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 결사’란…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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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6-04 16:25 조회15,629회 댓글0건본문
‘봉암사 결사’란…
낮엔 일하고 밤새워 정진, 청담·성철스님 주축 실천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부처님 법대로 살자.”
“출가 수행자의 본분사로 돌아가자.”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47년에 성철(사진), 청담, 향곡, 자운, 보문, 우봉, 종수, 월산, 혜암, 법전, 성수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봉암사에서 결사를 시작하며 내건 기치다. 부처님 당시처럼 재현해서 직접 탁발하고 나무하고 정진하며 제대로 중노릇하자는 것이었다. 결사에 들어간 뒤 우선 시작한 것은 비불교적 요소를 척결하는 것이었다.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이외에는 전부 다 정리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 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다. 불공은 자신이 성심껏 하는 것이지 중간에 스님이 축원하고 목탁치는 것이 아니라며 기존의 불공도 없애 버렸다.” 성철 스님이 생전 봉암사 결사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부처님의 법에 맞지 않는 나무 바리때(스님의 밥그릇)를 비롯, 비단으로 만든 가사(袈裟·승려가 입는 법의)와 장삼(長衫·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가 넓은 승려의 겉옷)도 모아 불살라 버렸다. 가사는 봉암사에서 다시 만들어 괴색(壞色·청색, 홍색, 황색 등 모든 색이 파괴된, 자색 계통의 탁한 색)으로 물을 들였다. 바리때가 없어 처음에는 양재기를 펴서 쓰다가 나중에는 옹기를 맞추었고, 장삼은 자운 스님이 송광사에 있던 보조 스님의 장삼을 보고 와서 새로 만들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이란 청규에 따라 곡식 또한 전부 스님들 손으로 찧고, 밥도 손수 해 먹었다. 밭 메는 것, 나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불공도 하지 않고, 기도 염불도 폐지하다 보니 신도들은 뚝 떨어져 재정은 궁핍해졌다. 엄격한 청규에 기가 질려 도망치는 이도 없잖았다. 그래도 결사에 들어간 스님들은 굽히지 않았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치열한 정진이었다. 낮에 나무 한 짐 하거나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밤을 새워 정진하는 것이 예사였다. 결사의 중심에 있던 성철 스님은 “밥값 내놓아라”고 스님의 정진을 독려하며, 양철통의 물을 한 스님에게 끼얹어 버리고, 재가 가득한 놋향로를 다른 스님에게 덮어씌워 버리기도 했다. 성철 스님에게 멱살을 잡혀 계곡물에 빠진 이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봉암사 결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남한에서 좌익활동이 금지되고, 빨치산 활동이 격렬해지면서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던 봉암사도 안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1950년 3월, 동안거 해제 직후 결사는 해체되었다.
3년에 불과했지만 선종의 가풍을 실천하며 수행 종풍을 진작한 파장은 크고도 깊었다. 결사 참여대중 가운데 청담, 성철, 혜암, 법전 스님 등 4명이 종정에 추대됐고, 자운, 월산, 성수 스님 등 7명이 총무원장이 됐다. 이 결사가 한국 불교에 끼친 영향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7/01/25
낮엔 일하고 밤새워 정진, 청담·성철스님 주축 실천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부처님 법대로 살자.”
“출가 수행자의 본분사로 돌아가자.”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47년에 성철(사진), 청담, 향곡, 자운, 보문, 우봉, 종수, 월산, 혜암, 법전, 성수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봉암사에서 결사를 시작하며 내건 기치다. 부처님 당시처럼 재현해서 직접 탁발하고 나무하고 정진하며 제대로 중노릇하자는 것이었다. 결사에 들어간 뒤 우선 시작한 것은 비불교적 요소를 척결하는 것이었다.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이외에는 전부 다 정리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 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다. 불공은 자신이 성심껏 하는 것이지 중간에 스님이 축원하고 목탁치는 것이 아니라며 기존의 불공도 없애 버렸다.” 성철 스님이 생전 봉암사 결사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부처님의 법에 맞지 않는 나무 바리때(스님의 밥그릇)를 비롯, 비단으로 만든 가사(袈裟·승려가 입는 법의)와 장삼(長衫·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가 넓은 승려의 겉옷)도 모아 불살라 버렸다. 가사는 봉암사에서 다시 만들어 괴색(壞色·청색, 홍색, 황색 등 모든 색이 파괴된, 자색 계통의 탁한 색)으로 물을 들였다. 바리때가 없어 처음에는 양재기를 펴서 쓰다가 나중에는 옹기를 맞추었고, 장삼은 자운 스님이 송광사에 있던 보조 스님의 장삼을 보고 와서 새로 만들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이란 청규에 따라 곡식 또한 전부 스님들 손으로 찧고, 밥도 손수 해 먹었다. 밭 메는 것, 나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불공도 하지 않고, 기도 염불도 폐지하다 보니 신도들은 뚝 떨어져 재정은 궁핍해졌다. 엄격한 청규에 기가 질려 도망치는 이도 없잖았다. 그래도 결사에 들어간 스님들은 굽히지 않았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치열한 정진이었다. 낮에 나무 한 짐 하거나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밤을 새워 정진하는 것이 예사였다. 결사의 중심에 있던 성철 스님은 “밥값 내놓아라”고 스님의 정진을 독려하며, 양철통의 물을 한 스님에게 끼얹어 버리고, 재가 가득한 놋향로를 다른 스님에게 덮어씌워 버리기도 했다. 성철 스님에게 멱살을 잡혀 계곡물에 빠진 이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봉암사 결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남한에서 좌익활동이 금지되고, 빨치산 활동이 격렬해지면서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던 봉암사도 안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1950년 3월, 동안거 해제 직후 결사는 해체되었다.
3년에 불과했지만 선종의 가풍을 실천하며 수행 종풍을 진작한 파장은 크고도 깊었다. 결사 참여대중 가운데 청담, 성철, 혜암, 법전 스님 등 4명이 종정에 추대됐고, 자운, 월산, 성수 스님 등 7명이 총무원장이 됐다. 이 결사가 한국 불교에 끼친 영향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7/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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