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사리탑-과거와 현재의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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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6-04 16:32 조회16,279회 댓글0건본문
원철스님의 동어서화 17.
과거와 현재의 조합
“역사적 안목 있어야 명작 탄생”
중국계 미국국적의 건축가 아이 엠 페이(Ieoh Ming Pei) 작품을 처음 만난 건 일본 소호 뮤지엄(So Ho Museum:뉴욕에도 같은 이름의 박물관이 있지만 전혀 다른 것임)이었다. 건축가와 건축주가 원도 한도 없이 마음껏 기량과 물량을 아끼지 않았음을 한 눈에 알게 해 주었다. 하지만 페이의 작품을 논할 때 이것보다는 영화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루브르 미술관 앞의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를 제일로 친다. 그 스스로도 ‘건축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념할만한 작품’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절집에서 고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사례를 굳이 찾는다면 ‘국민승려’인 성철(1912~1993)선사 사리탑을 들 수 있겠다. 이는 1976년 무렵부터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인 설치미술가 최재은(1953~ )의 작품이다. 중심석재는 인도에서 사원건축에 많이 사용되는 애석이다. 그녀는 선사의 올곧은 수행정신과 자비심을 현대적 조형미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카오스 이론가인 벨기에 물리학자 일리야 프리고진 교수도 “동양적 시간의 영원성을 잘 표현하였다”고 평한 바 있다. 이 시대의 조형언어로서 천년전통과 현시대정신 그리고 선사상이 하나로 만나는 새로운 형식의 사리탑이라고 하겠다. 탑 주변은 ‘나를 찾아가는 선(禪)의 공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템플스테이 혹은 수련법회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새벽예불을 마친 후 동틀 무렵까지 참선하는 공간으로 애용되고 있다. 수행 소감문을 받아보면 이곳의 아침정진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는 글이 가장 많다. 이미 주변에 회향된 공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1999년 대한민국환경문화상(주최:문광부)을 수상한 명작이기도 하다.
현대적 조형미 담긴 성철스님 부도
올곧은 수행정신과 자비심도 함축
하지만 조합이 늘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파주 용미리 미륵불은 고려 선종(1084~1094)이 후사가 없어 현몽에 따라 이 불상을 조성하고 기도한 공덕으로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져 온다. (아들이 없는)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3년 이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당시 파주군수와 파주고적보존위원장은 이듬해 동자상과 자그마한 칠층석탑을 덧올려‘미륵불.이대통령 기념탑’ 봉안식을 거행한 바 있다. 하지만 어깨 위에 인위적으로 추가된 그 동자상과 칠층석탑은 1987년 요사채 옆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 이유는 예술성이 결여된 부조화의 ‘정치적 설치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지혜있는 관리였다면 그 당시 제대로 된 작가를 찾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의욕만 있다고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35년만의 철거는 역사적 안목없이 이루어지는 증축이 어떤 결과를 빚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라고 하겠다. 지혜있는 이는 삼세(三世:과거 현재 미래)는 물론 시방(十方;모든 방향)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돌공장의 석수장이 보다도 못한, 이(理)에도 걸리고 사(事)에도 걸리는 안목으로 이러쿵 저러쿵하며 주물떡거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조선초기 함허(函虛1376~1433)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역천겁불고(歷千劫不古)하고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이라.
천겁을 지나도 옛이 아니며 만세에 뻗쳐있어도 항상 지금이다.”
조계종 총무원 기획국장
[불교신문 2328호/ 5월19일자]
2007-05-16 오후 5:16:46 / 송고
과거와 현재의 조합
“역사적 안목 있어야 명작 탄생”
중국계 미국국적의 건축가 아이 엠 페이(Ieoh Ming Pei) 작품을 처음 만난 건 일본 소호 뮤지엄(So Ho Museum:뉴욕에도 같은 이름의 박물관이 있지만 전혀 다른 것임)이었다. 건축가와 건축주가 원도 한도 없이 마음껏 기량과 물량을 아끼지 않았음을 한 눈에 알게 해 주었다. 하지만 페이의 작품을 논할 때 이것보다는 영화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루브르 미술관 앞의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를 제일로 친다. 그 스스로도 ‘건축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념할만한 작품’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절집에서 고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사례를 굳이 찾는다면 ‘국민승려’인 성철(1912~1993)선사 사리탑을 들 수 있겠다. 이는 1976년 무렵부터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인 설치미술가 최재은(1953~ )의 작품이다. 중심석재는 인도에서 사원건축에 많이 사용되는 애석이다. 그녀는 선사의 올곧은 수행정신과 자비심을 현대적 조형미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카오스 이론가인 벨기에 물리학자 일리야 프리고진 교수도 “동양적 시간의 영원성을 잘 표현하였다”고 평한 바 있다. 이 시대의 조형언어로서 천년전통과 현시대정신 그리고 선사상이 하나로 만나는 새로운 형식의 사리탑이라고 하겠다. 탑 주변은 ‘나를 찾아가는 선(禪)의 공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템플스테이 혹은 수련법회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새벽예불을 마친 후 동틀 무렵까지 참선하는 공간으로 애용되고 있다. 수행 소감문을 받아보면 이곳의 아침정진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는 글이 가장 많다. 이미 주변에 회향된 공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1999년 대한민국환경문화상(주최:문광부)을 수상한 명작이기도 하다.
현대적 조형미 담긴 성철스님 부도
올곧은 수행정신과 자비심도 함축
하지만 조합이 늘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파주 용미리 미륵불은 고려 선종(1084~1094)이 후사가 없어 현몽에 따라 이 불상을 조성하고 기도한 공덕으로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져 온다. (아들이 없는)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3년 이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당시 파주군수와 파주고적보존위원장은 이듬해 동자상과 자그마한 칠층석탑을 덧올려‘미륵불.이대통령 기념탑’ 봉안식을 거행한 바 있다. 하지만 어깨 위에 인위적으로 추가된 그 동자상과 칠층석탑은 1987년 요사채 옆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 이유는 예술성이 결여된 부조화의 ‘정치적 설치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지혜있는 관리였다면 그 당시 제대로 된 작가를 찾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의욕만 있다고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35년만의 철거는 역사적 안목없이 이루어지는 증축이 어떤 결과를 빚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라고 하겠다. 지혜있는 이는 삼세(三世:과거 현재 미래)는 물론 시방(十方;모든 방향)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돌공장의 석수장이 보다도 못한, 이(理)에도 걸리고 사(事)에도 걸리는 안목으로 이러쿵 저러쿵하며 주물떡거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조선초기 함허(函虛1376~1433)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역천겁불고(歷千劫不古)하고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이라.
천겁을 지나도 옛이 아니며 만세에 뻗쳐있어도 항상 지금이다.”
조계종 총무원 기획국장
[불교신문 2328호/ 5월19일자]
2007-05-16 오후 5:16:46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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