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조노대에서 박사학위 받은 원충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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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6-04 16:46 조회16,519회 댓글0건본문
“승조 이름 빌린 ‘보장론’이 선종사 바꿨다”
日 하나조노대에서 박사학위 받은 원충 스님
야나기다 마지막 제자로 6년간 사사
보장론으로 중국선종사 새롭게 조명
지난 2001년 1월 초기선종사 분야의 독보적인 권위자로 일컬어지는 일본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선생은 한국의 한 수행자와 마주하고 앉았다. 성철 스님의 상좌로 선학(禪學)을 배우겠다고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원충스님. 도쿄 고마자와대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그는 노학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송대(宋代) 간화선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간화선은 격의불교, 반야사상, 노장사상을 모르고는 알 수 없습니다.”
“…”
“『보장론(寶藏論)』이라고 있지요. 내가 60여 년 선을 연구했지만 그것을 빼놓았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보장론』은 승조(僧肇, 374~414)의 저술로 오랜 세월 알려져 왔지만 이제 그 책은 8세기 무렵 만들어진 가짜 논서라고 결론 난 것 아닌가? 더 이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 책이 도대체 왜 중요하다는 걸까.’ 원충 스님은 순간 의혹이 일었다. 그러나 50~60여 년간 학문의 길을 걸어온 대석학이 어찌 함부로 말을 하랴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도해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공부하겠습니다.”
“성철 스님 제자이기 때문에 받아들입니다. 원충 스님 덕분에 내 죽음을 3년 뒤로 미뤄야겠네요.”
그 때부터였다. 원충 스님은 미국유학의 꿈을 접는 동시에 곧바로 교토 하나조노대학원에 입학했고 석사학위 주제로 승조의 『조론』을 선택했다. 『보장론』 연구를 위해선 구마라집의 제자였던 승조 연구가 선행돼야 했고, 반야, 격의, 노장에 대한 연구도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대학원에 다니는 동시에 일주일에 몇 번씩이고 인근 야나기다 선생의 집을 찾았다. 선생이 지병으로 병원에 장기입원 했을 때는 몇 달 간 그 집에 살기도 했다.
선생과의 대면은 마치 수좌가 조실과 마주하듯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선생은 매번 “오늘 선물은 무엇이냐?”고 물었고, 스님은 밤새워 공부한 내용을 얘기 했으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물었다. 선생의 말은 『조당집』 속 선승처럼 간결하고 명료했다. 그러나 경전이나 선어록 내용을 말해도 그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기에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은 오롯이 스님의 몫이었다.
스님은 공부에 큰 진전이 있으면 뛸 듯이 기뻐하며 선생 집을 찾았다. 반대로 공부에 별다른 진전이 없을 때는 진땀을 빼곤 했다. 그렇기에 스님은 무섭게 공부에 매달렸다. 졸리면 허벅지가 퍼렇게 멍들 정도로 비틀거나 대나무로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렇게 잠을 2~3시간으로 줄여가며 수많은 문헌을 독파해 나갔고 마침내 2년 만에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스님은 2003년 봄 곧바로 박사과정에 입학해 본격적인 『보장론』 연구에 착수했다.
그 무렵이었다. ‘선생께선 왜 그토록 『보장론』을 강조하신 걸까?’라는 오랜 의문이 풀린 것도…. ‘보장(寶藏)’은 『법화경』 ‘장자의 비유’에 나오는 용어로 이후 선종에서 ‘진여(眞如)’로 인식되면서 오조 홍인스님의 『수심요론』을 비롯해 육조 혜능의 비문과 북종·남종계 어록에서도 자주 인용하고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단어로, 후대 공안의 ‘보물창고’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기도 했다.
중국 계율종 남산파 개조인 도선율사(596~667)가 ‘허종(虛宗)’이라 명명했을 정도로 선종과 반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러나 현장법사(602?~664)에 의해 새로운 반야사상이 소개되면서 8세기 무렵 선종의 반야공에 대한 이해는 더이상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선종의 한 ‘초절정 고수’가 반야사상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승조의 이름을 빌어 선종의 반야사상을 새롭게 재정립한 탁월한 문헌이 바로 『보장론』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선의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했던 『보장론』은 종밀, 대혜 스님 등을 비롯한 수많은 선사들에 의해 인용됐을 뿐 아니라 『보장론』 내용 자체에서만 벽암록 62칙 등을 비롯한 공안들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그 영향력이 지대했다.
원충 스님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놀라웠다. 『보장론』에 대한 이해 없이 선종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야나기다 선생의 말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장론』의 진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보장론』 첫 구절이 ‘공가공비상공(空可空非常空)’으로 『도덕경』의 첫 구절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과 유사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노장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깊은 이해가 불가능했다. 원충 스님은 8세기 당시 도교 측이 불교의 반야공사상을 흡수해 새로운 이론을 내놓고 있었음을 알았고, 이 『보장론』이 도가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철저하게 불교의 반야공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곧 당시 당나라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새롭게 도약하고 있던 도가사상에 대한 선종의 신랄한 비판이었고, 도가 측의 반야 이해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는 냉혹한 평가였던 것이다.
원충 스님은 『보장론』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보장’의 개념과 실천적인 면인 ‘진일(眞一)’의 개념을 담고 있는 『보장론』이 선종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특히 학계에서는 처음으로 『보장론』을 현대어로 옮기고 꼼꼼한 주석까지 달았다. 그야말로 방대한 작업이었다. 실제 그동안 연구성과가 박사학위로 묶여져 나왔을 때는 200자 원고지로 4000매에 이르렀다. 보통 박사학위가 1000매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분량이었다.
그러나 야나기다 선생은 스님의 박사학위논문을 끝내 보지 못하고 지난 2006년 11월 8일 끝내 세연을 마치고 말았다. 중병으로 손 하나 까닥하기도 힘든 상황에서도 중국선종사를 새롭게 쓰겠다며 펜을 잡던 팔순의 노학자. 원충 스님은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주며 극락왕생 발원과 함께 꼭 다시 인연이 맺어지길 기도했다.
최근 대혜종고의 묵조사선(默照邪禪)이 단순히 굉지정각이나 당시 불교계의 수행풍토에 대한 자성의 차원을 넘어 성리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다는 내용의 새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원충 스님은 한국에 귀국한 후로도 “선사가 화두를 놓치면 안 되듯 학자는 책을 덮으면 안 된다”는 야나기다 선생의 말을 늘 실천하고 있다. 또 공(空), 무(無), 업(業) 등 단어 한 글자에 담긴 뜻을 20개만 제대로 알아도 대학자라고 얘기했던 선생. 그의 말처럼 많은 것을 배우려 욕심내기보다 하나라도 철두철미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원충 스님은 “야다기다 선생은 자신이 이룩한 학문세계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중국선종사를 볼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다”며 “성철 스님과 야다기다 선생의 큰 은혜와 가르침에 부응하는 학자로서의 길을 걷겠다”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949호 [2008-05-13]
日 하나조노대에서 박사학위 받은 원충 스님
야나기다 마지막 제자로 6년간 사사
보장론으로 중국선종사 새롭게 조명
지난 2001년 1월 초기선종사 분야의 독보적인 권위자로 일컬어지는 일본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선생은 한국의 한 수행자와 마주하고 앉았다. 성철 스님의 상좌로 선학(禪學)을 배우겠다고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원충스님. 도쿄 고마자와대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그는 노학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송대(宋代) 간화선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간화선은 격의불교, 반야사상, 노장사상을 모르고는 알 수 없습니다.”
“…”
“『보장론(寶藏論)』이라고 있지요. 내가 60여 년 선을 연구했지만 그것을 빼놓았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보장론』은 승조(僧肇, 374~414)의 저술로 오랜 세월 알려져 왔지만 이제 그 책은 8세기 무렵 만들어진 가짜 논서라고 결론 난 것 아닌가? 더 이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 책이 도대체 왜 중요하다는 걸까.’ 원충 스님은 순간 의혹이 일었다. 그러나 50~60여 년간 학문의 길을 걸어온 대석학이 어찌 함부로 말을 하랴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도해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공부하겠습니다.”
“성철 스님 제자이기 때문에 받아들입니다. 원충 스님 덕분에 내 죽음을 3년 뒤로 미뤄야겠네요.”
그 때부터였다. 원충 스님은 미국유학의 꿈을 접는 동시에 곧바로 교토 하나조노대학원에 입학했고 석사학위 주제로 승조의 『조론』을 선택했다. 『보장론』 연구를 위해선 구마라집의 제자였던 승조 연구가 선행돼야 했고, 반야, 격의, 노장에 대한 연구도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대학원에 다니는 동시에 일주일에 몇 번씩이고 인근 야나기다 선생의 집을 찾았다. 선생이 지병으로 병원에 장기입원 했을 때는 몇 달 간 그 집에 살기도 했다.
선생과의 대면은 마치 수좌가 조실과 마주하듯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선생은 매번 “오늘 선물은 무엇이냐?”고 물었고, 스님은 밤새워 공부한 내용을 얘기 했으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물었다. 선생의 말은 『조당집』 속 선승처럼 간결하고 명료했다. 그러나 경전이나 선어록 내용을 말해도 그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기에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은 오롯이 스님의 몫이었다.
스님은 공부에 큰 진전이 있으면 뛸 듯이 기뻐하며 선생 집을 찾았다. 반대로 공부에 별다른 진전이 없을 때는 진땀을 빼곤 했다. 그렇기에 스님은 무섭게 공부에 매달렸다. 졸리면 허벅지가 퍼렇게 멍들 정도로 비틀거나 대나무로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렇게 잠을 2~3시간으로 줄여가며 수많은 문헌을 독파해 나갔고 마침내 2년 만에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스님은 2003년 봄 곧바로 박사과정에 입학해 본격적인 『보장론』 연구에 착수했다.
그 무렵이었다. ‘선생께선 왜 그토록 『보장론』을 강조하신 걸까?’라는 오랜 의문이 풀린 것도…. ‘보장(寶藏)’은 『법화경』 ‘장자의 비유’에 나오는 용어로 이후 선종에서 ‘진여(眞如)’로 인식되면서 오조 홍인스님의 『수심요론』을 비롯해 육조 혜능의 비문과 북종·남종계 어록에서도 자주 인용하고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단어로, 후대 공안의 ‘보물창고’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기도 했다.
중국 계율종 남산파 개조인 도선율사(596~667)가 ‘허종(虛宗)’이라 명명했을 정도로 선종과 반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러나 현장법사(602?~664)에 의해 새로운 반야사상이 소개되면서 8세기 무렵 선종의 반야공에 대한 이해는 더이상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선종의 한 ‘초절정 고수’가 반야사상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승조의 이름을 빌어 선종의 반야사상을 새롭게 재정립한 탁월한 문헌이 바로 『보장론』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선의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했던 『보장론』은 종밀, 대혜 스님 등을 비롯한 수많은 선사들에 의해 인용됐을 뿐 아니라 『보장론』 내용 자체에서만 벽암록 62칙 등을 비롯한 공안들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그 영향력이 지대했다.
원충 스님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놀라웠다. 『보장론』에 대한 이해 없이 선종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야나기다 선생의 말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장론』의 진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보장론』 첫 구절이 ‘공가공비상공(空可空非常空)’으로 『도덕경』의 첫 구절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과 유사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노장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깊은 이해가 불가능했다. 원충 스님은 8세기 당시 도교 측이 불교의 반야공사상을 흡수해 새로운 이론을 내놓고 있었음을 알았고, 이 『보장론』이 도가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철저하게 불교의 반야공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곧 당시 당나라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새롭게 도약하고 있던 도가사상에 대한 선종의 신랄한 비판이었고, 도가 측의 반야 이해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는 냉혹한 평가였던 것이다.
원충 스님은 『보장론』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보장’의 개념과 실천적인 면인 ‘진일(眞一)’의 개념을 담고 있는 『보장론』이 선종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특히 학계에서는 처음으로 『보장론』을 현대어로 옮기고 꼼꼼한 주석까지 달았다. 그야말로 방대한 작업이었다. 실제 그동안 연구성과가 박사학위로 묶여져 나왔을 때는 200자 원고지로 4000매에 이르렀다. 보통 박사학위가 1000매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분량이었다.
그러나 야나기다 선생은 스님의 박사학위논문을 끝내 보지 못하고 지난 2006년 11월 8일 끝내 세연을 마치고 말았다. 중병으로 손 하나 까닥하기도 힘든 상황에서도 중국선종사를 새롭게 쓰겠다며 펜을 잡던 팔순의 노학자. 원충 스님은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주며 극락왕생 발원과 함께 꼭 다시 인연이 맺어지길 기도했다.
최근 대혜종고의 묵조사선(默照邪禪)이 단순히 굉지정각이나 당시 불교계의 수행풍토에 대한 자성의 차원을 넘어 성리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다는 내용의 새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원충 스님은 한국에 귀국한 후로도 “선사가 화두를 놓치면 안 되듯 학자는 책을 덮으면 안 된다”는 야나기다 선생의 말을 늘 실천하고 있다. 또 공(空), 무(無), 업(業) 등 단어 한 글자에 담긴 뜻을 20개만 제대로 알아도 대학자라고 얘기했던 선생. 그의 말처럼 많은 것을 배우려 욕심내기보다 하나라도 철두철미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원충 스님은 “야다기다 선생은 자신이 이룩한 학문세계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중국선종사를 볼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다”며 “성철 스님과 야다기다 선생의 큰 은혜와 가르침에 부응하는 학자로서의 길을 걷겠다”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949호 [2008-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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