에서 제법 큰 부잣집이었다. 부친이 집안 살림을 잘 키워 사방 1km 이내에서 남의 땅을 밟지 않고도 지낼 정도였다고 한다. 겁외사에서 만난 강병은(姜炳垠, 80) 선생은 “스님의 생가가 왜 초가집이 아니고 기와집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흔히들 어른의 생가는 초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스님의 생가는 당시에 부잣집이었으니까 기아집이지요”라고 했다.
<사진> 누각 벽해루. 일주문이 따로 없어 이곳을 통해 절에 들어간다.
2001년 3월 창건한 겁외사는 일반적인 가람배치와는 달랐다. 일주문이 따로 없고 누각인 벽해루(碧海樓)를 통하여 절에 들어간다. 겁외사 마당 한가운데에 성철스님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법당인 대웅전은 절에 들어서면 왼쪽에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본존으로 모셔져 있으며 동양화가 김호석이 그린 성철스님 진영이 함께 모셔져 있다. 대웅전 벽화는 부처님 일대기가 아닌 성철스님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대웅전 주련(柱聯)은 성철스님의 오도송(悟道頌: 도를 깨친 노래)으로 했다. 대웅전 맞은편에는 심검당과 정오당 그리고 요사채가 있다.
생가를 복원한 율은고거(栗隱古居)는 대웅전 뒤쪽 혜근문을 지나서 있다. 전통적인 한옥 기와집으로 지어진 생가는 스님의 부친 호를 딴 것이다. 율은고거 왼쪽은 율은재, 오른쪽은 포영당이다. 율은재(栗隱)는 스님의 부친이 거처하던 사랑채의 모습을 간소하게 재현했다.
스님의 부친은 일본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일제시대 일본이 식민지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한 정책)을 거부할만큼 꼿꼿한 성품을 지녔던 분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문하에서 공부한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右)의 9대손인 부친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널리 통했다고 한다.
포영당(泡影堂)은 성철스님의 유품전시관이다. 전시된 유품들은 스님이 청년시절 읽은 책, 도첩(度牒), 누더기 두루마기, 고무신과 주장자. 장서목록, 안경, 필기류 노트, 승려 신분증, 친필 법어, 의학서 등이 전시돼 있다.
<사진> 유품전시관.
생가와 겁외사는 찾는 이로 하여금 출가이전의 스님, 그리고 당신의 평생의 삶과 수행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필자 / 이진두(李鎭斗) 논설위원
1944년 부산 출생으로 부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7~1973년 성철스님 상좌로 출가 수행했다. 불명은 원기(圓機). 부산일보 기자로 근무, 논설위원을 끝으로 퇴임했다(1977~2001년), 현재 불교신문 논설위원(2002~), 부산 해월정사(海月精舍) 교무국장이다.
[불교신문 2701호/ 3월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