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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봉암사 결사 60주년’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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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6-04 16:40 조회15,7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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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봉암사 결사 60주년’ 세미나
‘부처님 법대로 살자’…정법의 불씨 되살려

2007년 10월, 왜색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청정한 수행가풍을 되살리겠다는 목표아래 시작됐던 봉암사 결사가 60주년을 맞았다. 본지는 불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오는 18일 오전10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봉암사 결사의 재조명과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기념학술세미나를 열고, 봉암사 결사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세미나에 앞서 미리 발표된 발표문을 축약해 소개한다. 정리=어현경 기자

기획과 준비단계 주도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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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암사 결사와 청담스님 : 혜정스님 / 서울 문수사

필자는 봉암사 결사가 한창이던 1949년 봄 봉암사에서 청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 때 스님은 극락전에서 주로 수행하고 있었다. 봉암사 결사에 성철스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청담스님도 봉암사 결사의 준비, 기획 단계부터 참여한 것이 분명하다.

전하는 자료에 따르면, 결사 이전부터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은 수좌들의 공동수행의 필요성을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두 스님은 1942년에 선학원에서 만나 공동 수행에 대한 약속을 했으며, 1944년 봄 무렵 대승사에서 총림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안 강구에 주력했다.

그리고 1947년 여름 서울의 김범룡 거사가 갖고 있었던 불서 수천 권을 인수하는 문제로 함께 서울로 간 청담, 성철스님은 결사에 뜻을 모았다. 그해 가을 봉암사 결사가 시작됐으나 청담스님은 가야총림 소임 때문에 바로 동참하지 못했다. 해인사를 주 거주처로 수행하면서, 산철에 봉암사를 들르는 형식으로 참여했다가, 1949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봉암사로 옮겨 왔다. 그곳에서 스님은 묵언정진을 하면서 운영의 주도권을 성철스님에게 위임한 것이다.

때문에 1년 후에 결사에 참여했다고 해서, 결사의 주역이 아닐 수는 없다. 그리고 스님은 1949년 9월 성철스님이 부산 묘관음사로 떠난 이후, 결사 운영과 뒷처리 등을 총괄했다. 1950년 3월 봉암사 결사가 빨치산, 6.25로 인해 중도 하차했지만 스님은 이후에도 총림 건설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했다. 이런 고뇌, 사상이 있었기에 청담스님은 종정으로 재임하였던 1967년 해인사에 총림 설립을 제안했으며, 그 결과가 지금의 해인사의 총림이다.                                                               


식민지불교 극복의 현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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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암사 결사의 재조명 :  김광식 / 부천대 교수

봉암사 결사는 1947년 10월경에 시작돼 1950년 3월까지 약 2년 6개월 동안 행해진 결사다. 1947년 가을,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며 봉암사 결사에 동참한 스님들은 기존 제도를 과감하게 개혁했다. 탱화를 제거하고 기복적인 불공과 축원을 금지하고 공주규약을 제정해 실천했다. 특히 결사를 주도한 청담, 성철스님은 모든 것을 솔선수범했다. 참선 수행을 주로 하는 선방이었지만 결사 동참자들은 예불, 운력, 나무하기, 천도재, 청소 등 사소한 일에도 결사 규약에 의거해 준수했다. 이러한 시도의 당위성은 부처님 법과 율에서 그 연원을 찾았지만, 구체적으로는 중국 선종 총림의 재현이었다.

이는 일제 식민지 불교의 잔재를 극복하려는 수좌들의 투철한 현실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봉암사 생활에서 스님들은 청정한 수행성을 강조했다. 신도들에게 의존하는 행태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영위하고, 탁발을 통해 생존을 지키겠다는 열의를 보여줬다.

빨치산과 6.25로 비록 미완에 그쳤지만 결사의 정신과 대안은 1954년부터 본격화된 불교 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됐다. 또 결사에서 실행됐던 의식, 의례는 이후 조계종단에 계승됐으며, 결사에서 나타난 규약, 이념, 실천 등은 하나의 ‘신화’로 자리 잡게 됐다.

최근 봉암사는 조계종단의 기초선원의 수행도량으로도 이용되며, 결제와 산철이 따로 없이 1년내내 수행 정진하는 도량으로 그 명성을 이어 가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 학술적인 접근은 그 명성에 비하여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이후 불교학, 사회학, 종교학 등의 분야에서도 봉암사 결사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교단문제 극복 위한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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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사개념의 재검토와 근.현대의 결사들 : 김호성 / 동국대 교수

결사의 개념을 정리해보면, 불교교단의 문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서 직접 그 상황 속에 참여하여 개혁하고자 하는 대신, 그 상황으로부터 피은(避隱)하여 먼저 스스로 수행함으로써 장차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을 말한다.

그것은 권력이나 정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므로, 종단의 제도나 조직을 활용하지 않는 순수 민간, 재야(在野) 차원이어야 한다. 탈권력 내지 탈정치를 지향하므로 반드시 2인 이상의 모임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봉암사 결사와 비교할 수 있는 근.현대의 결사로는 경허스님의 정혜결사, 한암스님의 건봉사 결사, 용성스님의 참선만일 결사, 그리고 탄허스님의 수도원 운동 등으로 한정할 수 있다. 이들은 그 이념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선(禪)을 중심 이념으로, 둘째는 선과 율을 중심으로, 셋째는 화엄을 중심이념으로 삼는 것이다. 정혜결사와 건봉사 결사가 선을 중심으로 하며, 참선만일결사와 봉암사 결사는 선과 율을, 수도원 운동은 화엄을 중심으로 하는 결사로 볼 수 있다.

특히 봉암사와 참선만일결사는 그 근본에 있어서 공히 선율병운(禪律竝運)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용성스님이 ‘선〉율’의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성철스님은 ‘선〈율’의 입장이었다.

봉암사 결사를 그 청규였던 공주규약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계.정.혜 삼학을 모두 갖추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실상 계학에 관한 조장이 가장 많다. 또 공주규약 전체가 모두 율장이나 선종 청규와 유관하다.

세속화 지양…수행 공동체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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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암사 결사의 의례적 특징과 의의 : 송현주 / 순천향대 교수

봉암사결사는 소수의 스님들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종교운동(religious move-ment)의 성격을 지닌다. 순수하게 불교내적 갱신을 지향하는 이 운동의 결과는 가히 성공적이었다. 특히 봉암사결사는 현대의 한국불교의 틀을 잡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렇듯 봉암사 결사는 승가의 생활양식 및 의례의 정비에서 독특한 성격과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결사기간 동안 행해진 의례 및 의식, 생활양식의 변화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대략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와 특징, 의의는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사실 봉암사 결사를 단지 불교적 의미로만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필자는 종교학과 종교인류학에서의 의례이론, 특히 미르세아 엘리아데(M. Eliade)와 빅터 터너(Victor W. Turner)의 이론을 통해 봉암사 결사를 조명해 보았다. 그 결과 봉암사 결사의 ‘공주규약’은 이 조직하고 결사가 따라야 할 행위의 모델이자 부처님 법 시대를 상징하는 신화(Myth)의 대체물이었으며, 제반 의례 및 행위양식은 이 신화를 실현함과 동시에 부처님 당시의 법과 공동체의 세계로 인도하는 일련의 의례과정(ritual process)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신화적 기제와 의례를 통해 봉암사결사는 불교의 세속화에 저항하고, 수행공동체의 성화(聖化)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종교의례의 차원에서 봉암사 결사의 의미를 조명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봉암사 결사의 위상과 의미를 밝힐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전개된 한국종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사 조직…대중 통솔한 중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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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암사 결사에서 성철스님의 역할 : 서재영 / 조계종교육원 불학연구소 박사

봉암사 결사를 조직하고, ‘부처님 법대로’라는 사상적 원칙아래 대중들을 통솔했던 중심인물은 바로 성철스님이다. 당시의 승단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처식육을 일삼았고 대중들의 신앙은 기복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선방에서도 갖가지 사견(私見)이 범람하면서 수행가풍이 쇠락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철스님은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라는 것을 봉암사 결사의 목표로 내세웠다.

불교발전을 위해서는 부처님 당시의 생활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운 스님은 18개 조항으로 정리된 공주규약을 제정하고, 계율엄수, 사견(私見) 배제, 노동의 의무, 자급자족의 생활 등을 실천했다. 의례와 출가자의 종교역할도 새로 정립해 천도재나 49재 같은 의식을 폐지하고, 탈속적인 수행자상 확립에 주력했다. 비단 가사와 장삼을 벗어 버리고 괴색 가사를 수하고, 목발우를 불태우고 와발(瓦鉢)로 공양하며, 삿갓을 쓰고 육환장을 짚는 전통적 생활방식을 고집했다. 의례에 있어서도 포살을 되살렸고 보살계도 실시했다. 간화선 수행가풍을 재건하는데 진력해, 납자들의 화두를 점검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성철스님은 ‘부처님 법대로’라는 사상적 원칙을 통해 꺼져가던 정법의 불씨를 되살렸다. 또 갖가지 의례를 집전하며 제사장의 역할에 매몰된 승가의 역할을 혁파하고 본분납자라는 대장부의 삶을 되찾아 주었다. 스님은 ‘남의 밥 먹고 내일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는 만사불성’이라고 했다.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회고하면서 우리들은 선농일치의 전통회복과 선정지상주의를 극복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불교신문 2367호/ 10월13일자]
2007-10-10 오후 3:16:23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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