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에 청담스님 사리탑이 보인다. 멀리보이는 건물은 약사전이다. |
문수암 현판. |
봉암사 있던 책 옮겨 놓고
6.25전쟁 와중에도
‘수행정진 일념’ 이어가
청담스님 수행정신 상징
사리탑.탑비도 눈에 띠어
문수암 전경. |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구도행각을 하다가 아랫마을의 어느 불교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꿈속에 거지 모습을 한 스님 두 분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튿날 아침에 스님이 공양을 들고 있는데 마침 그 거지들이 찾아와 밥을 구걸하므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두 거지는 말없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의상스님은 그들을 따라갔는데 바로 지금의 절터에 이르렀다. 주변경관을 살펴보니 주위는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해에 자리한 수많은 섬들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절경을 이루어 황홀감에 빠져 있었다. 그 때 걸인모습의 두 스님이 나타나 이르기를 “의상아, 우리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인데 이곳 바위벽 속에 산다”라고 하고는 바위 사이로 들어갔다. 이에 의상스님은 3일 낮과 밤을 기도한 후 절을 지었는데 바로 문수암이라는 것이다.(<전통사찰총서20〉, 349쪽)
법당의 문수동자상. 뒤편 유리벽으로 문수보살이 있다는 법당 뒤 암벽을 바로 보게 해 놓았다. |
문수암은 1642(조선 인조20)년에 이르러 중창되었다고 하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다. 현대에는 청담(靑潭, 1902~1971)스님이 이곳에서 정진했다고 한다.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이 가운데 모셔져 있고 그 오른쪽엔 지장보살 그리고 왼쪽엔 문수보살상이 모셔졌다.
문수보살상 뒤편 벽은 유리벽으로 법당 뒤 문수보살이 있다는 암벽을 바로 보게 해놓았다. 법당에서 조금 내려오다 왼쪽 바위 위에 청담스님의 사리탑과 탑비가 있다. 탑비문은 운허스님이 썼다. 청담스님 열반 후 사리 15과(顆)를 수습, 이곳 문수암에 6과를 모셨다고 한다. 사리탑은 1973년 10월25일 정천(正天)스님이 주지, 현성(玄惺)스님이 총무로 있을 때 세웠다.
청담스님의 수행정신이 오롯이 살아있는 이곳 문수암은 결제철인 데도 선방은 열리지 않았고 정진대중도 없었다. 마침 법당 안에서 비구니 스님 한 분을 만났는데 문수보살 정근기도를 3년 넘게 하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천일기도를 한 번 끝내고 다시 한 번 천일기도에 들어갔다고 한다. 장한 신심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수암으로 가는 길 반대편 길 끝에 약사전(藥師殿)이 있다. 대형 약사여래불이 가부좌를 틀고 좌대 위에 앉은 모습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약사전 3층 법당에는 얼마 전 입적한 정천 대종사의 진영과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문수암은 많은 대중이 기도하거나 정진할 만큼 넓고 크지 않은 도량이다. 약사전의 건립은 문수암의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넓고 크게 지은 것 같다.
필자 일행이 문수암을 찾아간 지난 11월22일 암자 주변은 마냥 조용했다. 날씨도 밝지 않아 멀리 바다가 부옇게 보였다. 청담스님 사리탑에서 바라 본 바다의 오른편 끝 쪽에 약사여래의 거대한 모습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약사전에도 참배객은 이날따라 드문드문 했다.
성철스님이 문수암에 머무르던 때에는 약사전도 없었다. 그때 스님은 6ㆍ25전쟁을 피해 책을 이곳에 봉안하고 조용히 한 해를 보낸 것임을 알게 한다. 전쟁은 수행자가 정진하는 도량을 포화와 총검으로 불태우고 짓밟았다. 수도자들은 보금자리를 잃고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전쟁터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 전란의 와중에도 수행정신을 버리지 않고 스님들은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각자 나름대로의 수행처를 찾아 정진일념을 이어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청량산 문수암은 전란을 피하여 조용히 수행하기엔 정말 알맞은 처소였다.
사진 김형주 기자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자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를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여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실상무구상청정(實相無垢常淸淨)
귀천노유사여불(貴賤老幼事如佛)
극중죄인극존경(極重罪人極尊敬)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모든 일체 만법의 참모습은 때(垢)가 없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 무정 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 성불입니다. 옷은 아무리 떨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모두 다 같이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지침, 근본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은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는 여기에 있느니만큼 우리 서로서로 노력합시다. - 1982년 5월 방장 대중법어
[불교신문 2774호/ 12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