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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 자슥, 공부는 언제 … ’ 야단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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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5-08 02:22 조회16,9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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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 ‘이 자슥, 공부는 언제 … ’ 야단칠 것 같아요
[중앙일보] 입력 2011.05.07 02:25 / 수정 2011.05.07 19:26

성철(1912~1993년) 스님 입적까지 모신 원택 20여 년 그 시봉(侍奉)의 인연을 되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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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봄날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 우연히 해인사 백련암(경남 합천)에 가게 됐다. ‘중이 된 대학동기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자’는 좁쌀친구의 청 때문이었다.

청년은 당시 백련암에 있던 큰스님을 만난 김에 좌우명 하나를 달라고 청했다. 스님은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법당에서 1만 배 할 것’을 조건으로 내밀었다. 청년은 1만 배를 채우지 못했지만 ‘속이지 말라’는 좌우명을 받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로 유명한 성철(性徹) 스님(1912~93년), 그리고 입적 당시까지 성철 스님을 20년 넘게 시봉(侍奉)한 원택(圓澤·67) 스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출가 이후 40년째 백련암에 머물고 있는 원택 스님을 j가 만났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성철 스님은 스물아홉 살에 깨달음을 얻었다. 불교계 안팎에서 참선 열심히 하고, 꼿꼿하고 무서운 스님으로 명성이 높았다. 원택 스님보다는 서른두 살 많았다. 이런 어려운 스님을 20년 넘게 모셨으니 얼마나 얘깃거리가 많았을까. 그 이야기를 원택 스님은 2001년에 6개월간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실었다.

●성철 스님 시봉 이야기가 참 인기였습니다.

 “저도 그 덕에 출세를 했죠. 길에 나가면 한참은 알아봤으니까. 서울 가서 지하철 타면 보살님들이 쫓아와가 ‘원택 스님 아니냐’고…. 그것도 1년 지나니까 그만 알아보는 사람 아무도 없고….”(웃음).

 원택 스님은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중·고를 졸업했다. 아버지는 자동차서비스업을 했다. 연세대 정외과(63학번)를 졸업하고 고시공부를 하던 중 백련암에 처음 오게 됐다. 성철 스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다.

●좌우명은 왜 달라 하셨습니까?

 “그분이 얼마나 큰 스님인지 모르고 그저 편한 마음으로 ‘제가 언제 또 와서 스님을 뵙겠습니까. 그러니까 스님 오늘 뵌 기념으로 좌우명 한 말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했던 거죠. 나중에 살면서 보니까 참 불경스러운 말이더라고요.”

 좌우명을 달라는 말에 성철 스님은 ‘절 돈 3000원을 내라’ 했다. 당시 스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3000배를 하게 돼 있었다. 덕망 높은 스님을 뵙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에 스님이 만든 ‘울타리’ 같은 것이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청년은 주머니에서 1000원짜리 세 장을 꺼내 내밀었다. 친구의 친구인 스님이 깜짝 놀라 통역을 했다. 그러자 청년은 “좌우명 딱 한 말씀인데 너무 안 많습니까? 깎아서 백배 하는 것으로 좌우명을 주십시오” 하고 흥정을 시도했다. “너는 3000원으로 안 되겠다, 만원을 내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렇게 받은 좌우명이 ‘속이지 마라’였다.

 청년은 ‘속았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숱하게 들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몇 달 뒤 문득 그것이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메시지였음을 깨달았다. 두어 차례 더 찾아간 청년에게 성철은 “니 중 될래? 내가 아무나 보고 중 되란 소리 안 한다. 스님 한번 돼 봐라” 했다. 며칠 고민한 끝에 청년은 출가해 성철 스님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를 백련암으로 이끈 ‘친구 스님’은 몇 년 뒤 세상으로 돌아갔다. 불교용어로 ‘속퇴(俗退)’를 한 것이다. 일간지 문화부장을 하다 현재 불교신문에서 ‘성철 스님’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이진두 논설위원이다.

htm_2011050611464730003010-002.JPG성철 스님의 옷고름을 바로잡는 상좌 원택 스님.
●성철 스님이 다른 사람에겐 정말 중 되라는 얘기를 안 하셨나요?

 “저한테는 ‘나는 아무나 보고 안 한다’ 하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 돼라’ 자주 말씀하신 것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되게 착각했다’ 생각하게 됐죠.”(웃음)

●원택 스님도 다른 사람에게 "중 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스님살이가 참 힘들다고 생각이 돼서 남에게 권유할 생각이 없어요. 또 ‘내가 스님살이 하니까 정말 중 할 만해’라는 소리를 아직도 못하고 있어요.”(웃음)

 원택 스님이 절집 생활에 익숙해졌을 즈음인 80년 조계종은 이른바 ‘10·27 법난’을 맞았다. 조계종의 25개 본사를 비롯해 규모 있는 사찰에 군 병력이 들이닥쳐 스님들을 연행해 간 사건이었다. 성철 스님은 이런 혼란 속에서 주변의 추대를 뿌리치지 못하고 조계종 종정을 맡았다.

 조계종 종정은 매년 사월초파일을 앞두고 법어를 내놓는다. 온통 한문으로 적어놓은 법어를 성철 스님에게 건네 받은 원택이 반기를 들었다. “불교 최고의 공인이 초파일 왔다고 온 국민에게 기쁨을 전하는데 이래 한문으로 돼 가지고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자 성철 스님은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인마” 하고 되물었다. 원택 스님은 “한글로 쓰십시오”라고 청했다. 다음날 “이라면 되나?” 하고 성철 스님이 법어를 다시 주는데 한문 반, 한글 반이었다.

 “이것도 안 됩니다. 여기 한문도 죄다 한글로 하셔야 합니다.”

 “한문으로 해야 제 맛이 나는 것을, 한글로 어떻게 하냐, 인마.”

 다음날 “이러면 되나?” 하고 다시 내준 법어는 모두 한글이었다. 이후로도 성철 스님은 초파일 법어와 신년 법어를 한글로 냈다.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라는 중국 송나라 때의 법어를 한국 대중이 친숙하게 된 데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그때는 ‘내 말을 받아주셔서 기분 좋네’ 하는 ‘쪼잔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상좌의 말이라 하더라도, 스님 생각하시기에 ‘변해야 된다’ 하면 변해주신 것들이 참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런 수용력을 갖고 계셨다는 것, 지금 와서 보면 스님의 또 다른 한 측면이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철 스님과의 인연이 참 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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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스님하고 인연이 지어져서 다른 데도 안 가고 백련암에서 스님만 모시고 살았으니까요. 강원이나 승가대학도 안 다니고, 선방에도 한 철도 안 나가고 백련암에만 살아서 제 도반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를 지지해 줄 도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제 가장 큰 핸디캡인 셈이죠. 대신 큰스님 말년까지 옆에서 지켜드리면서 스님의 손발이 되어 생활한 사람은 만 몇 천 명 되는 조계종 스님 중에서 나 하나뿐이죠. 이 두 가지가 제 팔자와 운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웃음)

●성철 스님 모시면서 뺨도 여러 번 맞으셨죠?

 “예. 참 엉뚱하고 곤혹스럽게 뺨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스님께 ‘인재 양성하십시오’ 했다가 된통 터졌죠.”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에게 혼난 얘기를 하다가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어려운 주제로 넘어갔다.

 “수행을 하다 깨달을 수 있지만 차차 번뇌망상을 없애가야 한다는 것이 돈오점수의 정신인데, 큰스님께서는 ‘그것은 잘못 안 거다. 깨달았으면 그 순간에 번뇌망상이 다 떨어져야지, 그러지 않았다면 깨달았다는 말도 하지 말라’ 하셨죠. 그러니까 그 차이가 크죠.”

 조계종과 불교학계에서는 전통적으로 ‘돈오점수’ 이론이 더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래서 학술대회에선 ‘성철의 돈오돈수는 틀렸다’는 주장도 거칠게 튀어나오곤 했다. 원택 스님은 그것이 안타까웠다.

 “어느 날 저녁에 안마를 해드리면서 ‘스님, 인재 양성을 하셔야 되겠습디다. 서울 가니까 돈오돈수는 큰스님 혼자만 주장하시고, 다른 노대가들은 다 돈오점수를 지지하는데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했지요. 그랬더니 말도 없이 벌떡 일어서셔서 제 볼에 한 방을 갈기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또 누우시면서 ‘그럼 내가 인재양성을 안 했단 말이가, 이놈아’ 하시고 또 불같이 두어 대를 갈기면서 ‘이놈아, 뭘 할라 하면 내가 시킨 대로 안 하고 다 도망가 버리고, 못 견디고 나가버리고 하는 놈들, 내가 가서 잡아오란 말이가, 어쩌란 말이가 이놈아. 내가 안 키운 게 아니라 다 도망가고 없는 것을 내가 어떻게 인재 양성하느냐 이놈아’ 하셨습니다.”

●그후엔 어떻게 됐습니까?

 “일주일 뒤에 다시 들어가 안마를 해드리는데, 제가 방어동작을 취하면서 조심스럽게 ‘인재 양성이 그리 힘이 드시면, 스님께서 돈오돈수를 주장하시는 옛날 큰스님의 어록을 모아 번역을 하십시다. 역사 속에서 이런저런 큰스님들도 돈오돈수 주장하셨다고 번역을 해놓으면 그게 스님한테 큰 울타리가 안 되겠습니까’ 했지요. 그랬더니 ‘이 자식이! 그거는 말 되네’ 하면서 그날은 따귀가 안 날아오더라고요.”

 성철 스님은 원택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93년 10월 『선림고경총서』를 냈다. 서울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원택 스님만 다녀왔다.

 “평소에는 꾸지람 없으면 그게 칭찬이었습니다. 그때는 ‘출판기념회 잘 마쳤습니다’ 말씀드렸더니 ‘수고했다’고 한마디 칭찬을 해주시더라고요. 책 나오고 한 달이 채 못 돼 입적하셨죠.”

 성철 스님이 원택 스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참선 잘하그래이’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스님에게 가장 뼈아픈 단어가 인재 양성이었지 싶습니다. 당신도 그 어려운 공부를 하시고, 깨달음의 희열을 맛보셨는데, 후계자 중 한 놈이라도 깨달음을 가진 사람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셨겠죠. 그런데 ‘후계자가 아직 없잖아요’라고 제가 노골적으로 아픈 곳을 찔렀던 거죠.”

●성철 스님이 지금 나타나시면 원택 스님에게 뭐라 하실 것 같습니까?

 “ ‘아이구, 이 자슥아! 공부는 언제 하는고’ 하고 타령을 하실 것 같아. (웃음) ‘공부해야지 인마! 바깥일은 다 필요 없는데’ 하시고 야단만 하실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도 성철 스님 유지를 정리하는 일로 바쁘시죠?

 “내년이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이라 스님이 불교에 끼친 영향을 정리하는 학술회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후년은 또 스님 열반 20주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2014년에는 제가 이 세상에 온 지 고희가 됩니다. 그래서 ‘고희 때에는 도를 닦는 진짜 출가를 해봐야지’하고 있는데 사람이 결심해서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참 쉬운 일은 아니죠.”

●지금 성철 스님이 나타나신다면 어떤 말씀을 드리고 싶으세요.

 “마음공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월이 너무 많이 가버려서…. (웃음) 늦었지만 스님이 바라시던 마음공부를 하는 것으로 저도 마무리지어야 스님께 덜 죄송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j 칵테일

법정 스님 “오자(誤字)? 그러니 ‘살 활’자 쓰는 활자(活字)”


원택 스님은 법정 스님(1932~2010년)도 여러 번 만났다. 성철·법정 스님은 1년에 한 번씩은 만나는 사이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성철 스님은 책을 낼 때면 법정 스님에게 윤문(潤文)을 부탁했다. 성철 스님은 “법정이 대한민국에서 글로는 최고 아니가. 가서 윤문을 좀 해달라 부탁을 드려라” 하며 원택 스님에게 원고를 내줬다. 그러면 법정 스님은 “토씨 하나도 다 글 쓴 사람의 성격을 드러낸다. 내가 크게 고치진 않고 최소한으로 그치겠다”며 원고를 받았다 한다.

 한두 달 뒤 책이 나왔다.

 “스님께 갖다 드리니 스님께서 ‘오자(誤字) 없제?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법정 스님도 수십 번 보시고 저도 뒤에 여러 번 봤는데 오자 하나도 없습니다’ 했죠. 두 시간도 못 돼 ‘이놈아, 그래도 오자가 없어’ 하고 책을 집어 던지시는데, 페이지마다 빨간 볼펜으로 오자를 표시해 놓으셨더라고요. ‘제가 볼 때는 없었는데, 웬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웬일은 뭐가 웬일이야, 이놈아’ 하고 화를 내셨어요.”

 다급해진 원택 스님은 법정 스님께 전화를 드렸다. “법정 스님께선 오자 없다고 오케이를 하셨는데 큰스님 보시니까 오자가 몇 자씩 나와가지고 지금 야단 듣고 있는데 이걸 어쩌지요” 물었다.

 그런데 법정 스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러니까 ‘살 활’자를 쓰는 활자(活字)가 아니냐. 책 내면 오자는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고, 내 책도 최소 삼판(三版)은 내야 오자를 다 잡는다. 그렇게 말씀 드려라.”
 
 그렇게 82년 『본지풍광』이라는 책이 나왔다. “성철 스님께서 ‘나는 이제 부처님께 밥값 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물론 나중에 오자를 다 고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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