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법석 : 원택스님(해인사 백련암)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6-04 16:50 조회16,209회 댓글0건본문
해인사 백련암 원택스님
“늦은 만행길, 출가 때 다짐 성취해야죠”
‘자기 속이지 말라’는 말씀 좌우명 삼아
남은 시자역할은 성철스님 가르침 결집
<운문광록(雲門廣錄)>을 오늘날 선가에서 널리 읽을 수 있는 것은 향림(香林) 징원(澄遠)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운문스님의 4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18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시자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크게 깨쳤다. 그의 은사 운문스님은 법문이나 대기설법 등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자의 생각은 달랐다. 늘 종이로 옷을 만들어 입고 은사 몰래 일상의 말씀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 마침내 은사의 어록이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불문(佛門)에 들어있는 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한국불교에도 그에 못지않은 예가 있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큰 스승’ 성철스님의 곁을 지킨 원택스님이다.
맏상좌 천제스님에 이어 열반 때까지 스승 곁을 지킨 원택스님은 성철스님 생존 시 <본지풍광>과 <선문정로>를 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매일 새벽 은사의 구술을 받아 옮겨 법정스님의 윤문을 거치기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다. 두 책은 선불교에 대한 성철스님의 생각을 정리한 것으로 역대 고승들이 주고받은 얘기들을 많이 인용한 귀중한 책이다. 성철스님 자신이 “나는 이제 부처님 밥값을 했다. 이 책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를 바로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11권의 법문집과 37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선어록 선림고경총서도 결실을 맺게 됐다.
뿐만 아니라 성철스님 열반 후 펴낸 <시봉이야기>는 세간과 출세간을 넘나들며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세간에서는 성철스님의 진면목 볼 수 있는 수행서로, 출세간에서는 은사를 시봉하는 이의 ‘스테디셀러’로 관심을 모은 것이다. ‘불교문학의 세세한 분야를 장르로 이름 붙여 얘기한다면 ‘시봉이야기’라는 한 장르를 개척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어디 제가 법석에 오를 자격이 있겠느냐”며 사양하던 스님을 설득 끝에 부처님오신날을 보름 여 앞둔 지난 15일 성철스님의 오랜 주석처 해인사 백련암에서 만났다.
성철스님 존상을 모신 고심원(古心院)을 들러 정념당(正念堂)에서 스님과 마주 앉으니 ‘不欺自心’이라는 문구가 쓰인 액자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원택스님에게는 출가의 계기가 된 좌우명이기도 하다.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백련암을 찾아간 것이 인생을 행로를 바꾼 결과가 됐다. 난생 처음 감히 마주 쳐다볼 수 없는 형형한 눈빛을 쏟아내는 성철스님을 처음 만났다.
“‘큰스님을 봬온 기념으로 저희들이 평생 지닐 좌우명을 한 말씀 주십시오’하고 청을 드렸더니 스님이 ‘이 놈들아!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노? 절돈 3000원 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불가(佛家)에 비구스님은 250계, 비구니스님은 500계, 신도들은 보살 48계를 지키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들은 좌우명 딱 한 말씀, 1계에 불과한데 공짜로 주시지요’ 하고 겁도 없이 말씀드리니, 큰스님이 ‘니는 불교에 뭐 좀 아는 기 있나? 안되겠다. 니는 절돈 1만원 내놔라!’고 하셨어요.”
혹을 붙인 꼴이 됐다. ‘웬 큰스님이 돈타령인가?’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는데 옆에 있던 스님이 ‘통역’을 해줬다. 돈은 절을 뜻하는 것이었다. 곧바로 백련암 안에 있는 작은 기도처 천태전에 올라갔다. 24시간 이내에 1만 배(拜)를 하라는 ‘엄명’에 따라 죽을 고생을 하며 1만 배 ‘시늉’을 내고 녹초가 된 몸으로 친구와 같이 다시 큰스님께 3배를 드렸다.
“형형히 빛나는 눈을 더 크게 뜨시고 한참을 쏘아보시더니 ‘너거들 낯짝을 보니 내말을 지킬 놈들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가라’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지키고 못 지키는 것은 나중 일이고. 절 돈은 내놨으니 좌우명을 주시지 않으면 절 돈을 떼먹는 스님이 되는 것입니다’하고 말씀 드리니 ‘허허 그래? 그럼 절돈 냈으니 좌우명을 주지!’하시며 다짐을 받듯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속이지 마라. 이 한 마디다. 평생 잘 지켜보라’고 다짐을 두셨어요.”
순간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큰스님이라서 금덩어리 같은 말씀을 주실 줄 알았는데 그 흔하고 흔한 흙덩어리 같은 말씀을 주시다니…” 허허로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1971년 3월말 경이었다. 그리고 서너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렇다. 그날 내가 큰스님의 한 말씀을 오해했다’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속이지 마라’ 하시는 말씀을 그때는 ‘남을 속이지 마라’고 알아들었기에 내가 그렇게 실망했었는데, ‘자기를 속이지 마라’는 말씀으로 그때 바로 알아들었더라면…. 어쩌면 내가 평생 못 지킬지도 모르는 큰 말씀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되면서 성철스님을 다시 찾아봬야겠다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원택스님은 그해 7월 중순 성철스님을 백련암으로 다시 찾아뵙고 화두를 받아 참선을 하게 되었고, 6개월이 지난 1972년 1월 중순 백련암으로 입산출가했다. 백련암 계단을 다 올라와 뒤를 돌아다보면서 ‘도를 이루기 전에는 이 길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성철스님의 심부름 아니고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세월을 보냈다.
어느 해인가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 49재 참석했다 돌아가는 열차에서 현호스님을 만나 귀중한 말씀을 듣게 됐다. “큰스님 생전에 법문하신 모든 것을 출판했어야 했는데 상좌로서 그걸 하나도 못해 드려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동병상련의 입장이 될 수 있는 원택스님의 귀를 확 뜨이게 귀중한 말씀이었다.
“그동안 뒷방에서 공부한답시고 4~5년 동안 틈틈이 큰스님의 백일법문 녹음테이프를 시험지에 옮겨 놓았었습니다.” 그걸 책으로 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않고 있었는데 현호스님의 말씀을 듣고 ‘아 큰스님 생전에 그 책을 출판해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이다. <본지풍광> <선문정로>로 시작, 법어집 11권과 선림고경총서라는 대작불사를 성취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 어느 큰스님의 열반 후 미진한 불사 때문에 통곡했다는 한 신도의 얘기는 원택스님으로 하여금 성철스님 생존시 불사는 물론 사리탑으로부터 생가복원 및 산청 겁외사 창건, 부산 고심정사 창건에 이르기까지 추모불사에도 혼신을 다하게 했다. 1987년 설립한 재단법인 백련불교문화재단은 성철스님이 평생 주장했던 선종의 돈오돈수 사상을 선양하는 학자들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 옛날 향림징원스님에 비하면 저는 천분의 일,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능력으로 큰스님의 시자노릇을 하였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을 뿐입니다. 2012년 3월11월이면 큰스님 탄신 100주년이 되고 2013년 11월4일이면 큰스님 열반 20주기가 됩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큰스님의 자필자료들을 그때까지 정리해 학자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고 신도님들에게는 존경심을 고양하는 불사를 이루는 것이 저의 못다 한 시자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양무제도 달마스님을 추모하면서 ‘보고서도 보지 못하고, 만나서도 만나지 못하였으니(見之不見 逢之不逢) 예나 이제나 원망스럽고 한스럽다(古之今之 悔之恨之)’고 했습니다. 시자의 일을 마치고는 ‘자기를 속이지 마라’ 하시며 주신 좌우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하고 성철스님과 인연을 맺은 후 열반 때까지 심부름 이외에는 곁을 떠나지 않은 ‘성철스님의 영원한 시자’ 원택스님. 세속에서는 ‘경로우대증’을 받을 나이지만 처음 은사를 찾아올라오던 그때로 돌아가 마음을 다잡아 본다.
“늦은 만행의 길을 떠나 ‘도를 이루기 전에는 이 길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고 한 다짐을 성취하여야겠습니다.”
원택스님은…
1944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스님을 은사로 출가, 총무원 총무부장, 중앙종회의원, 파라미타청소년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녹색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파라미타 회장을 역임한 인연으로 청소년협회 활성화에도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와 재단법인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계승하기 위한 불사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선림고경총서 37권 편찬을 이끌었으며 이후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성철스님 화두참선법> 등을 펴냈다. 해인사 백련암과 부산 고심정사에 주석하고 있다.
해인사=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519호/ 4월22일자]
2009-04-18 오전 11:26:00 / 송고
“늦은 만행길, 출가 때 다짐 성취해야죠”
‘자기 속이지 말라’는 말씀 좌우명 삼아
남은 시자역할은 성철스님 가르침 결집
<운문광록(雲門廣錄)>을 오늘날 선가에서 널리 읽을 수 있는 것은 향림(香林) 징원(澄遠)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운문스님의 4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18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시자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크게 깨쳤다. 그의 은사 운문스님은 법문이나 대기설법 등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자의 생각은 달랐다. 늘 종이로 옷을 만들어 입고 은사 몰래 일상의 말씀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 마침내 은사의 어록이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불문(佛門)에 들어있는 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한국불교에도 그에 못지않은 예가 있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큰 스승’ 성철스님의 곁을 지킨 원택스님이다.
맏상좌 천제스님에 이어 열반 때까지 스승 곁을 지킨 원택스님은 성철스님 생존 시 <본지풍광>과 <선문정로>를 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매일 새벽 은사의 구술을 받아 옮겨 법정스님의 윤문을 거치기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다. 두 책은 선불교에 대한 성철스님의 생각을 정리한 것으로 역대 고승들이 주고받은 얘기들을 많이 인용한 귀중한 책이다. 성철스님 자신이 “나는 이제 부처님 밥값을 했다. 이 책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를 바로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11권의 법문집과 37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선어록 선림고경총서도 결실을 맺게 됐다.
뿐만 아니라 성철스님 열반 후 펴낸 <시봉이야기>는 세간과 출세간을 넘나들며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세간에서는 성철스님의 진면목 볼 수 있는 수행서로, 출세간에서는 은사를 시봉하는 이의 ‘스테디셀러’로 관심을 모은 것이다. ‘불교문학의 세세한 분야를 장르로 이름 붙여 얘기한다면 ‘시봉이야기’라는 한 장르를 개척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어디 제가 법석에 오를 자격이 있겠느냐”며 사양하던 스님을 설득 끝에 부처님오신날을 보름 여 앞둔 지난 15일 성철스님의 오랜 주석처 해인사 백련암에서 만났다.
성철스님 존상을 모신 고심원(古心院)을 들러 정념당(正念堂)에서 스님과 마주 앉으니 ‘不欺自心’이라는 문구가 쓰인 액자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원택스님에게는 출가의 계기가 된 좌우명이기도 하다.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백련암을 찾아간 것이 인생을 행로를 바꾼 결과가 됐다. 난생 처음 감히 마주 쳐다볼 수 없는 형형한 눈빛을 쏟아내는 성철스님을 처음 만났다.
“‘큰스님을 봬온 기념으로 저희들이 평생 지닐 좌우명을 한 말씀 주십시오’하고 청을 드렸더니 스님이 ‘이 놈들아!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노? 절돈 3000원 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불가(佛家)에 비구스님은 250계, 비구니스님은 500계, 신도들은 보살 48계를 지키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들은 좌우명 딱 한 말씀, 1계에 불과한데 공짜로 주시지요’ 하고 겁도 없이 말씀드리니, 큰스님이 ‘니는 불교에 뭐 좀 아는 기 있나? 안되겠다. 니는 절돈 1만원 내놔라!’고 하셨어요.”
혹을 붙인 꼴이 됐다. ‘웬 큰스님이 돈타령인가?’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는데 옆에 있던 스님이 ‘통역’을 해줬다. 돈은 절을 뜻하는 것이었다. 곧바로 백련암 안에 있는 작은 기도처 천태전에 올라갔다. 24시간 이내에 1만 배(拜)를 하라는 ‘엄명’에 따라 죽을 고생을 하며 1만 배 ‘시늉’을 내고 녹초가 된 몸으로 친구와 같이 다시 큰스님께 3배를 드렸다.
“형형히 빛나는 눈을 더 크게 뜨시고 한참을 쏘아보시더니 ‘너거들 낯짝을 보니 내말을 지킬 놈들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가라’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지키고 못 지키는 것은 나중 일이고. 절 돈은 내놨으니 좌우명을 주시지 않으면 절 돈을 떼먹는 스님이 되는 것입니다’하고 말씀 드리니 ‘허허 그래? 그럼 절돈 냈으니 좌우명을 주지!’하시며 다짐을 받듯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속이지 마라. 이 한 마디다. 평생 잘 지켜보라’고 다짐을 두셨어요.”
순간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큰스님이라서 금덩어리 같은 말씀을 주실 줄 알았는데 그 흔하고 흔한 흙덩어리 같은 말씀을 주시다니…” 허허로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1971년 3월말 경이었다. 그리고 서너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렇다. 그날 내가 큰스님의 한 말씀을 오해했다’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속이지 마라’ 하시는 말씀을 그때는 ‘남을 속이지 마라’고 알아들었기에 내가 그렇게 실망했었는데, ‘자기를 속이지 마라’는 말씀으로 그때 바로 알아들었더라면…. 어쩌면 내가 평생 못 지킬지도 모르는 큰 말씀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되면서 성철스님을 다시 찾아봬야겠다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원택스님은 그해 7월 중순 성철스님을 백련암으로 다시 찾아뵙고 화두를 받아 참선을 하게 되었고, 6개월이 지난 1972년 1월 중순 백련암으로 입산출가했다. 백련암 계단을 다 올라와 뒤를 돌아다보면서 ‘도를 이루기 전에는 이 길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성철스님의 심부름 아니고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세월을 보냈다.
어느 해인가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 49재 참석했다 돌아가는 열차에서 현호스님을 만나 귀중한 말씀을 듣게 됐다. “큰스님 생전에 법문하신 모든 것을 출판했어야 했는데 상좌로서 그걸 하나도 못해 드려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동병상련의 입장이 될 수 있는 원택스님의 귀를 확 뜨이게 귀중한 말씀이었다.
“그동안 뒷방에서 공부한답시고 4~5년 동안 틈틈이 큰스님의 백일법문 녹음테이프를 시험지에 옮겨 놓았었습니다.” 그걸 책으로 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않고 있었는데 현호스님의 말씀을 듣고 ‘아 큰스님 생전에 그 책을 출판해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이다. <본지풍광> <선문정로>로 시작, 법어집 11권과 선림고경총서라는 대작불사를 성취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 어느 큰스님의 열반 후 미진한 불사 때문에 통곡했다는 한 신도의 얘기는 원택스님으로 하여금 성철스님 생존시 불사는 물론 사리탑으로부터 생가복원 및 산청 겁외사 창건, 부산 고심정사 창건에 이르기까지 추모불사에도 혼신을 다하게 했다. 1987년 설립한 재단법인 백련불교문화재단은 성철스님이 평생 주장했던 선종의 돈오돈수 사상을 선양하는 학자들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 옛날 향림징원스님에 비하면 저는 천분의 일,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능력으로 큰스님의 시자노릇을 하였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을 뿐입니다. 2012년 3월11월이면 큰스님 탄신 100주년이 되고 2013년 11월4일이면 큰스님 열반 20주기가 됩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큰스님의 자필자료들을 그때까지 정리해 학자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고 신도님들에게는 존경심을 고양하는 불사를 이루는 것이 저의 못다 한 시자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양무제도 달마스님을 추모하면서 ‘보고서도 보지 못하고, 만나서도 만나지 못하였으니(見之不見 逢之不逢) 예나 이제나 원망스럽고 한스럽다(古之今之 悔之恨之)’고 했습니다. 시자의 일을 마치고는 ‘자기를 속이지 마라’ 하시며 주신 좌우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하고 성철스님과 인연을 맺은 후 열반 때까지 심부름 이외에는 곁을 떠나지 않은 ‘성철스님의 영원한 시자’ 원택스님. 세속에서는 ‘경로우대증’을 받을 나이지만 처음 은사를 찾아올라오던 그때로 돌아가 마음을 다잡아 본다.
“늦은 만행의 길을 떠나 ‘도를 이루기 전에는 이 길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고 한 다짐을 성취하여야겠습니다.”
원택스님은…
1944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스님을 은사로 출가, 총무원 총무부장, 중앙종회의원, 파라미타청소년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녹색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파라미타 회장을 역임한 인연으로 청소년협회 활성화에도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와 재단법인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계승하기 위한 불사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선림고경총서 37권 편찬을 이끌었으며 이후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성철스님 화두참선법> 등을 펴냈다. 해인사 백련암과 부산 고심정사에 주석하고 있다.
해인사=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519호/ 4월22일자]
2009-04-18 오전 11:26:00 / 송고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