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 결사와 현대 한국불교의 과제[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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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6-04 16:24 조회16,182회 댓글0건본문
봉암사 결사와 현대 한국불교의 과제
“실천적 이념과 철저한 수행가풍 되살려야”
1940년대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인 불자가 40만 정도로 전 인구 대비 1%에 불과했다. 당시 불교는 기독교 다음으로 2위 종교였다. 그런데 지난 2005년 인구센서스에서 불교 인구는 1000만여명으로 23%에 도달,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불교인구가 이와 같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원인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여기에 대한 주된 해답을 산중에서 묵묵히 본분사에 전념한 수행자들에게서 찾는다. 특히 세속의 부귀영화를 내던지고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고 1947년부터 깊고 깊은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수선 결사를 단행한 수행승들이 그 표상이다.
세상 사람들이 명예와 출세를 쫓고, 대다수의 승려들이 안락을 쫓아 계율을 어기고 대처할 때, 이 소수의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출가 정신을 쫗아 산중에서 오로지 수행의 길만을 고집했기에 부처님의 정법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왜색불교 잔재 걷어내
조선조 500년간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계는 산중 깊은 곳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개화기에 스님들의 입성금지가 풀려 너도나도 서울 구경이 붐인 시절에 경허선사는 “내 평생 소원이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밝히며, 1899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수선 결사를 제창했다. 그 이후 10년간 영호남의 범어사, 통도사,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법주사 등을 오가며 선원을 재건하고 청년 수좌들을 양성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선학원의 뿌리고, 정화운동을 제창한 청정 비구 수좌들이고, 조계종의 법맥이 됐다.
3ㆍ1독립만세운동을 선언한 33인의 한 분인 백용성선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망월사에서 만일수선결사를 제창했고, 많은 제자를 양성해 오늘날 조계종의 종맥을 전파했다. 이렇듯 20세기 수선 결사를 제창한 경허ㆍ용성 두 선사는 국운이 위태로운 시대 흐름을 알고 부처님의 정법과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결사하고 선원을 유지코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이러한 기반이 있었기에 해방 직후 1947년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20~30대의 청년 비구승들은 일단의 결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때 교단 차원에서 효봉스님을 조실로 해인사 가야총림과 만암스님 주도의 백양사 고불총림이 조직됐으나 대처승들로 인해 총림 운영에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희양산 봉암사에는 젊은 비구 수좌들인 성철, 자운, 보문, 우봉스님이 “일체 세속적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살아 보자”는 정신으로 결사를 단행했다. 이후 청담, 향곡, 월산, 혜암, 성수, 법전, 정천, 도우, 지관스님 등등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속속 모여 전설을 만들어 갔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 “출가 수행자의 본분사로 돌아가자!”
이 지당한 말이 해방 직후 그 격동기에는 참으로 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청담, 성철, 자운, 보문, 향곡선사들은 “더 이상 교단과 사찰에 기대할 것이 없으니 우리라도 여법한 수행 도량을 이루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 보자”는 원력으로 화두 참선과 운력, 선종 백장청규 정신인 자작자수를 실천해 나갔다. 이러한 결사 소식은 수행자들의 입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공부에 뜻을 둔 수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도들도 처음에는 제사 불공도 안 해주는 스님들을 어렵게 대하다가 스님들이 열심히 공부한다는 소문이 나자 오히려 전국에서 귀의하는 붐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사에서 획을 긋는 몇 가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됐다.
첫째, 출가 수행자가 본분에만 전념했다. 당시에는 대처승들이 주류였기에 스님들이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갖가지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봉암사 비구 수좌들은 부처님 법 중심으로 살자는 확고한 가치관으로 수행과 지계 정신에 철저했다. 이것은 당시 전도된 한국불교계에 새롭게 수행자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둘째, 화두 참선과 운력, 일일부작 일일불식을 실천하는 선종의 백장청규 가풍을 실천하며 수행 종풍을 진작했고, 이것은 오늘날 조계종의 총림과 선원의 모델을 만들었다.
셋째, 보름마다 자자와 포살을 하는 등 청정지계(淸淨持戒) 정신을 드높였으며, 〈범망경〉에 근거해 대승보살계 수지운동을 시작했다.
넷째, 괴색 가사와 보조 장삼을 도입해 승려의 의제를 정비했다. 이를 통해 출가 수행자의 위의를 갖추고 정체성을 명실상부하게 했다.
다섯째, 산신각과 칠성각, 그리고 불공 의식을 없애고 번잡한 예불 의식을 간소화해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독송하는 의례를 새롭게 정립했다.
비전과 가치 제시
여섯째, 신도가 스님에게 삼배하는 예법을 시행했다. 당시까지도 조선조 오백년간의 억불숭유정책의 잔재가 남아 유력한 신도들은 절에 와서 스님들을 종 부리듯이 했다. 이러한 때에 스님들이 승보(僧寶)로서 삼보(三寶)라는 위상을 세우고 신도가 귀의 3배하는 의식을 마련했다. 이것은 승가의 위의를 확립하려는 고육지책이었고, 또한 스님들에게는 불법의 전승자로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도록 하는 취지였다.
일곱째, 결사 참여자들은 1962년 통합종단 출범 이후 대부분 조계종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청담, 성철, 혜암, 법전스님은 종정에 추대됐고, 자운, 월산, 성수, 지관스님 등 일곱 분은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어찌 보면, 이런 걸출한 인물이 나온 것이 이 결사의 가장 큰 결실이라 하겠다.
봉암사 결사는 비록 전쟁으로 중단돼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진행됐지만, 좌.우 이념 대립이라는 사회적 혼란기와 비구.대처라는 교단 갈등시대에 한국불교 수행자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이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에 “부처님 법대로”라는 새 비전과 가치를 제시했고,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범과 발전에 사상문화적 영향을 주었다.
당시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신 분들이 그 짧은 기간에 스스로 한 창조적 결단이 30년, 60년 뒤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이라 짐작한 분은 많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봉암사 참여 수행자들의 그 길이 부처님 가르침에 부합한다는 실천과 확신이 결국, 이후 한국불교의 전통 사상문화 복원과 불교중흥의 새 비전과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새해는 봉암사 결사 60주년이다. 우리는 봉암사 결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첫째, 한국불교와 조계종은 수행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이후 한국불교와 조계종단의 혼란과 내분에도 불구하고 1000만 불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산중에서 “부처님 법대로”라는 신념으로 수행의 본분을 지켜온 수행자들의 수행력이라는 점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
이를 교훈으로 출가 수행자들이 수행의 본분사를 회복하는 것, 수행의 가치를 복원하는 것, 이것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이며 비전이다.
또한 우리는 한국불교의 독특한 수행 정신과 문화를 대중화하고 생활화하고 세계화해야 한다. 우리처럼 동안거ㆍ하안거 수행을 대중적으로 하는 공동체는 이 지구상에 희유하다. 이러한 수행문화를 확산시켜 대립과 갈등으로 지친 인류에게 수행과 화합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대안의 수행공동체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총무원과 총림, 교구본사의 대중들이 수행으로 모범을 세워가야 할 것이다. 마침 선원에서도 백장 청규정신을 되살려 공동 청규를 제정하려고 한다. 이와 함께 종단의 각급 종무기관과 총림, 본사급 사찰에서도 시대 상황에 맞는 수행과 소임 청규를 만들어 수행을 진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선도적인 모범을 통해 수행의 가치가 스스로 내면화되고 가장 가까운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때 신도 대중과 일반인들에게도 수행문화가 조용히 확산돼 갈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선도해 나갈 인재 불사가 필요하다. 지금은 지식정보화, 세계화 시대다. 출가 수행자의 본분을 확립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으면서 방편을 자유자재로 시설할 역량을 갖춘 스님들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당식 교육만으로는 다종교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춘 수행자를 기대하기 어렵다.
새로운 결사 필요
마지막으로 봉암사 결사와 같은 현대적인 결사운동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불교는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으나 이를 선도해 나갈 안목과 역량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다. 인재 양성은 교육과 수행 시스템으로 해야 하겠지만, 당장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스스로 도반과 더불어 탁마하고 수행하는 결사 공동체가 그 대안일 수 있다. 출가 수행자와 재가 신도들이 각자 분상에서 도반들과 수행과 교화를 진작하는 결사가 필요하다.
지금은 부처님 법의 가치를 중심으로 수행과 교화의 본분을 진작하는 결사운동, 수행과 교화의 다종다양한 모델을 제시하고 실천할 때이다. 가톨릭의 다양한 수도회가 교단의 큰 틀을 공유하면서 활동은 독립적으로 하는 모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봉암사 결사의 의미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견해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박 희 승 조계종 총무원 기획차장
[불교신문 2291호/ 1월1일자]
2006-12-29 오후 3:46:11 / 송고
“실천적 이념과 철저한 수행가풍 되살려야”
1940년대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인 불자가 40만 정도로 전 인구 대비 1%에 불과했다. 당시 불교는 기독교 다음으로 2위 종교였다. 그런데 지난 2005년 인구센서스에서 불교 인구는 1000만여명으로 23%에 도달,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불교인구가 이와 같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원인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여기에 대한 주된 해답을 산중에서 묵묵히 본분사에 전념한 수행자들에게서 찾는다. 특히 세속의 부귀영화를 내던지고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고 1947년부터 깊고 깊은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수선 결사를 단행한 수행승들이 그 표상이다.
세상 사람들이 명예와 출세를 쫓고, 대다수의 승려들이 안락을 쫓아 계율을 어기고 대처할 때, 이 소수의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출가 정신을 쫗아 산중에서 오로지 수행의 길만을 고집했기에 부처님의 정법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왜색불교 잔재 걷어내
조선조 500년간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계는 산중 깊은 곳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개화기에 스님들의 입성금지가 풀려 너도나도 서울 구경이 붐인 시절에 경허선사는 “내 평생 소원이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밝히며, 1899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수선 결사를 제창했다. 그 이후 10년간 영호남의 범어사, 통도사,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법주사 등을 오가며 선원을 재건하고 청년 수좌들을 양성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선학원의 뿌리고, 정화운동을 제창한 청정 비구 수좌들이고, 조계종의 법맥이 됐다.
3ㆍ1독립만세운동을 선언한 33인의 한 분인 백용성선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망월사에서 만일수선결사를 제창했고, 많은 제자를 양성해 오늘날 조계종의 종맥을 전파했다. 이렇듯 20세기 수선 결사를 제창한 경허ㆍ용성 두 선사는 국운이 위태로운 시대 흐름을 알고 부처님의 정법과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결사하고 선원을 유지코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이러한 기반이 있었기에 해방 직후 1947년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20~30대의 청년 비구승들은 일단의 결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때 교단 차원에서 효봉스님을 조실로 해인사 가야총림과 만암스님 주도의 백양사 고불총림이 조직됐으나 대처승들로 인해 총림 운영에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희양산 봉암사에는 젊은 비구 수좌들인 성철, 자운, 보문, 우봉스님이 “일체 세속적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살아 보자”는 정신으로 결사를 단행했다. 이후 청담, 향곡, 월산, 혜암, 성수, 법전, 정천, 도우, 지관스님 등등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속속 모여 전설을 만들어 갔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 “출가 수행자의 본분사로 돌아가자!”
이 지당한 말이 해방 직후 그 격동기에는 참으로 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청담, 성철, 자운, 보문, 향곡선사들은 “더 이상 교단과 사찰에 기대할 것이 없으니 우리라도 여법한 수행 도량을 이루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 보자”는 원력으로 화두 참선과 운력, 선종 백장청규 정신인 자작자수를 실천해 나갔다. 이러한 결사 소식은 수행자들의 입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공부에 뜻을 둔 수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도들도 처음에는 제사 불공도 안 해주는 스님들을 어렵게 대하다가 스님들이 열심히 공부한다는 소문이 나자 오히려 전국에서 귀의하는 붐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사에서 획을 긋는 몇 가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됐다.
첫째, 출가 수행자가 본분에만 전념했다. 당시에는 대처승들이 주류였기에 스님들이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갖가지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봉암사 비구 수좌들은 부처님 법 중심으로 살자는 확고한 가치관으로 수행과 지계 정신에 철저했다. 이것은 당시 전도된 한국불교계에 새롭게 수행자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둘째, 화두 참선과 운력, 일일부작 일일불식을 실천하는 선종의 백장청규 가풍을 실천하며 수행 종풍을 진작했고, 이것은 오늘날 조계종의 총림과 선원의 모델을 만들었다.
셋째, 보름마다 자자와 포살을 하는 등 청정지계(淸淨持戒) 정신을 드높였으며, 〈범망경〉에 근거해 대승보살계 수지운동을 시작했다.
넷째, 괴색 가사와 보조 장삼을 도입해 승려의 의제를 정비했다. 이를 통해 출가 수행자의 위의를 갖추고 정체성을 명실상부하게 했다.
다섯째, 산신각과 칠성각, 그리고 불공 의식을 없애고 번잡한 예불 의식을 간소화해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독송하는 의례를 새롭게 정립했다.
비전과 가치 제시
여섯째, 신도가 스님에게 삼배하는 예법을 시행했다. 당시까지도 조선조 오백년간의 억불숭유정책의 잔재가 남아 유력한 신도들은 절에 와서 스님들을 종 부리듯이 했다. 이러한 때에 스님들이 승보(僧寶)로서 삼보(三寶)라는 위상을 세우고 신도가 귀의 3배하는 의식을 마련했다. 이것은 승가의 위의를 확립하려는 고육지책이었고, 또한 스님들에게는 불법의 전승자로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도록 하는 취지였다.
일곱째, 결사 참여자들은 1962년 통합종단 출범 이후 대부분 조계종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청담, 성철, 혜암, 법전스님은 종정에 추대됐고, 자운, 월산, 성수, 지관스님 등 일곱 분은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어찌 보면, 이런 걸출한 인물이 나온 것이 이 결사의 가장 큰 결실이라 하겠다.
봉암사 결사는 비록 전쟁으로 중단돼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진행됐지만, 좌.우 이념 대립이라는 사회적 혼란기와 비구.대처라는 교단 갈등시대에 한국불교 수행자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이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에 “부처님 법대로”라는 새 비전과 가치를 제시했고,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범과 발전에 사상문화적 영향을 주었다.
당시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신 분들이 그 짧은 기간에 스스로 한 창조적 결단이 30년, 60년 뒤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이라 짐작한 분은 많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봉암사 참여 수행자들의 그 길이 부처님 가르침에 부합한다는 실천과 확신이 결국, 이후 한국불교의 전통 사상문화 복원과 불교중흥의 새 비전과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새해는 봉암사 결사 60주년이다. 우리는 봉암사 결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첫째, 한국불교와 조계종은 수행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이후 한국불교와 조계종단의 혼란과 내분에도 불구하고 1000만 불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산중에서 “부처님 법대로”라는 신념으로 수행의 본분을 지켜온 수행자들의 수행력이라는 점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
이를 교훈으로 출가 수행자들이 수행의 본분사를 회복하는 것, 수행의 가치를 복원하는 것, 이것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이며 비전이다.
또한 우리는 한국불교의 독특한 수행 정신과 문화를 대중화하고 생활화하고 세계화해야 한다. 우리처럼 동안거ㆍ하안거 수행을 대중적으로 하는 공동체는 이 지구상에 희유하다. 이러한 수행문화를 확산시켜 대립과 갈등으로 지친 인류에게 수행과 화합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대안의 수행공동체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총무원과 총림, 교구본사의 대중들이 수행으로 모범을 세워가야 할 것이다. 마침 선원에서도 백장 청규정신을 되살려 공동 청규를 제정하려고 한다. 이와 함께 종단의 각급 종무기관과 총림, 본사급 사찰에서도 시대 상황에 맞는 수행과 소임 청규를 만들어 수행을 진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선도적인 모범을 통해 수행의 가치가 스스로 내면화되고 가장 가까운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때 신도 대중과 일반인들에게도 수행문화가 조용히 확산돼 갈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선도해 나갈 인재 불사가 필요하다. 지금은 지식정보화, 세계화 시대다. 출가 수행자의 본분을 확립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으면서 방편을 자유자재로 시설할 역량을 갖춘 스님들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당식 교육만으로는 다종교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춘 수행자를 기대하기 어렵다.
새로운 결사 필요
마지막으로 봉암사 결사와 같은 현대적인 결사운동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불교는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으나 이를 선도해 나갈 안목과 역량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다. 인재 양성은 교육과 수행 시스템으로 해야 하겠지만, 당장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스스로 도반과 더불어 탁마하고 수행하는 결사 공동체가 그 대안일 수 있다. 출가 수행자와 재가 신도들이 각자 분상에서 도반들과 수행과 교화를 진작하는 결사가 필요하다.
지금은 부처님 법의 가치를 중심으로 수행과 교화의 본분을 진작하는 결사운동, 수행과 교화의 다종다양한 모델을 제시하고 실천할 때이다. 가톨릭의 다양한 수도회가 교단의 큰 틀을 공유하면서 활동은 독립적으로 하는 모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봉암사 결사의 의미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견해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박 희 승 조계종 총무원 기획차장
[불교신문 2291호/ 1월1일자]
2006-12-29 오후 3:46:11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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