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일체 중생의 행복 위해 지금도 매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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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6-22 16:41 조회18,162회 댓글0건본문
“일체 중생의 행복 위해 지금도 매일 기도합니다” | ||||||||||||
평전 <걸어가듯 달려가라> 출간한 화승그룹 현승훈 총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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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표 검정 고무신과 르까프, 월드컵 운동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는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한 기업에서 만들었다는 점이다. 1950~60년대를 살았던 이들의 거친 발을 감싸준 기차표 고무신은, 1980년대 이르러 토종브랜드인 월드컵과 르까프 운동화로 대체됐다. 그 변화를 이끈 주역이 바로 화승그룹의 현승훈 총회장이다. 그는 고무신 생산을 주도하던 동양고무산업을 연매출 3조3000억 원 규모의 화승그룹으로 일군 주인공이다. 최근 고희를 맞아 인생역정과 경영철학을 담은 책 <걸어가듯 달려가라>를 출간한 현승훈 회장을 지난 2일 부산 화승그룹 본사에서 만났다. 현 회장은 지난 3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절 수행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독실한 불자이다. 젊었을 때는 매일 아침 500배를 올렸고, 고희를 맞은 요즘도 매일 오전4시에 일어나 108배를 한다. ‘기차표 고무신’으로 시작…화승그룹 일궈낸 주인공 성철스님 가르침 평생 실천…고희에도 매일 108배 정진 집무실에 들어서니 먼저 성철스님의 가르침이 적힌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중생을 대신해서 참회하고 일체중생이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현 회장이 아침마다 108배를 할 때 떠올리는 스님의 가르침이다. 이미 외우고도 남았을 스님의 생전 말씀을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 현 회장은 자신의 공간 곳곳에 스님의 가르침을 남겨 놨다. 스님은 입적하셨지만, 그에게 스님의 가르침은 삶의 나침반과 같다. 그에게 있어 성철스님은 아버지이자 스승이며 정신적 지주이다. 불교에 귀의한 것도 성철스님으로부터 감화를 받은 때문이고, 절 수행을 시작한 것도 성철스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오늘의 화승그룹이 있기까지 그를 지탱해준 것 역시 성철스님의 가르침이다. 힘들 때마다 ‘자기를 바로 보라’는 스님의 말씀을 떠올렸고, 스님이 가르쳐준 대로 절 수행을 했다. 그 때 스님은 그에게 ‘구봉(九峰)’이란 법명과 함께 화두를 내려주었다. 성철스님이 손수 적어준 법명과 화두는 그의 앨범에 지금까지 소중히 보관돼 있다. 현 회장과 성철스님의 만남은 그의 선친의 죽음에서 시작됐다. 그는 1977년 위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49재를 해인사 백련암에서 지냈다. “성철스님을 찾아 아버지처럼 잘 모시라”는 아버지 유언에 따라 다시 백련암을 찾아갔다. “열세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서른여섯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거기에 가업을 이어야 하는 부담까지 더해져 힘든 나날을 보낼 때 성철스님을 떠올렸다.” 아버지와의 인연도 있으니 쉽게 스님을 친견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시자 스님은 여느 방문객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3000배를 한 후 스님을 만날 수 있다고 전언했다. 절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08배를 처음 올린 게 아버지 49재 때였다. 더운 날이었는데 절을 하면서 속으로는 ‘언제 끝나나’하는 생각했었다. 그만큼 절하는 게 생소했는데 스님을 만나려면 어쩔 도리가 없어 절을 시작했다.” 3000배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그렇다고 중도에 멈출 수도 없었다. 절하는 것만큼은 그의 아내와 당시 초등학생이던 두 아들이 오히려 그보다 나았다. 아침에 절을 시작했는데 끝나고 나니 해가 지고 있었다. “절을 하면 어떠냐고요? 그건 절을 해본 사람만이 아는거죠. 오직 물을 마신 사람만이 물의 시원함을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시원한 물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처럼, 절 수행은 그의 삶의 일부가 됐다. 지난 32년간 하루도 빼지 않고 절을 올렸다. 성철스님과 약속을 지키는 의미도 컸다. 날마다 500배를 했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야 하는 해외출장이 잡혔을 때는 전날 1000배를 하고 갈 정도였다. 절은 벼랑 끝에선 그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돼주기도 했다. 나라 전체를 휘청거리게 했던 1997년 외환위기는 그에게도 닥쳐왔다. 주변의 여러 기업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을 졸이던 그 때 자금난에 시달리던 화승 역시 부도를 맞았다. 국내 12개 계열사 중 절반을 줄였고, 가족 같은 직원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걱정과 근심으로 몸과 마음이 타들어 갈 듯 고통스러운 그 시기를 현 회장은 절로 이겨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그 때도 믿음이 있었다. 내 뒤에 부처님이 계시고 성철스님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좌절하지 않았다.”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얻은 열매는 달콤했다. 2005년 1월 화승은 7년간의 고난을 이겨내고 모든 채무를 상환하면서 화의에서 벗어났다. 그의 신심이 화승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고희를 넘긴 지금은 매일 새벽4시에 일어나 108배를 하고 능엄신주를 왼다. “체력이 전 같지 않아 108배로 만족하고 있다”는 그는 “절을 할 때 나만 잘되게 해달라고 바라지 않는다”며 “부처님께만 올리는 게 아니라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인연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절로 표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체중생을 위해 기도하라는 스님의 가르침은 그의 아들에게까지 이어졌다. 회사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두 아들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절 수행을 함께 하며 정진하고 있다. 성철스님이 현 회장과 가족들의 삶에 미친 영향은 이처럼 헤아릴 수 없다. 현 회장 역시 스님에게는 각별한 유발상좌였다. 아니 자식에 더 가까웠다. “해인사 백련암 겨울은 노인에게는 너무 춥다”는 성철스님의 말씀을 새겨두었다가, 스님을 위해 부산 금정구 선동에 마련한 정원 ‘화승원’을 수행도량으로 만들 정도로, 극진히 시봉했다. “백련암 겨울바람이 너무 차가워 큰스님 계시기가 수월치 않고, 부산 해월정사라도 나오시는 날에는 도인 스님을 보겠다고 찾아오는 신도들이 너무 많아 쉴 틈이 없었다. 스님이 조용히 수행하고 쉴 수 있는 도량이 필요하다싶어 화승원을 만들었다.” 화승원과 화승원 내 법당인 ‘선열당’이란 당호 모두 성철스님이 직접 지어준 것이다. 성철스님은 입적하기 전까지 약 8년간 백련암과 화승원을 오가며 수행했다고 한다. 성철스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한 화승원은 현 회장에게 특별한 장소이다.
그가 지금껏 소중히 간직해온 스님과 추억이 담긴 앨범 속 사진은 스님이 입적하기 직전인 1993년 화승원에 방문해 찍은 것이다. “8년을 다녀가시면서 단 한 번도 사진을 찍지 않았던 스님이 그해는 웬일로 사진 찍는 걸 허락했다. 덕분에 정원에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세연을 내려놓기 직전에 마음을 써주신 것 같다.” 지금도 그의 집무실 한켠의 액자 속에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손을 꼭 잡고 있는 성철스님과 현 회장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의 아내가 찍은 이 사진을 그는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사진을 찍은 그 해 겨울 스님은 적멸에 들었다. 당시 미국 출장 중이었던 그는 서둘러 귀국해 스님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스님의 빈자리는 너무 컸지만, 스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무명의 파도를 헤쳐 나왔다. 이처럼 성철스님의 큰 그림자는 그의 생 전반에 걸쳐 드리워져 있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동양고무산업의 리더로 출발해 지금은 23개 계열사를 이끄는 화승그룹의 총수가 되기까지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준 것은 불교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현 회장은 그룹에서 덕(德)과 화(和)를 실천했다. 이제 그가 끄는 화승이라는 큰 수레 위에 2400명의 국내노동자와 해외에서 신발제조에 참여하는 2만4000명의 노동자가 올라타 있다. 이들에게 큰 꿈을, 밝은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 현 회장의 역할이다. “아침마다 원을 세운다. 화승이 경제적으로 최고의 기업이 되기보다 진취와 열정, 정직과 성실에서 최고의 기업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이다.” 무한경쟁이 판치는 현대 사회에서 열정과 정직으로 승부하려는 현 회장의 의지는 자못 생소하기까지 하다. 이 또한 그의 믿음에서 비롯됐다. 나만 행복하기보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기업을 만드는 것, 동체대비요 연기인 것이다. ■ 화승그룹은… 르까프 운동화로 더 친근한 화승그룹은 1953년 부산 동양고무공업으로 시작해 올해로 58년을 맞는 중견그룹이다. ‘기차표’ 고무신으로 출발, 1980년대에는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와 리복을 OEM 방식으로 생산했으며, 1987년 자체브랜드인 르까프를 개발했다. 신발사업에서 닦은 화학분야 기술력을 바탕으로 화승그룹은 현재 화승R&A를 중심으로 한 자동차부품, 르까프와 케이스위스(K-Swiss) 아웃도어 시장점유율 1위인 머렐 등 신발, 의류, 스포츠 브랜드, 정밀화학, 종합무역 등 6개 핵심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국내외 23개의 계열사가 있으며, 지난 해 그룹매출이 3조3000억 원을 뛰어 넘었다. [불교신문 2727호/ 6월15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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