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불교사의 신화 봉암사 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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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쓰는 근현대 불교사] 41.
현대 불교사의 신화 봉암사 결사
한국 불교의 수행 가풍 회복 위한 자정 혁신 운동
기사등록일 [2008년 02월 04일 월요일]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통일 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불교계 사정 또한 비슷하였지만 그 양상은 조금 달랐다. 해방 직후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생겨난 대처승과 비구승의 갈등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비구승 중심의 승단 건립이 중요한 과제였지만 당시 비구승의 비율은 전체 승려 가운데 5%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전국의 주요 사찰은 모두 대처승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면한 최대 과제는 일본 불교의 유습을 청산하고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일본 불교의 유습을 청산하려는 노력은 불교계 내부에서 전개된 경우와 정치권의 후원을 받아서 진행된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전자의 흐름으로는 봉암사결사와 고불총림의 결성을 들 수 있고, 후자는 ‘정화불사’를 들 수 있다. 결국 자생적인 노력은 성공적인 결실을 맺지 못한 미완으로 끝을 맺었고, ‘정화불사’는 반성해야 할 많은 과제를 남기고 결말이 났다.
그 가운데 현대 불교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결사운동이 바로 봉암사결사이다. 봉암사결사는 ‘정화불사’가 시작되기 이전에 실천적인 수행과 계율 준수라는 면에 있어서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려는 결사운동이었기 때문에 더욱 뜻 깊다. 봉암사결사는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무엇을 남겼으며, 그것은 현대불교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봉암사결사는 1947년 가을부터 1950년 봄까지 진행되었다. 결사란 뜻을 같이 하는 승려들이 세속화된 계율과 의식을 청산하고 수행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려는 자정의 혁신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결사는 일본 불교의 풍속인 ‘대처식육’을 청산하고 불교의 근본정신과 의식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었다. 핵심 인물은 이청담·이성철로 이들은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기치를 내걸고 결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식민지 시기 일본 불교의 풍속을 수용하여 퇴색한 우리 불교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봉암사결사는 경전이나 교리의 자구 해석에 대한 반론이 아닌 수행을 강조하고 실천하였다.
그러면 왜 그 많은 사찰 가운데 봉암사에서 이런 결사가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1942년 청담과 성철은 서울에서 만나 불교의 근본정신을 되살리는 공동수행을 하기로 약속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봄 이 약속은 법주사의 말사인 복천암에서 지켜졌다. 하지만 청담이 독립운동가를 숨겨 주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구속되는 바람에 지속될 수가 없었다.
두 승려의 공동수행 약속은 1944년 문경 대승사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대승사의 주지였던 김낙순의 인척인 김법룡이라는 처사는 많은 불경과 장경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믿고 맡길 만한 승려를 찾고 있었다. 낙순은 청담과 성철을 추천하였고, 김 처사는 이 책들을 두 승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두 승려는 이 불서가 결사에 꼭 필요하다고 보고, 장경은 해인사로 보내기로 하였지만 불서들을 옮길 곳을 물색하다가 청담이 가까운 곳에 있는 봉암사가 수행 공간으로 적당하니 그곳으로 옮기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이 받아 들여져 결사 도량은 봉암사로 정하여졌다.
어떤 승려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였을까? 봉암사 결사의 발의는 청담과 성철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처음 결사에 동참한 승려는 이성철·김자운·이우봉·신보문 등이었다. 이 당시 청담은 1945년 9월 승려대회의 결의로 이루어진 해인총림 설립에 관여하느라고 처음부터 함께 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향곡·월산·종수·도우·보경·혜암·법전·성수·의현·지관 등 20여명이 참여하였고, 1949년 5월 12일자로 결사에 참가한 승려는 인근 백련암에서 별도로 수행하던 묘엄·묘련·묘각·수진·청련화 등 비구니를 포함해서 27명이다. 이 가운데서 4명의 종정과 7명의 총무원장이 배출되었고, 그 이념이 현재까지 존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 불교의 뿌리가 봉암사결사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봉암사결사의 목적은 함께 수행하면서 지켜야 할 약속인 공주규약 18조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번역하고,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불조의 가르침을 힘써 수행하여 깨달음을 성취한다. △ 물긷기·나무하기·농사짓기·탁발 등 어떠한 고역도 감수한다. △ 신도들의 불공은 불전에 직접 지성으로 드리게 한다. △ 잠을 자거나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검붉은 색의 오조 가사를 입는다. △ 매일 두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다. △ 초하루와 보름마다 대중들에게 참회하는 보살 대계를 읽고 외운다. △ 공양은 정오가 넘으면 할 수 없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 정해진 시간 이외에 잠을 잘 수 없다. △ 필요한 모든 물건을 스스로 해결한다. △ 이러한 규약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함께 살 수 없다.
이러한 약속을 하고 시작한 봉암사결사에서 맨 처음 한 일은 법당 정리였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과 그 제자들을 제외하고 일체의 신앙 대상들을 제거하였다. 다시 말하면 칠성각·산신각 등을 철거하고 칠성탱화·산신탱화·신장탱화 등을 불살라 버렸다. 이어서 불공의 형식을 바꾸었다. 예전에는 신도들이 공양물을 가지고 절에 와서 불공을 의뢰하면 승려들은 불경을 읽는 것 외에도 범패나 바라춤을 추기도 하였다. 공양물을 매개로 승려와 신도들의 관계가 설정될 때 신도들은 승려 위에 군림할 수 있다. 그것은 위계가 바뀐 것이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봉암사에서 신도들은 자기가 가져온 공양물을 불전에 올리고 정성껏 기도해야 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종래 승려를 매개로 하던 신앙 행위보다 신도들을 믿음의 중심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승려들은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독송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까닭에 결사 초기에 봉암사를 찾는 신도들의 발걸음은 끊어졌다. 봉암사결사에 참여한 승려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탁발을 하면서 살아갔다.
봉암사가 수행 중심 도량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직접 기도하는 봉암사를 찾는 신도들의 수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추락해버린 승려들의 권위를 되찾은 것이었다. 성철은 신도들로 하여금 승려에게 3배를 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승려들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신도들의 스승이다. 스승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철은 이 당연한 예를 하기가 싫은 사람은 봉암사를 찾아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이상한 일은 이러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봉암사를 찾는 신도들은 늘어만 갔다. 신도들은 올곧은 수행자를 존경할 줄 알았다.
봉암사에 거주하는 승려들은 하루 두 시간 이상씩 노동을 해야만 하였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와야 하였고, 밥을 지어야 하였으며, 밭을 메는 등 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였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를 실천하는 이 규칙은 힘든 노동이었다. 더구나 정해진 시간 외에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모든 시주물은 모든 대중들 앞으로 들어올 때만 받았고, 승려 개인에게 주어질 때는 거절되었다. 아침에는 죽을 먹어야 하였고, 오후에는 허기를 떼우기 위해서 약석이라는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승려들 가운데서도 이 혹독한 규칙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봉암사를 떠나야 하였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면서 참선 수행을 하던 비구 선승들에게는 살아 보고 싶은 절이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봉암사를 찾아온 승려들은 견디기 힘든 규약에 대해서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1950년 봉암사결사는 시대적인 상황이 어려워짐에 따라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봉암사가 위치한 희양산이 험준하여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사를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성철은 1949년 가을 먼저 봉암사를 떠났고, 1950년 3월 무렵 봉암사 대중들은 경남 고성 옥천사의 말사인 문수암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결사를 계속할 형편은 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봉암사결사는 무엇을 남겼는가. 첫째, 승려들의 위상이 높아졌다. 조선시대에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신도들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할 정도로 추락하였던 승려들의 위상은 스승의 위치로 확고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둘째, 1954년부터 전개되는 ‘정화불사’의 이념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구호는 이후 정화불사의 중요한 좌표가 되었다. 셋째, 의례와 제도를 규범화하고 통일시켰다. 승려들의 가사·장삼 등의 형식을 마련하고 통일시켰으며, 불공의 형식을 개선하여 신도들을 신앙의 중심에 서게 하였다. 넷째, 엄격한 계율을 지키면서 수행하는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한국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다섯째, 봉암사결사는 승단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결사운동이었으므로 이후 결사의 주인공들은 승단의 구심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봉암사결사는 현대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하나의 신화가 되기에 충분하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936호 [2008-02-04]
현대 불교사의 신화 봉암사 결사
한국 불교의 수행 가풍 회복 위한 자정 혁신 운동
기사등록일 [2008년 02월 04일 월요일]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통일 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불교계 사정 또한 비슷하였지만 그 양상은 조금 달랐다. 해방 직후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생겨난 대처승과 비구승의 갈등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비구승 중심의 승단 건립이 중요한 과제였지만 당시 비구승의 비율은 전체 승려 가운데 5%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전국의 주요 사찰은 모두 대처승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면한 최대 과제는 일본 불교의 유습을 청산하고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일본 불교의 유습을 청산하려는 노력은 불교계 내부에서 전개된 경우와 정치권의 후원을 받아서 진행된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전자의 흐름으로는 봉암사결사와 고불총림의 결성을 들 수 있고, 후자는 ‘정화불사’를 들 수 있다. 결국 자생적인 노력은 성공적인 결실을 맺지 못한 미완으로 끝을 맺었고, ‘정화불사’는 반성해야 할 많은 과제를 남기고 결말이 났다.
그 가운데 현대 불교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결사운동이 바로 봉암사결사이다. 봉암사결사는 ‘정화불사’가 시작되기 이전에 실천적인 수행과 계율 준수라는 면에 있어서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려는 결사운동이었기 때문에 더욱 뜻 깊다. 봉암사결사는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무엇을 남겼으며, 그것은 현대불교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봉암사결사는 1947년 가을부터 1950년 봄까지 진행되었다. 결사란 뜻을 같이 하는 승려들이 세속화된 계율과 의식을 청산하고 수행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려는 자정의 혁신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결사는 일본 불교의 풍속인 ‘대처식육’을 청산하고 불교의 근본정신과 의식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었다. 핵심 인물은 이청담·이성철로 이들은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기치를 내걸고 결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식민지 시기 일본 불교의 풍속을 수용하여 퇴색한 우리 불교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봉암사결사는 경전이나 교리의 자구 해석에 대한 반론이 아닌 수행을 강조하고 실천하였다.
그러면 왜 그 많은 사찰 가운데 봉암사에서 이런 결사가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1942년 청담과 성철은 서울에서 만나 불교의 근본정신을 되살리는 공동수행을 하기로 약속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봄 이 약속은 법주사의 말사인 복천암에서 지켜졌다. 하지만 청담이 독립운동가를 숨겨 주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구속되는 바람에 지속될 수가 없었다.
두 승려의 공동수행 약속은 1944년 문경 대승사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대승사의 주지였던 김낙순의 인척인 김법룡이라는 처사는 많은 불경과 장경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믿고 맡길 만한 승려를 찾고 있었다. 낙순은 청담과 성철을 추천하였고, 김 처사는 이 책들을 두 승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두 승려는 이 불서가 결사에 꼭 필요하다고 보고, 장경은 해인사로 보내기로 하였지만 불서들을 옮길 곳을 물색하다가 청담이 가까운 곳에 있는 봉암사가 수행 공간으로 적당하니 그곳으로 옮기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이 받아 들여져 결사 도량은 봉암사로 정하여졌다.
어떤 승려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였을까? 봉암사 결사의 발의는 청담과 성철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처음 결사에 동참한 승려는 이성철·김자운·이우봉·신보문 등이었다. 이 당시 청담은 1945년 9월 승려대회의 결의로 이루어진 해인총림 설립에 관여하느라고 처음부터 함께 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향곡·월산·종수·도우·보경·혜암·법전·성수·의현·지관 등 20여명이 참여하였고, 1949년 5월 12일자로 결사에 참가한 승려는 인근 백련암에서 별도로 수행하던 묘엄·묘련·묘각·수진·청련화 등 비구니를 포함해서 27명이다. 이 가운데서 4명의 종정과 7명의 총무원장이 배출되었고, 그 이념이 현재까지 존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 불교의 뿌리가 봉암사결사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봉암사결사의 목적은 함께 수행하면서 지켜야 할 약속인 공주규약 18조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번역하고,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불조의 가르침을 힘써 수행하여 깨달음을 성취한다. △ 물긷기·나무하기·농사짓기·탁발 등 어떠한 고역도 감수한다. △ 신도들의 불공은 불전에 직접 지성으로 드리게 한다. △ 잠을 자거나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검붉은 색의 오조 가사를 입는다. △ 매일 두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다. △ 초하루와 보름마다 대중들에게 참회하는 보살 대계를 읽고 외운다. △ 공양은 정오가 넘으면 할 수 없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 정해진 시간 이외에 잠을 잘 수 없다. △ 필요한 모든 물건을 스스로 해결한다. △ 이러한 규약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함께 살 수 없다.
이러한 약속을 하고 시작한 봉암사결사에서 맨 처음 한 일은 법당 정리였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과 그 제자들을 제외하고 일체의 신앙 대상들을 제거하였다. 다시 말하면 칠성각·산신각 등을 철거하고 칠성탱화·산신탱화·신장탱화 등을 불살라 버렸다. 이어서 불공의 형식을 바꾸었다. 예전에는 신도들이 공양물을 가지고 절에 와서 불공을 의뢰하면 승려들은 불경을 읽는 것 외에도 범패나 바라춤을 추기도 하였다. 공양물을 매개로 승려와 신도들의 관계가 설정될 때 신도들은 승려 위에 군림할 수 있다. 그것은 위계가 바뀐 것이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봉암사에서 신도들은 자기가 가져온 공양물을 불전에 올리고 정성껏 기도해야 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종래 승려를 매개로 하던 신앙 행위보다 신도들을 믿음의 중심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승려들은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독송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까닭에 결사 초기에 봉암사를 찾는 신도들의 발걸음은 끊어졌다. 봉암사결사에 참여한 승려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탁발을 하면서 살아갔다.
봉암사가 수행 중심 도량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직접 기도하는 봉암사를 찾는 신도들의 수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추락해버린 승려들의 권위를 되찾은 것이었다. 성철은 신도들로 하여금 승려에게 3배를 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승려들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신도들의 스승이다. 스승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철은 이 당연한 예를 하기가 싫은 사람은 봉암사를 찾아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이상한 일은 이러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봉암사를 찾는 신도들은 늘어만 갔다. 신도들은 올곧은 수행자를 존경할 줄 알았다.
봉암사에 거주하는 승려들은 하루 두 시간 이상씩 노동을 해야만 하였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와야 하였고, 밥을 지어야 하였으며, 밭을 메는 등 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였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를 실천하는 이 규칙은 힘든 노동이었다. 더구나 정해진 시간 외에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모든 시주물은 모든 대중들 앞으로 들어올 때만 받았고, 승려 개인에게 주어질 때는 거절되었다. 아침에는 죽을 먹어야 하였고, 오후에는 허기를 떼우기 위해서 약석이라는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승려들 가운데서도 이 혹독한 규칙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봉암사를 떠나야 하였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면서 참선 수행을 하던 비구 선승들에게는 살아 보고 싶은 절이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봉암사를 찾아온 승려들은 견디기 힘든 규약에 대해서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1950년 봉암사결사는 시대적인 상황이 어려워짐에 따라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봉암사가 위치한 희양산이 험준하여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사를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성철은 1949년 가을 먼저 봉암사를 떠났고, 1950년 3월 무렵 봉암사 대중들은 경남 고성 옥천사의 말사인 문수암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결사를 계속할 형편은 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봉암사결사는 무엇을 남겼는가. 첫째, 승려들의 위상이 높아졌다. 조선시대에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신도들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할 정도로 추락하였던 승려들의 위상은 스승의 위치로 확고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둘째, 1954년부터 전개되는 ‘정화불사’의 이념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구호는 이후 정화불사의 중요한 좌표가 되었다. 셋째, 의례와 제도를 규범화하고 통일시켰다. 승려들의 가사·장삼 등의 형식을 마련하고 통일시켰으며, 불공의 형식을 개선하여 신도들을 신앙의 중심에 서게 하였다. 넷째, 엄격한 계율을 지키면서 수행하는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한국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다섯째, 봉암사결사는 승단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결사운동이었으므로 이후 결사의 주인공들은 승단의 구심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봉암사결사는 현대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하나의 신화가 되기에 충분하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936호 [2008-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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