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동안 매일 3000배 김 기 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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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6-04 16:35 조회17,022회 댓글0건본문
“인생은 원석…다듬으면 ‘부처 보석’으로 빛나”
7년 동안 매일 3000배 김 기 연 씨
기사등록일 [2007년 05월 22일 화요일]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의 한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했다.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이 칼날이 되어 그녀를 천 길 낭떠러지로 몰고 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세상에 대해 더 이상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너무 억울했다. 정말 이렇게 끝내야 하는 걸까. 생과 사의 갈림길…. 그 순간 독실한 불자였던 지인 한 분이 ‘불교를 공부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 스쳐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난생 처음 부처님을 떠올렸고, 약봉지를 접어둔 채 절로 향했다. 그것이 불연(佛緣)의 시작이었다.
성인월 김기연(48·부산 서대신동) 씨. 그녀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깊은 우물 바닥 속을 헤매듯 절망의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녀에게 불교는 한 줄기 빛이었다.
25세 절망서 만난 부처님
“고등학교와 대학 모두 가톨릭 학교를 다녀 당연히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왜 불교를 공부해보라던 그 분의 말씀이 그토록 강렬하게 와 닿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에 갔고, 정성껏 삼배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불교를 꼭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더군요.”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김 씨는 불교에 매달렸다. 인과(因果), 업(業), 윤회(輪廻)…. 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 억울하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에게 불교는 새로운 시야를 갖도록 했다. 지금 겪는 모든 고통이 나에게서 비롯됐고, 그것을 해결하고 풀어나가는 것 또한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뼈아픈 자각이었다. 그녀는 죽을 각오로 부지런히 살았다. 착한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금지옥엽 같은 딸과 아들도 낳았다.
하지만 그 무렵 또 다시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다. 6살 난 큰 딸이 갑자기 신장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딸아이는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자고 나면 하루가 다르게 퉁퉁 부어갔다. 의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곁에서 손 잡아주고 눈물 흘리는 것뿐.
김 씨는 현대 의학의 한계를 절감했다. 평생 아이가 힘들게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야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절’.
“절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나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절을 시켜야겠다고요.”
주변에서는 그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남편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절을 하면 병이 크게 악화될 게 불 보듯 뻔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이 아이를 붙들고 절을 했다. 강요 반 설득 반.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면서 피눈물을 삼켜야 했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2년 쯤 지났을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이의 병세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호전된 것이다.
“절에 대한 확신이 들었어요. 절은 그저 운동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는 것을 말이죠. 그 후 한 배 한 배 더욱 정성껏 절을 하게 됐습니다.”
그녀는 집에서 하루 600배씩 5일간 삼천배를 혼자 시작했다. 온 몸이 무너져 내릴 듯한 힘겨움. 그러나 절을 마치고 나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요함과 뿌듯함이 있었다. 얼마 뒤 김 씨는 또 다시 하루 천배씩 열흘 동안 만배를 마쳤다.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왠지 모를 자신감이 차올랐다.
만배를 회향한 뒤 그는 삼천배를 하루에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에 대한 관심은 김 씨를 한국 절 수행의 메카라 일컬어지는 백련암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스승이 있었고 도반이 있었다. 그는 도반들과 함께 백련암으로 가는 차량에 몸을 실었다.
.... (중략)
부산=안문옥 기자 moonok@beopbo.com
902호 [2007-05-23]
7년 동안 매일 3000배 김 기 연 씨
기사등록일 [2007년 05월 22일 화요일]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의 한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했다.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이 칼날이 되어 그녀를 천 길 낭떠러지로 몰고 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세상에 대해 더 이상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너무 억울했다. 정말 이렇게 끝내야 하는 걸까. 생과 사의 갈림길…. 그 순간 독실한 불자였던 지인 한 분이 ‘불교를 공부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 스쳐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난생 처음 부처님을 떠올렸고, 약봉지를 접어둔 채 절로 향했다. 그것이 불연(佛緣)의 시작이었다.
성인월 김기연(48·부산 서대신동) 씨. 그녀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깊은 우물 바닥 속을 헤매듯 절망의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녀에게 불교는 한 줄기 빛이었다.
25세 절망서 만난 부처님
“고등학교와 대학 모두 가톨릭 학교를 다녀 당연히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왜 불교를 공부해보라던 그 분의 말씀이 그토록 강렬하게 와 닿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에 갔고, 정성껏 삼배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불교를 꼭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더군요.”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김 씨는 불교에 매달렸다. 인과(因果), 업(業), 윤회(輪廻)…. 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 억울하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에게 불교는 새로운 시야를 갖도록 했다. 지금 겪는 모든 고통이 나에게서 비롯됐고, 그것을 해결하고 풀어나가는 것 또한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뼈아픈 자각이었다. 그녀는 죽을 각오로 부지런히 살았다. 착한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금지옥엽 같은 딸과 아들도 낳았다.
하지만 그 무렵 또 다시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다. 6살 난 큰 딸이 갑자기 신장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딸아이는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자고 나면 하루가 다르게 퉁퉁 부어갔다. 의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곁에서 손 잡아주고 눈물 흘리는 것뿐.
김 씨는 현대 의학의 한계를 절감했다. 평생 아이가 힘들게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야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절’.
“절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나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절을 시켜야겠다고요.”
주변에서는 그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남편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절을 하면 병이 크게 악화될 게 불 보듯 뻔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이 아이를 붙들고 절을 했다. 강요 반 설득 반.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면서 피눈물을 삼켜야 했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2년 쯤 지났을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이의 병세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호전된 것이다.
“절에 대한 확신이 들었어요. 절은 그저 운동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는 것을 말이죠. 그 후 한 배 한 배 더욱 정성껏 절을 하게 됐습니다.”
그녀는 집에서 하루 600배씩 5일간 삼천배를 혼자 시작했다. 온 몸이 무너져 내릴 듯한 힘겨움. 그러나 절을 마치고 나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요함과 뿌듯함이 있었다. 얼마 뒤 김 씨는 또 다시 하루 천배씩 열흘 동안 만배를 마쳤다.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왠지 모를 자신감이 차올랐다.
만배를 회향한 뒤 그는 삼천배를 하루에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에 대한 관심은 김 씨를 한국 절 수행의 메카라 일컬어지는 백련암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스승이 있었고 도반이 있었다. 그는 도반들과 함께 백련암으로 가는 차량에 몸을 실었다.
.... (중략)
부산=안문옥 기자 moonok@beopbo.com
902호 [2007-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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