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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 " 삼각산 도선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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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4-18 14:19 조회16,4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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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련 학생들과의 법연(法緣)을 싹틔우다 
 
삼각산 도선사 (下)
 
데스크승인 2012.03.15  18:10:20  이진두 | 논설위원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은상 시인의 시에 박태준 선생이 곡을 부친 ‘동무생각(思友)’이라는 우리 가곡이다.

1965년 봄. 성철스님이 서울 도선사에 오셨다는 소식이 대불련(한국불교대학생연합회) 구도부원들에게 알려졌다. 1963년 창립된 대불련에는 구도부(求道部)가 있었고 구도부원들은 대불련 회원 중에서도 남다르게 열심히 불교공부를 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도선사 참회도량에서 청담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또한 큰법당 뒷산에서 보현행원품을 독송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 구도부원들에게 성철스님이 오셨다는 소식은 문자 그대로 ‘빅뉴스’였다.

‘동구불출’ 성전암과 달리 친견허락·법문 들려준 일

김용사 수련대회로 이어져

구도회 박성배 지도교수와 서울대 법대생 등 학생 2명

스님 상좌로 잇따라 출가

성철스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듣기로 부원들과 지도교수(박성배 현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교수)가 마음을 모으고 도선사로 향했다. 그 때의 도선사는 지금과는 달랐다. 아스팔트에 찻길이 나기 전이었다. 등산객이나 나무꾼이 다닐 만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구도부원들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동무생각’이었다.

산길이 가파르고 미끄러워 남학생이 여학생을 잡아주려고 손을 내밀면 “아니야, 괜찮아”하며 내미는 손을 잡지도 않고 고집스레 걸어가던 여학생, 그때는 그렇게도 수줍었다.

성철스님을 친견하던 날. 절 뒤편 숲속이었다. 스님은 청담스님, 향곡스님과 오후 산책길에 나선 때였다. 당시 서울대 법대 3학년이던 한국해양대 야청(也靑) 황정원 명예교수는 그때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큰 절 뒤 능선이었어. 대불련 학생 15명이 넘게 있었지. 스님들은 조계종 종조를 태고화상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들을 하셨어. 그러다 약간 평평한 곳에 잠깐 쉴 때였지. 향곡스님이 그러셨어. ‘학생들, 뭐 물어볼 게 있으면 지금 물어 봐’라고. 그때 내가 나섰어. 앉은 자리 앞에 있는 작은 돌덩이를 옆으로 옮겨 놓으면서 성철스님에게 물었어. ‘스님, 지금 이 돌멩이를 옮긴 것입니까 옮기지 않은 것입니까’라고.

   
그러니까 스님은 ‘꿈 깨라’고 하셨어. 또 물었지. ‘스님, 지나가는 사람을 불한당이 칼로 찔러 죽였다면 이는 악한 일입니까, 아닙니까’라고. 성철스님의 답은 여전히 ‘꿈 깨라’였어. 그러자 향곡스님이 ‘학생이 모르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묻는구먼’ 하셨어. 그때 나는 성철스님이 ‘꿈 깨라’는 소리 말고 좀 찬찬히 알아듣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었지.”

야청 선생은 그 후로는 성철스님을 찾아뵙고 묻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졸업 후 거사로서 선풍(禪風)을 드날린 백봉(白峯) 김기추(金基秋) 선생 문하에서 불교공부를 깊게 했다.

성철스님이 서울 도선사에 머물면서 대학생들의 친견을 허락하고 법문을 들려준 그때의 일은 스님 행장(行狀)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스님이 파계사 성전암에서 은거할 때 대불련 학생들, 특히 구도부원들은 스님을 뵙고 싶어도 뵐 수가 없었다. 그런 스님이기에 도선사에 머물 때도 친견을 허락할지 사실 의문이었다. 그랬는데 흔연히 친견을 허락하고 법문도 해 주었으니 학생들로서는 그날의 감격을 70이 다된 나이에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스님도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 대학생들과의 인연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때의 구도부원과 박 교수는 스님이 도선사를 떠나 문경 김용사에 머물 때 여름 겨울 김용사로 가서 여름수련대회, 겨울 동안거 한 철 정진을 했다. 그 법연(法緣)이 쌓여 박 교수와 학생(김금태 이진두) 2명이 출가하여 스님의 상좌가 되었다.

참회하고 보현행원 하자

도선사를 한국 제일의 교육-수행도량으로 만들자는

청담·성철 두 도반의 염원은 도량 곳곳에 향훈으로 남아

필자는 지난 2월20일 오후 도선사에 갔다. 차를 타고 가면서 예전과 다른 길, 다른 주변 풍경에 내내 ‘상전이 벽해로다’,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되뇌곤 했다. 번듯한 일주문을 지나 법당으로 가면서도 “아, 그 옛날 도선사가 이렇게 변했구나. 하기야 그때가 언제야?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으니 그렇지 않겠어?”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법당에 이르기 전 청담기념관이 있다. 청담스님의 일대기를 기리는 전시장이었다. 스님의 친필, 스님의 행적을 드러내는 사진,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한 사진을 비롯하여 스님의 총무원장.종정시절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기념관 안에 있는 스님의 친필 가운데는 흥미있는 액자도 있었다. 청담스님이 설법할 때의 정경이 되살아났다. 스님은 커다란 종이에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면서 설법을 했다. 사람모양도 그리고 독특한 필체로 글씨도 쓴 것이었다.

또한 어느 돼지띠해에 돼지를 그린 연하장도 있었다. 열반 후 영결식장의 사진을 볼 때는 새삼 스님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면서 숙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사진 속에는 자운 성철 향곡 등 스님의 평생 도반 스님들의 모습도 담겨 있었다.

성철스님은 청담스님의 영결식 이후 도선사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도반을 잃어서 그랬기도 했겠지만 행여 도선사를 차지하지 않을까 하는 청담스님 상좌들의 생각도 헤아려서가 아니었겠나”라고 천제스님(부산 해월정사 회주)은 말했다.

   
참회도량에 들어서니 신도들이 너른 도량을 꽉 채우고 추운 겨울날씨인데도 열심히들 절을 하고 있었다.

참회도량을 굽어보는 마애불은 예전과 달리 비를 맞지 않도록 닫집 형태로 꾸며 놓았다. 바닥도 돌로 예쁘게 단장했다. 그리고 옛날보다 더 넓게 해놓았다.

실달학원 간판은 이제는 기념관 한쪽에 모셔놓았다. 도선사는 이제는 옛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수도권내의 신도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참회기도하는 도량으로, 또한 전국 어디에서도 신도들이 찾아오는 이름난 도량으로 변했다.

등산을 하듯 산길 굽이굽이 미끄러지고 엎어지며 오르내리던 그 옛날의 도선사가 아니었다. 법문을 시작하면 시자가 시간이 다 됐다고 쪽지를 올려도 아랑곳 않고 말씀을 하시던 청담스님의 모습도 이제는 기억 속에 간직해야 했다.

그러나 ‘참회하고 보현행원을 하자. 도선사를 한국 제일의 교육.수행도량으로 만들자’는 청담.성철 두 도반의 염원은 곳곳에 그 향훈이 묻어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잔설(殘雪)이 도량을 장엄하듯….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부처와 조사를 원수같이 보라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유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불교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꾸 부처님 믿고 조사를 의지하고 하면 결국은 거기에 구애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법을 성취하려면 자기 마음이 본시 부처라는 것, 이것 이외에는 전부 다 안 믿어야 됩니다.

마음이 부처다(卽心是佛)! 이것만이 바른 믿음(正心)이고 그것 외에 딴 것을 무엇이든 믿으면 그것은 사신(邪信)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만 믿고 팔만대장경도 버리라고 항상 말합니다.

무심(無心)을 증(證)하면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 되어 대자유자재한 활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불고조(古佛古祖)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법을 성취하려면 부처와 조사를 원수같이 보라(見佛祖如寃家相似人)고 했습니다.

- 1982년 5월15일(음) 방장 대중법어 중에서
 


[불교신문 2800호/ 3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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