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 수행 가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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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 기획
② 봉암사 수행 가풍
‘共住규약’ 치열한 수행…한국불교 새바람
1947년 가을 시작된 봉암사 결사의 주역들은 성철.청담스님을 비롯해 우봉.보문.향곡.자운.월산.보경.혜암.법전.성수.정천.도우스님 등이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목표로 대중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제정하고 치열하게 수행해나갔다. 자급자족하고, 가사와 장삼을 율에 맞게 정비한 뒤 포살법회와 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하는 등 봉암사의 생활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1947년 가을에 나는 큰 환상을 안고 문경 봉암사로 갔었다. 우봉스님은 사찰운영의 전 책임을 지고, 보문스님은 10년간 장경수호에 진력하겠다는 철석같은 약속이었다. 자운스님과 법웅수좌도 함께 왔었다. 주지로는 보안노장을 모시고, 십여대중이 동거하였다. 그러나 칠성각의 철폐, 일반 불공 및 기재의 거부 등으로 막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돼 우봉스님의 노력으로 군에서 다대한 양곡 특배를 얻어서 임시 모면을 하였다. 자운스님은 율장연구에 여념이 없었고, 신춘이 돼 월산스님 기타 몇 스님들이 더 입주하였다. 나는 하기의 공주규약 초안을 대중에게 제시하고 상세한 설명을 했다. 고불고조의 유칙을 완전하게 실행한다 함은 너무나 외람된 말이기는 하지만, 교단의 현황은 불조 교법이 전연 민멸됐으니 다소간이나마 복구시켜보자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그리고 교법 복구의 원칙하에 나의 수시 제안이 있을 것인 바, 그 제안에 오점이 발견되지 않는 한 대중은 무조건 추종할 것을 재삼 다짐하고 실천에 옮기게 됐다. (성철스님이 1965년 8월22일 토요일 자 일력(日曆)에 적어놓은 메모 )”
불공-천도재 거부하고 “수행에만 매진”선언
탁발-나무하기 힘든 일 마다않고 자급자족
신도동참 활기띠다 6.25발발로 3년 만에 막내려
성철스님의 메모를 보면, 당시 봉암사 대중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봉암사에 모인 스님들은 먼저 일반 불공과 천도재를 거부하고 수행에만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앞서 ‘법당정리’를 위한 대중공사를 열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외에는 모두 정리할 것에 의견을 모았다. 칠성각, 산신각 등을 철폐하고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등도 치워버렸다.
법당을 정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곧 어려움이 찾아왔다.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진 것이다. 먹고 살게 없었지만 스님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 종정 혜암스님의 회고다. “모든 대중은 자급자족해서 살림을 하는 동시에 탁발을 해서 공부했다. 노소를 막론하고 하루에 나무 두 짐은 꼭 해야 했는데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부를 못들여 야단이었다.”
가사와 장삼, 발우도 새로 만들었다. 도포자락 같이 소매만 넓은 장삼 대신 보조국사가 입었던 장삼으로 맞추고, 빨간색 비단가사 대신 면가사로 하되 율장의 규정대로 3종 괴색으로 염색한 가사로 바꿨다. 육환장도 새로 만들고, 삿갓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쓰였던 목(木)발우 대신 〈사분율〉에 나온 쇠발우와 진흙발우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처럼 봉암사의 생활은 어느 사찰에서보다 엄격하고, 치열했다. 공양도 체계를 정해, 아침은 항상 죽으로 시작하고, 점심은 대중공양을 했다. 참선하는데 기운이 없으면 안되니까 저녁은 약석이라고 해서 발우를 펴지 않고 간단하게 먹었다. 신도들로부터 공양을 받을 때에도 개인 스님에게 들어온 것은 철저하게 거절하고, 대중공양만 받아 스님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줬다. 아침에는 능엄주와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했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포살법회도 진행했다.
보살계 수계법회가 처음 시작된 곳도 여기 봉암사였다. 대승사 시절부터 계율 연구에 매진했던 자운스님은 1948년 8월 봉암사에서 7일간 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한다. 수계법회 이후 새로운 의례가 생겨났다. 신도들이 스님에게 3배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일부 스님과 신도들은 봉암사 결사대중을 ‘외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여름에 육환장 짚고, 삿갓 쓰고 삼베 장삼 입고, 걸망지고 비를 줄줄 맞고 가면 모두 큰스님 오신다고 비아냥거렸다”는 묘엄스님의 회고가 이런 분위기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왜곡된 한국불교가 제 모습을 찾는 과정에서 겪는 작은 고난에 불과했다. 봉암사에서 스님들이 부처님 법답게 살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신도 수백여명이 수계법회에 동참하면서 봉암사의 위상은 점점 높아졌다. 일제시대 피폐해지고 왜곡된 한국불교를 근본으로 돌아 세우는데 핵심 축이었던 봉암사 결사는 그러나 좌.우익의 대립으로 풍랑을 만나게 된다. 사찰에 빨치산이 자주 나타나고, 이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온 우익 경찰과 군인들이 스님을 연행하는 등 수행이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해 결사는 3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당시 봉암사 스님들의 생활이나 공주규약을 살펴보면,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찰의례들이 여기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봉암사의 기풍은 새로웠고, 탁월했다. 결사에 동참한 스님들의 뼈를 깎는 자성과 노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성철.청담.향곡스님 등은 한국불교의 선가풍을 다시 세우는데 일조했고, 자운스님은 율장연구를 통해 흐트러진 계율을 바로 잡는데 큰 족적을 남겼다. 스님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현대불교사에서 봉암사 결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왜색화된 한국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처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 청정승가의 가풍을 되살리자는 결사의 목소리는 오늘날 조계종단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공주규약(供住規約)
해인사 백련암에 보관돼 있는 공주규약의 원문으로 부천대 김광식 교수의 논문 ‘봉암사 결사의 전개와 성격’을 토대로 정리했다.
△ 삼엄한 불계(佛戒)와 숭고한 조훈(祖訓) 근수역행(勤修力行)하여 구경대계의 원만 속성을 기함
△ 여하(如何)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불조교칙(佛祖敎則) 이외의 각자사견은 절대 배제함
△ 일상 수공(需供)은 자주자치의 표치(標幟)하에 운수(運水) 반시(搬柴) 종전(種田) 파침(把針) 탁발 등 여하한 고역(苦役)도 불사(不辭)함
△ 작인(作人)의 세조(稅租)와 단도(檀徒)의 특탁(特託)에 의한 생계는 차(此)를 단연 청산함
△ 단도(檀徒)의 불전(佛前) 헌공(獻供)은 재래(齎來)기 현품과 지성(至誠)의 배례(拜禮)에 지(止)함
△ 대소이변(大小二便) 보청(普請) 급(及) 취침시를 제외하고는 항상 오조(五條) 직철(直綴)을 착용함
△ 출원(出院) 유방(遊方)의 제(際)는 대립(戴笠) 진석(振錫)하고 필히 단체(團體)를 요함
△ 가사는 마면(麻綿)에 한하고 차(此)를 괴색(壞色)함
△ 발우는 와발(瓦鉢) 이외의 사용을 금함
△ 일일차(日一次) 능엄대주를 과송(課誦)함
△ 매일 두시간 이상 노동에 취함
△ 백월(白月) 흑월(黑月) 포살대계를 청함
△ 불전헌공은 과오(過午)를 부득(不得)하며 조식은 죽(粥)으로 정함
△ 좌차(座次)는 계납(戒臘)에 의함
△ 당내는 좌필면벽(座必面壁)하야 호상(互相) 잡담을 엄금함
△ 정각 이외는 침와(寢臥)를 불허함
△ 법반(法般) 물자(物資) 소당(所當)은 각자 변비(辯備)함
△ 여외(餘外) 각칙(各則)은 청규 급(及) 대소율제(大小律制)에 의함
우기(右記) 조장(條章)의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거부하는 자는 연단공주(連單共住)를 부득(不得)함 지사(知事) 백(白)
#문경 봉암사는
봉암사는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로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도헌(824∼882) 선사가 창건한 희양산문의 본찰이다. 보물 제137호인 지증대사 적조탑(寂照塔)과 보물 제138호인 지증대사 적조탑비, 보물 제169호 삼층석탑, 보물 제171호 정진대사 원오탑, 보물 제172호인 정진대사 원오탑비 등이 남아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조계종단에서 봉암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禪門九山중 하나인 희양산문 본찰
한국불교 선맥 잇는 ‘대표 수행처’
봉암사 결사 이후 이곳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는 수행처를 대표하게 된다. 봉암사는 1947년 당시 결사대중 가운데 한 명이었던 향곡스님이 조실로 주석한 1972년부터 수행도량의 면모를 되찾게 된다. 특히 1980년 서암스님이 조실로 주석하면서 사격은 더욱 일신됐다. 그리고 1982년 6월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됐으며, 이어 1984년 6월 봉암사 태고선원은 종립선원이 됐다.
많은 출.재가자들에게 봉암사가 선망의 대상인 까닭은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봉암사는 그간 수좌들의 수행환경을 지키기 위해 25년간 산문을 폐쇄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해왔다. 1년에 한번 봉암사에 들어갈 수 있는 부처님오신날이면, 많은 불자들이 이곳을 참배하고 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304호/ 2월21일자]
2007-02-16 오전 10:30:36 / 송고
② 봉암사 수행 가풍
‘共住규약’ 치열한 수행…한국불교 새바람
1947년 가을 시작된 봉암사 결사의 주역들은 성철.청담스님을 비롯해 우봉.보문.향곡.자운.월산.보경.혜암.법전.성수.정천.도우스님 등이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목표로 대중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제정하고 치열하게 수행해나갔다. 자급자족하고, 가사와 장삼을 율에 맞게 정비한 뒤 포살법회와 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하는 등 봉암사의 생활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1947년 가을에 나는 큰 환상을 안고 문경 봉암사로 갔었다. 우봉스님은 사찰운영의 전 책임을 지고, 보문스님은 10년간 장경수호에 진력하겠다는 철석같은 약속이었다. 자운스님과 법웅수좌도 함께 왔었다. 주지로는 보안노장을 모시고, 십여대중이 동거하였다. 그러나 칠성각의 철폐, 일반 불공 및 기재의 거부 등으로 막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돼 우봉스님의 노력으로 군에서 다대한 양곡 특배를 얻어서 임시 모면을 하였다. 자운스님은 율장연구에 여념이 없었고, 신춘이 돼 월산스님 기타 몇 스님들이 더 입주하였다. 나는 하기의 공주규약 초안을 대중에게 제시하고 상세한 설명을 했다. 고불고조의 유칙을 완전하게 실행한다 함은 너무나 외람된 말이기는 하지만, 교단의 현황은 불조 교법이 전연 민멸됐으니 다소간이나마 복구시켜보자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그리고 교법 복구의 원칙하에 나의 수시 제안이 있을 것인 바, 그 제안에 오점이 발견되지 않는 한 대중은 무조건 추종할 것을 재삼 다짐하고 실천에 옮기게 됐다. (성철스님이 1965년 8월22일 토요일 자 일력(日曆)에 적어놓은 메모 )”
불공-천도재 거부하고 “수행에만 매진”선언
탁발-나무하기 힘든 일 마다않고 자급자족
신도동참 활기띠다 6.25발발로 3년 만에 막내려
성철스님의 메모를 보면, 당시 봉암사 대중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봉암사에 모인 스님들은 먼저 일반 불공과 천도재를 거부하고 수행에만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앞서 ‘법당정리’를 위한 대중공사를 열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외에는 모두 정리할 것에 의견을 모았다. 칠성각, 산신각 등을 철폐하고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등도 치워버렸다.
법당을 정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곧 어려움이 찾아왔다.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진 것이다. 먹고 살게 없었지만 스님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 종정 혜암스님의 회고다. “모든 대중은 자급자족해서 살림을 하는 동시에 탁발을 해서 공부했다. 노소를 막론하고 하루에 나무 두 짐은 꼭 해야 했는데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부를 못들여 야단이었다.”
가사와 장삼, 발우도 새로 만들었다. 도포자락 같이 소매만 넓은 장삼 대신 보조국사가 입었던 장삼으로 맞추고, 빨간색 비단가사 대신 면가사로 하되 율장의 규정대로 3종 괴색으로 염색한 가사로 바꿨다. 육환장도 새로 만들고, 삿갓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쓰였던 목(木)발우 대신 〈사분율〉에 나온 쇠발우와 진흙발우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처럼 봉암사의 생활은 어느 사찰에서보다 엄격하고, 치열했다. 공양도 체계를 정해, 아침은 항상 죽으로 시작하고, 점심은 대중공양을 했다. 참선하는데 기운이 없으면 안되니까 저녁은 약석이라고 해서 발우를 펴지 않고 간단하게 먹었다. 신도들로부터 공양을 받을 때에도 개인 스님에게 들어온 것은 철저하게 거절하고, 대중공양만 받아 스님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줬다. 아침에는 능엄주와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했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포살법회도 진행했다.
보살계 수계법회가 처음 시작된 곳도 여기 봉암사였다. 대승사 시절부터 계율 연구에 매진했던 자운스님은 1948년 8월 봉암사에서 7일간 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한다. 수계법회 이후 새로운 의례가 생겨났다. 신도들이 스님에게 3배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일부 스님과 신도들은 봉암사 결사대중을 ‘외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여름에 육환장 짚고, 삿갓 쓰고 삼베 장삼 입고, 걸망지고 비를 줄줄 맞고 가면 모두 큰스님 오신다고 비아냥거렸다”는 묘엄스님의 회고가 이런 분위기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왜곡된 한국불교가 제 모습을 찾는 과정에서 겪는 작은 고난에 불과했다. 봉암사에서 스님들이 부처님 법답게 살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신도 수백여명이 수계법회에 동참하면서 봉암사의 위상은 점점 높아졌다. 일제시대 피폐해지고 왜곡된 한국불교를 근본으로 돌아 세우는데 핵심 축이었던 봉암사 결사는 그러나 좌.우익의 대립으로 풍랑을 만나게 된다. 사찰에 빨치산이 자주 나타나고, 이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온 우익 경찰과 군인들이 스님을 연행하는 등 수행이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해 결사는 3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당시 봉암사 스님들의 생활이나 공주규약을 살펴보면,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찰의례들이 여기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봉암사의 기풍은 새로웠고, 탁월했다. 결사에 동참한 스님들의 뼈를 깎는 자성과 노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성철.청담.향곡스님 등은 한국불교의 선가풍을 다시 세우는데 일조했고, 자운스님은 율장연구를 통해 흐트러진 계율을 바로 잡는데 큰 족적을 남겼다. 스님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현대불교사에서 봉암사 결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왜색화된 한국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처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 청정승가의 가풍을 되살리자는 결사의 목소리는 오늘날 조계종단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공주규약(供住規約)
해인사 백련암에 보관돼 있는 공주규약의 원문으로 부천대 김광식 교수의 논문 ‘봉암사 결사의 전개와 성격’을 토대로 정리했다.
△ 삼엄한 불계(佛戒)와 숭고한 조훈(祖訓) 근수역행(勤修力行)하여 구경대계의 원만 속성을 기함
△ 여하(如何)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불조교칙(佛祖敎則) 이외의 각자사견은 절대 배제함
△ 일상 수공(需供)은 자주자치의 표치(標幟)하에 운수(運水) 반시(搬柴) 종전(種田) 파침(把針) 탁발 등 여하한 고역(苦役)도 불사(不辭)함
△ 작인(作人)의 세조(稅租)와 단도(檀徒)의 특탁(特託)에 의한 생계는 차(此)를 단연 청산함
△ 단도(檀徒)의 불전(佛前) 헌공(獻供)은 재래(齎來)기 현품과 지성(至誠)의 배례(拜禮)에 지(止)함
△ 대소이변(大小二便) 보청(普請) 급(及) 취침시를 제외하고는 항상 오조(五條) 직철(直綴)을 착용함
△ 출원(出院) 유방(遊方)의 제(際)는 대립(戴笠) 진석(振錫)하고 필히 단체(團體)를 요함
△ 가사는 마면(麻綿)에 한하고 차(此)를 괴색(壞色)함
△ 발우는 와발(瓦鉢) 이외의 사용을 금함
△ 일일차(日一次) 능엄대주를 과송(課誦)함
△ 매일 두시간 이상 노동에 취함
△ 백월(白月) 흑월(黑月) 포살대계를 청함
△ 불전헌공은 과오(過午)를 부득(不得)하며 조식은 죽(粥)으로 정함
△ 좌차(座次)는 계납(戒臘)에 의함
△ 당내는 좌필면벽(座必面壁)하야 호상(互相) 잡담을 엄금함
△ 정각 이외는 침와(寢臥)를 불허함
△ 법반(法般) 물자(物資) 소당(所當)은 각자 변비(辯備)함
△ 여외(餘外) 각칙(各則)은 청규 급(及) 대소율제(大小律制)에 의함
우기(右記) 조장(條章)의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거부하는 자는 연단공주(連單共住)를 부득(不得)함 지사(知事) 백(白)
#문경 봉암사는
봉암사는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로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도헌(824∼882) 선사가 창건한 희양산문의 본찰이다. 보물 제137호인 지증대사 적조탑(寂照塔)과 보물 제138호인 지증대사 적조탑비, 보물 제169호 삼층석탑, 보물 제171호 정진대사 원오탑, 보물 제172호인 정진대사 원오탑비 등이 남아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조계종단에서 봉암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禪門九山중 하나인 희양산문 본찰
한국불교 선맥 잇는 ‘대표 수행처’
봉암사 결사 이후 이곳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는 수행처를 대표하게 된다. 봉암사는 1947년 당시 결사대중 가운데 한 명이었던 향곡스님이 조실로 주석한 1972년부터 수행도량의 면모를 되찾게 된다. 특히 1980년 서암스님이 조실로 주석하면서 사격은 더욱 일신됐다. 그리고 1982년 6월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됐으며, 이어 1984년 6월 봉암사 태고선원은 종립선원이 됐다.
많은 출.재가자들에게 봉암사가 선망의 대상인 까닭은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봉암사는 그간 수좌들의 수행환경을 지키기 위해 25년간 산문을 폐쇄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해왔다. 1년에 한번 봉암사에 들어갈 수 있는 부처님오신날이면, 많은 불자들이 이곳을 참배하고 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304호/ 2월21일자]
2007-02-16 오전 10:30:36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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