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 결사 60주년 역사와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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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6-04 16:24 조회16,334회 댓글0건본문
봉암사 결사 60주년 역사와 참여자
현대 조계禪風의 원류…청담.성철.법전스님 동참
2007년은 봉암사 결사가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다. 조선조 억불 정책 500년, 일제에 의한 왜색화를 거치면서 황폐해진 한국불교가 해방 후 가야할 방향이 다져진 것이 바로 1947년 시작된 봉암사 결사다. 봉암사 결사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법당정리.가사.발우 등 佛法에 맞게 통일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공주규약’ 만들어
우봉.보문.자운스님 등 20여명 의기투합
1945년 일제로부터 나라가 해방되었다. 스님들도 해방된 나라에서 잘못된 불교를 바로 잡기 위해 지혜를 모았다. 오랜 도반인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한국 불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총림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두 스님은 해방 전부터 문경 대승사에서 함께 수행하며 올바른 수행 가풍을 세우기 위해서는 전통적 방식인 총림을 세워야한다는데 뜻을 같이했다. 두 스님은 총림을 세우는 것은 “부처님 법답게 살기 위해서”라는데 공감했다. 청담스님의 친딸이며 성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묘엄스님(수원 봉녕사 학장)은 이렇게 회고 했다. “해인사에서 총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두 분은 영산회상도를 그려가며 논의했다. 말법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재현해서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함으로써 말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이런 중노릇을 하자”
해인사에 총림을 세우고자 했던 처음의 뜻은 그러나 대처 측의 비협조로 무산된다. 대신 문경 봉암사가 새로운 불교를 일으킬 장소로 선정됐다. 1947년 6월 성철스님을 비롯한 젊은 수좌들이 봉암사에 선방을 열었다. 이때 성철스님 나이 36세 법납 12년이었다. 서울의 김법룡 거사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희귀 불서가 우여곡절 끝에 성철스님에게 건너갔다. 함께 불서를 인수했던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불서의 일부를 봉암사로 보냈다. 성철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1947년 가을에 나는 크나큰 환상을 안고 문경 봉암사로 갔다. 우봉스님은 사찰 운영의 전 책임을 지고 보문스님은 10년간 장경 수호에 진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자운스님과 법용 수좌도 함께 왔었다. 주지로는 보안노장을 모시고 십여 대중이 동거하였다”
성철스님은 봉암사에 들어간 근본 동기는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이것이 원이었다”고 말했었다. 부처님 법대로의 가풍은 선종 본래의 가풍을 살리고 옛 총림의 법도를 되찾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법을 바탕으로 수행을 기본으로 삼아 승가의 위의를 되찾아 인천의 사표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근본 지향점이며 봉암사 결사의 목적이었다.
1947년 시작된 봉암사 결사는 이처럼 성철스님, 자운스님, 이우봉스님, 보문스님 등 4명이 먼저 입주하고 뒤이어 장보안, 이법웅스님이 가세하여 10여명이 수행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듬해 청담스님, 향곡스님, 월산스님, 법전스님, 성수스님, 혜암스님이 참여했다. 봉암사 결사가 알려지자 3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성철스님은 82년 법문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우봉스님이 살림 맡고, 보문스님하고 자운스님하고, 내하고 이렇게 넷이 들어갔습니다. 청담스님은 해인사에서 가야총림 한다고 처음 시작할 때는 못 들어오고, 서로 약속은 했었지만, 그 뒤로 향곡.월산.종수(宗秀)스님, 젊은 사람으로는 도우(道雨).보경.법전.성수.혜암, 종회의장 하는 의현(義玄)이는 그 때 나이 열서너댓 살 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멤버가 한 20명 됐습니다”
결사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온갖 비불교적 요소들을 척결하는 일이 시작됐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이외에는 전부 다 정리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 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다” “불공은 자신이 성심껏 하는 것이지 중간에 스님이 축원하고 목탁치는 것은 본래 없었다”며 기존의 불공을 없앴다.
법당정리, 불공정리 이후 가사 장삼 발우를 부처님 법에 맞게 고치기 시작했다. 성철스님은 생전에 이에대해 “부처님 법에 바릿대는 와철(瓦鐵)입니다. 쇠로 하든지 질그릇으로 하지 목(木)바루는 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쓰고 있습니다. 가사(袈裟) 장삼을 보면, 가사나 장삼을 비단으로 못하게 했는데, 그 당시에 보면 전부 다 비단입니다. 색깔도 순수한 색이 아니고, 괴색(壞色)을 해야 되는 것이니, 그것도 비법(非法)입니다. 그래서 비단 가사.장삼, 목바릿대 이것을 싹 다 모아 가지고 탕탕 부수고 칼로 싹싹 기리고 해서는 마당에 갖다 놓고 내 손으로 불 싹 다 질렀습니다. 그리고서 시작했습니다.
가사는 봉암사에서 다시 만들고 괴색으로 물을 들였다. 바릿대가 없어 처음에는 양재기를 펴다가 나중에 옹기를 맞추어 썼다. 장삼은 송광사에 있던, 보조스님의 장삼을 자운스님이 보고 와서 새로 만들었다.
결사대중이 늘어나면서 결사의 이론적 기초와 방향, 그리고 지켜야할 원칙을 담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이 제정됐다. 기존의 안이한 삶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공양규칙도 정해 아침에는 죽을 먹고, 오후에는 약석(藥石)을 했다. 포살도 처음으로 실시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정신에 따라 곡식 또한 전부 스님들 손으로 직접 찧고, 밥도 손수 해 먹었다. 밭 메는 것 역시 스님들이 다 했고, 나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율장에 있는 그대로며 총림 청규를 따른 것이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거나 공부하러 왔다가도 공주규약을 보고는 기가 질려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공을 하지 않고 기도 염불을 폐지하니 신도들도 뚝 떨어져 재정은 더 궁핍해졌다. 하지만 결사대중들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봉암사 결사에 동참, 처음 성철스님을 만났던 법전스님(현 종정예하)은 “청담스님, 향곡스님, 종수스님 등 좋은 스님이 많이 계셨다. 생활하는 모습이 어찌나 바르던지 같이 간 도반 스님께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규칙이 까다로워 못 살겠다고 하더라요. 나는 해인사에 갈 생각이 없고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말하고 그 도반을 돌려보내고 성수스님에게 가서 여기서 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전 종정 혜암스님도 생전에 “봉암사의 가풍은 전혀 새로웠다. 모든 대중은 자급자족해서 살림을 하는 동시에 탁발해서 공부를 했다. 나무도 일꾼 쓰지 않고 직접 산에 가서 했다. 그럼에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부를 못 들여 야단이었다”
결사의 중심에 성철스님이 있었다. 성철스님은 정진 중인 스님들을 독려하기 위해 “밥값을 내놓으라”는 호통과 함께 다음날 아침 세숫물로 떠놓은 양철통의 물을 한 스님의 머리 위에 끼얹어 버리고 다른 스님에게는 재가 가득 찬 놋향로를 씌워버리기도 했다.
스님들이 봉암사에서 치열한 정진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신도들이 찾아왔다. 성철스님은 신도들에게 스님들에게 삼배를 하도록 했다. 그전까지 스님들은 천민(賤民) 취급을 받았다. 조선시대 탄압의 결과다. 사대부나 사대부 아녀자들이 절에 오면 승려들은 그들의 종노릇을 했다. 가마를 메고 절 뒷산에 놀러가면 등짐을 매야했다. 호칭도 종 부르듯 ‘야야 자자’ 했다. 일부 덕 높고 도력이 깊은 스님만이 ‘대사’(大師)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런 인식이 깊이 박혀있는 신도들에게 스님들에게 엎드려 삼배를 하라는 명령은 천지개벽과 다름없었다. 성철스님은 법회에 참석하는 신도들에게 “이것은 부처님 법이니 어디서든지 스님을 만나면 꼭 세 번씩 절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도가 아니야”라면서 반드시 절을 시켰다. 스님들까지 이를 두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봉암사 결사는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새 나라의 향방을 둘러싼 백가쟁명식의 논쟁은 급기야 격렬한 좌우 이데올로기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남쪽에서 좌익 활동이 금지되자 이들은 지리산 등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거점을 옮겨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 싸움은 더 격렬하고 빈번하게 벌어졌다. 희양산 깊숙한 산골에 위치한 봉암사 결사 대중들도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어졌다. 빨치산의 잦은 출몰로 대중들은 목숨까지 위협받았다. 좌.우의 대립이 심하던 그 때에, 스님이 어쩌다 행각중에 토방에서 장좌불와를 하고 있으면, 밤중에 사람들이 슬며시 찾아와 “앞으로 좌익이 이길까요. 우익이 이길까요? 제게만 살짝 알려 주십시오”하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스님은 한결같이 “나는 사문이라 그런 것은 모른다”고 대답했고, 그러면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거나 심지어는 욕을 퍼부었다. 군경은 빨치산으로 위장하고 빨치산은 우익으로 위장해 스님들의 의중을 떠보았던 것이다. 결국 1950년 3월 동안거 해제 직후 결사는 해체되었다.
4년에 불과했지만 결사가 남긴 파장은 크고 깊었다. 봉암사 결사 참가자 가운데 청담 성철 혜암 법전 등 종정이 4명 나왔다는 사실은 이 결사가 조계종의 수행 전통 형성에 끼친 영향을 보여준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 2291호/ 1월1일자]
2006-12-29 오후 3:44:36 / 송고
현대 조계禪風의 원류…청담.성철.법전스님 동참
2007년은 봉암사 결사가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다. 조선조 억불 정책 500년, 일제에 의한 왜색화를 거치면서 황폐해진 한국불교가 해방 후 가야할 방향이 다져진 것이 바로 1947년 시작된 봉암사 결사다. 봉암사 결사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법당정리.가사.발우 등 佛法에 맞게 통일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공주규약’ 만들어
우봉.보문.자운스님 등 20여명 의기투합
1945년 일제로부터 나라가 해방되었다. 스님들도 해방된 나라에서 잘못된 불교를 바로 잡기 위해 지혜를 모았다. 오랜 도반인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한국 불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총림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두 스님은 해방 전부터 문경 대승사에서 함께 수행하며 올바른 수행 가풍을 세우기 위해서는 전통적 방식인 총림을 세워야한다는데 뜻을 같이했다. 두 스님은 총림을 세우는 것은 “부처님 법답게 살기 위해서”라는데 공감했다. 청담스님의 친딸이며 성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묘엄스님(수원 봉녕사 학장)은 이렇게 회고 했다. “해인사에서 총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두 분은 영산회상도를 그려가며 논의했다. 말법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재현해서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함으로써 말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이런 중노릇을 하자”
해인사에 총림을 세우고자 했던 처음의 뜻은 그러나 대처 측의 비협조로 무산된다. 대신 문경 봉암사가 새로운 불교를 일으킬 장소로 선정됐다. 1947년 6월 성철스님을 비롯한 젊은 수좌들이 봉암사에 선방을 열었다. 이때 성철스님 나이 36세 법납 12년이었다. 서울의 김법룡 거사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희귀 불서가 우여곡절 끝에 성철스님에게 건너갔다. 함께 불서를 인수했던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불서의 일부를 봉암사로 보냈다. 성철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1947년 가을에 나는 크나큰 환상을 안고 문경 봉암사로 갔다. 우봉스님은 사찰 운영의 전 책임을 지고 보문스님은 10년간 장경 수호에 진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자운스님과 법용 수좌도 함께 왔었다. 주지로는 보안노장을 모시고 십여 대중이 동거하였다”
성철스님은 봉암사에 들어간 근본 동기는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이것이 원이었다”고 말했었다. 부처님 법대로의 가풍은 선종 본래의 가풍을 살리고 옛 총림의 법도를 되찾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법을 바탕으로 수행을 기본으로 삼아 승가의 위의를 되찾아 인천의 사표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근본 지향점이며 봉암사 결사의 목적이었다.
1947년 시작된 봉암사 결사는 이처럼 성철스님, 자운스님, 이우봉스님, 보문스님 등 4명이 먼저 입주하고 뒤이어 장보안, 이법웅스님이 가세하여 10여명이 수행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듬해 청담스님, 향곡스님, 월산스님, 법전스님, 성수스님, 혜암스님이 참여했다. 봉암사 결사가 알려지자 3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성철스님은 82년 법문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우봉스님이 살림 맡고, 보문스님하고 자운스님하고, 내하고 이렇게 넷이 들어갔습니다. 청담스님은 해인사에서 가야총림 한다고 처음 시작할 때는 못 들어오고, 서로 약속은 했었지만, 그 뒤로 향곡.월산.종수(宗秀)스님, 젊은 사람으로는 도우(道雨).보경.법전.성수.혜암, 종회의장 하는 의현(義玄)이는 그 때 나이 열서너댓 살 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멤버가 한 20명 됐습니다”
결사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온갖 비불교적 요소들을 척결하는 일이 시작됐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이외에는 전부 다 정리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 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다” “불공은 자신이 성심껏 하는 것이지 중간에 스님이 축원하고 목탁치는 것은 본래 없었다”며 기존의 불공을 없앴다.
법당정리, 불공정리 이후 가사 장삼 발우를 부처님 법에 맞게 고치기 시작했다. 성철스님은 생전에 이에대해 “부처님 법에 바릿대는 와철(瓦鐵)입니다. 쇠로 하든지 질그릇으로 하지 목(木)바루는 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쓰고 있습니다. 가사(袈裟) 장삼을 보면, 가사나 장삼을 비단으로 못하게 했는데, 그 당시에 보면 전부 다 비단입니다. 색깔도 순수한 색이 아니고, 괴색(壞色)을 해야 되는 것이니, 그것도 비법(非法)입니다. 그래서 비단 가사.장삼, 목바릿대 이것을 싹 다 모아 가지고 탕탕 부수고 칼로 싹싹 기리고 해서는 마당에 갖다 놓고 내 손으로 불 싹 다 질렀습니다. 그리고서 시작했습니다.
가사는 봉암사에서 다시 만들고 괴색으로 물을 들였다. 바릿대가 없어 처음에는 양재기를 펴다가 나중에 옹기를 맞추어 썼다. 장삼은 송광사에 있던, 보조스님의 장삼을 자운스님이 보고 와서 새로 만들었다.
결사대중이 늘어나면서 결사의 이론적 기초와 방향, 그리고 지켜야할 원칙을 담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이 제정됐다. 기존의 안이한 삶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공양규칙도 정해 아침에는 죽을 먹고, 오후에는 약석(藥石)을 했다. 포살도 처음으로 실시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정신에 따라 곡식 또한 전부 스님들 손으로 직접 찧고, 밥도 손수 해 먹었다. 밭 메는 것 역시 스님들이 다 했고, 나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율장에 있는 그대로며 총림 청규를 따른 것이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거나 공부하러 왔다가도 공주규약을 보고는 기가 질려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공을 하지 않고 기도 염불을 폐지하니 신도들도 뚝 떨어져 재정은 더 궁핍해졌다. 하지만 결사대중들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봉암사 결사에 동참, 처음 성철스님을 만났던 법전스님(현 종정예하)은 “청담스님, 향곡스님, 종수스님 등 좋은 스님이 많이 계셨다. 생활하는 모습이 어찌나 바르던지 같이 간 도반 스님께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규칙이 까다로워 못 살겠다고 하더라요. 나는 해인사에 갈 생각이 없고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말하고 그 도반을 돌려보내고 성수스님에게 가서 여기서 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전 종정 혜암스님도 생전에 “봉암사의 가풍은 전혀 새로웠다. 모든 대중은 자급자족해서 살림을 하는 동시에 탁발해서 공부를 했다. 나무도 일꾼 쓰지 않고 직접 산에 가서 했다. 그럼에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부를 못 들여 야단이었다”
결사의 중심에 성철스님이 있었다. 성철스님은 정진 중인 스님들을 독려하기 위해 “밥값을 내놓으라”는 호통과 함께 다음날 아침 세숫물로 떠놓은 양철통의 물을 한 스님의 머리 위에 끼얹어 버리고 다른 스님에게는 재가 가득 찬 놋향로를 씌워버리기도 했다.
스님들이 봉암사에서 치열한 정진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신도들이 찾아왔다. 성철스님은 신도들에게 스님들에게 삼배를 하도록 했다. 그전까지 스님들은 천민(賤民) 취급을 받았다. 조선시대 탄압의 결과다. 사대부나 사대부 아녀자들이 절에 오면 승려들은 그들의 종노릇을 했다. 가마를 메고 절 뒷산에 놀러가면 등짐을 매야했다. 호칭도 종 부르듯 ‘야야 자자’ 했다. 일부 덕 높고 도력이 깊은 스님만이 ‘대사’(大師)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런 인식이 깊이 박혀있는 신도들에게 스님들에게 엎드려 삼배를 하라는 명령은 천지개벽과 다름없었다. 성철스님은 법회에 참석하는 신도들에게 “이것은 부처님 법이니 어디서든지 스님을 만나면 꼭 세 번씩 절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도가 아니야”라면서 반드시 절을 시켰다. 스님들까지 이를 두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봉암사 결사는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새 나라의 향방을 둘러싼 백가쟁명식의 논쟁은 급기야 격렬한 좌우 이데올로기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남쪽에서 좌익 활동이 금지되자 이들은 지리산 등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거점을 옮겨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 싸움은 더 격렬하고 빈번하게 벌어졌다. 희양산 깊숙한 산골에 위치한 봉암사 결사 대중들도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어졌다. 빨치산의 잦은 출몰로 대중들은 목숨까지 위협받았다. 좌.우의 대립이 심하던 그 때에, 스님이 어쩌다 행각중에 토방에서 장좌불와를 하고 있으면, 밤중에 사람들이 슬며시 찾아와 “앞으로 좌익이 이길까요. 우익이 이길까요? 제게만 살짝 알려 주십시오”하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스님은 한결같이 “나는 사문이라 그런 것은 모른다”고 대답했고, 그러면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거나 심지어는 욕을 퍼부었다. 군경은 빨치산으로 위장하고 빨치산은 우익으로 위장해 스님들의 의중을 떠보았던 것이다. 결국 1950년 3월 동안거 해제 직후 결사는 해체되었다.
4년에 불과했지만 결사가 남긴 파장은 크고 깊었다. 봉암사 결사 참가자 가운데 청담 성철 혜암 법전 등 종정이 4명 나왔다는 사실은 이 결사가 조계종의 수행 전통 형성에 끼친 영향을 보여준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 2291호/ 1월1일자]
2006-12-29 오후 3:44:36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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