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길상선원(吉祥禪院) 전경. 김형주 기자
성철스님은 1947년 동안거부터 1949년 하안거를 봉암사에서 보내고 그해 동안거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묘관음사(妙觀音寺)에서 했다. ‘봉암사 결사’를 3년도 채우지 못하고 거처를 옮긴 것이다. 그 연유를 알아본다.

“당시 봉암사 인근에는 지방 빨지산이 자주 출몰했다. 그들은 봉암사에도 간혹 들이닥쳐 식량을 약탈하였다. 이렇게 지방 빨지산이 등장하자 그에 비례하여 경찰들도 진압차원에서 출동하였다. 이렇게 봉암사 인근의 정치적 사정이 급변하자 수행결사를 지속할 수 없었다.

이에 결사 주도자들은 수행 장소를 이전하기로 하고 그 대상 사찰로 고성의 문수암으로 정했다. 그 후 성철스님은 봉암사에 있던 책을 도반인 향곡스님의 토굴인 부산 묘관음사로 옮겨놓았다. 이렇게 이전 준비를 한 연후에 성철스님은 대중들에게 통보하였다.(문경문화연구총서 7집 <희양산 봉암사> 71쪽에 실린 김광식의 글 ‘봉암결사의 역사적 의미’에서 발췌)

   
임제종가(臨濟宗家) 묘관음사(妙觀音寺)와 ‘여하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如何是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 새겨진 절 입구의 큰바위. 김형주 기자
당시 상황을 성철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절대 비밀로 하여 (경남)고성 문수암(文殊庵)을 딱 얻어 놓았습니다. 대중은 모르게 그래놓고 가을이 되고 보니 뭣인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거기 있으면 안되겠다 말입니다. 딴사람은 있어도 괜찮지만 나는 거기 있으면 안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추석 지나고 난 뒤에 대중공사를 했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여기서 떠나야 하니까 그리 알고, 오늘부터는 순호스님(청담스님), 순호스님이 입승을 보았거든, 입승스님 한테 전부 맡기니 입승스님 시키는 대로 하시오’ 이렇게 하고 봉암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월내(月內, 묘관음사가 있는 곳)에 와서 겨울은 거기 있었습니다.”

이상의 회고로 보아 스님은 6.25한국전쟁이 나기 전 해인 1949년 가을 묘관음사로 거처를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묘관음사는 흔희들 ‘월내(月內) 묘관음사’로 부른다. 위치가 부산 기장군 월내에 있으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주소지 표기와 다르다.

봉암사인근 빨지산 출몰로 평생도반 향곡스님 주석처

묘관음사로 장서 옮기고 동안거 나며 ‘법열’ 나눠

묘관음사는 바다와 산을 끼고 있는,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절이다. 부산 해운대를 거쳐 동해남부선 철길이 이어진 송정을 지나 임랑에 이르면 산속에 묘관음사가 있다. 동해남부의 맑고 푸른 바다가 펼쳐진 곳, 해운대 송정 임랑은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모래가 고운 이름난 해수욕장이다.

임랑 해수욕장에서 시골길을 가로지르면 동해남부선 철길이 이어지고 철길을 건너면 묘관음사로 들어가는 솔숲길이 나선다. 법림산(法林山) 묘관음사라 했다. 절이 자리한 산 이름도 법(法)의 수풀(林)이란다.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智者樂水)고 했다.(논어)

수행자는 지혜와 자비(仁)를 닦는다.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법림산 묘관음사에서 수행하는 수선납자들이야말로 자신의 수행처가 지혜와 자비를 닦기에 이보다 더함이 없음을 익히 알 것이라 여겨진다.

이곳서 ‘지견’ 열렸던 비구니계 거목 인홍스님

성철스님 법문에 ‘은산철벽’ 다시 대용맹 대신심 일으켜

묘관음사는 운봉(雲峰, 1899~1943)스님이 토굴은 짓고 수행하던 곳인데 그 제자 향곡스님이 머물면서 1960년부터 대작불사를 일구어 오늘에 이른다.

절 입구에는 어른 키보다 더 큰 바위를 우뚝 세워놓았다. 묘관음사라는 글과 ‘임제종가(臨濟宗家), 여하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如何是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어떤 것이 부모님 몸을 받아 태어나기 전의 너냐)’이라 새겼다. 선풍(禪風)을 드날리는 임제스님의 법을 이어 내려온 종가답게 인간존재의 근본을 찾으라는 선구(禪句)가 이 절이 눈 푸른 납자를 길러내는 도량임을 절 입구에서부터 일깨우고 있다.

   
 
솔숲 길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가면 묘관음사 현판이 걸린 문이 보인다. 당대의 명필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 1908~1991) 선생의 글씨다. 이 문이 바로 일주문 격이다.

맞은편이 대웅전이요 대웅전 오른쪽에 길상선원(吉祥禪院), 왼쪽에 후원격인 산호당(珊瑚堂)이 있다. 이렇듯 입 ‘구(口)’자 형으로 도량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앞뜰의 고요하고 적정함은 절 주변의 대숲(竹林)과 어울려 마냥 화평한 기운이 흐른다.

향곡스님은 이 절을 가꾸면서 나무들을 많이 심었다고 한다. 야자수 동백 단풍 모과 편백 대나무 등. 이 모두가 이제는 60~70년이 지나 키가 크고 우거지고 야물어져 세월의 자취를 느끼게 해준다. 필자 일행이 찾았을 때인 지난 11월 4일 노랗게 익은 모과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가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법당 옆을 돌아 산 쪽으로 약간 올라가면 금모대(金毛臺)와 염화실이 있다. 금모대는 향곡스님의 법제자 진제스님(동화사 조실)이 수행, 득도(得道)한 곳이라 한다.

성철스님은 평생도반인 향곡스님 절에 당신의 장서를 옮기고 동안거 한 철을 보내면서 향곡스님과 서로 법담을 주고받으며 도반끼리 만이 지닐 수 있는 법열을 느끼는 나날을 보냈다.

   
인홍스님
이즈음 스님은 평생에 한 획을 긋는 인연을 맺게 된다. 비구니 인홍(仁弘)스님을 만난 것이다. 인홍스님(1908~1997)은 한국 근현대불교사에서 두드러진 분이다. 전국비구니회 총재.대한불교비구니 우담바라회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경남 언양 석남사를 오늘의 대가람으로 일군 분이다.

“인홍스님은 1941년 34세 때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으로 출가,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得度)후 1942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43년 일운(一雲)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1945년 38세 때 서울 선학원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아 지녔다.

이후 만공스님, 한암스님 회상에서 수행 정진했다. 1949년 42세 때 월내 묘관음사에서 지견(知見)이 열렸으나 성철스님의 법문을 듣고 은산철벽(銀山鐵壁)이 앞을 가로막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 때 다시 대용맹 대신심을 일으키니 평생토록 불퇴전의 정진으로 일관하였다.” (인홍스님 일대기 <길찾아 길 떠나다> 박원자 지음.김영사 刊 365쪽, 석정(石鼎)스님이 쓴 ‘조계종 대장로니(大長老尼) 인홍선사 부도 조성 연기문’에서 발췌)

인홍스님은 이후 성철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 성철스님의 법과 가르침에 따라 살았다.

 

   
1974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철스님과 향곡스님. 사진제공=성철선사상연구원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향곡선형의 법어에 씀

 

푸른 바다의 신기한 구슬이요

형산 땅의 보배 옥돌이라

하늘과 땅 비추어 환희 밝히고

해와 달을 삼키고 토하는 도다.

목인(木人)은 노래하고 석녀(石女)는 춤을 추니

소나무는 곧고 가시덩굴 굽으며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도다

알겠는가?

번쩍이는 칼 빛으로 빠른 천둥 쫓아내니

수미산 정상에는 피 물결이 넘쳐흐르도다.

 

題 香谷禪兄 法語

 

碧海神珠요

荊山寶玉이라

照耀乾坤하고

呑吐日月이로다

木人放歌하고

石女起舞하니

松直曲이요

鵠白烏黑이로다

會아

閃劍光이 走雷霆하니

血流滔滔須彌頂이로다

辛酉(1981) 四月

道友 性徹 和南

* 이 법문은 향곡스님 열반이후 펴낸 <향곡선사법어집>에 실린 글이다.


[불교신문 2770호/ 11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