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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 : 삼각산 도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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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4-18 14:17 조회16,3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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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반 다시 만나 ‘실달학원’ 설립하다 
 
 
삼각산 도선사 (上)
 
 
 
데스크승인 2012.03.02  13:54:36  이진두 | 논설위원   
 
 
 
“10여 년 가까이 마주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단박에 보상이라도 하실 듯 시간마다 함께 하시었고 새로운 종단개혁 구상에 날이 짧았었다. 서울 도선사를 한국 제일의 수행 정진도량으로 변모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무속적인 사찰 모습을 정법 가람으로 변모시키는 일부터 시작한 것이다. 복을 비는 기복이나 삼보를 팔아 장사하는 행위는 불교를 망하게 하는 일이므로 엄하게 금하신 것이다. 보현행원을 실천하고 참회 정진하는 것이 복혜(福慧)를 쌍수(雙修)하는 바른 길이라는 수행 정진의 논리를 정립한 것이다.
그리고 도선사가 한국 제일의 교육도량이 되어야 한다는 원력으로 ‘실달학원(悉達學院)’ 설립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셨다.”(천제스님의 ‘성철종사님 회상기’에서 인용)

1963년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동안거를 지낸 성철스님은 이듬해 성전암을 나왔다. 1964년 하안거를 부산 다대포에서 보내고 그해 동안거를 도선사에서 했다. 스님이 1955년 동안거부터 1963년 동안거까지 ‘동구불출’ 기간을 끝내고 성전암을 떠난 것이다.

철조망을 둘러치고 외부와 연(緣)을 차단하고 지낼 동안 바깥 세간에서 비구ㆍ대처 싸움이라 불리는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이 거세게 벌어졌고 스님이 성전암을 나올 무렵에 마무리 단계에 들 때였다.

‘절집 기왓장 팔아서라도 승려교육 해야 한다‘ 늘 역설

종단개혁 구상에 하루가 짧아

도선사가 한국 제일의 교육도량 돼야한다는 ‘발원’

실달학원 설립으로 ‘실천’

성전암에 들어갈 때 스님은 바깥에 나갈 기약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연으로 성전암을 나오게 됐다.

천제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큰절(파계사) 한송 노스님이 파계사를 수행도량으로 중흥하려는 생각을 더욱 실천에 옮기면서…, 태백산에 계시던 지월(指月)스님(1911~1973)을 모시고 큰절을 선원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옛말이 실감이 간 일로 기억이 된다. 종사님(성철스님)이 혹시나 큰절을 차지할까 싶어 노심초사하던 한송스님의 상좌가 종사님을 모함하는 일에 앞장을 선 것이다. 당시 사소한 감정으로 종사님께 불손한 언행을 하던 모(某) 처사가 합세하여 종사님의 입지를 곤란하게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성전암에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다’느니 하는 허무맹랑한 소문에 도둑이 드는 일까지 일어나고 보니 더 이상 성전암에 머무는 일이 어렵게 된 것이다. 인연이 다해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으로 판단하고 성전암을 떠날 채비를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름을 부산에서 지내기로 하고 무작정 성전암을 떠나게 된 것이다.”

   
성전암을 나온 스님은 당시 동아대 총장의 다대포 별장에 머물다가 여수 흥국사 정수암을 거쳐 도선사에 오게 된 것이다.

“청담스님을 찾아뵙고 사정을 이야기 하였더니 빨리 모시고 오라고 하시었다. 그 말씀에 용기를 얻어 흥국사에 가서 걸망을 챙기고 풍년호 열차편으로 서울에 도착, 날이 저물어 시내에서 쉬고 아침 일찍 도선사에 도착하였다. 청담스님이 너무도 반겨주시어 오히려 늦게 모시고 간 것이 후회될 지경이었다.” (천제스님의 회상기에서 인용)

청담스님과 성철스님, 평생 도반인 두 스님은 이렇게 도선사에서 다시 만났다. 두 스님의 만남은 봉암사 결사정신의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하는 큰 의미를 갖게 한다. 두 스님은 종단개혁에 뜻을 함께 했기에 도선사에서 다시금 그 의지를 펼친 것이다.

성철스님은 늘상 “절집 지붕의 기왓장을 벗겨 팔아서라도 승려교육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도선사 ‘실달학원’ 설립도 그 의미의 실천이었다. 비록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두 스님이 종단개혁과 중흥, 특히 불교정화이후 종단 내 스님들의 교육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너무나 깊이 알고 있었기에 실달학원 설립계획을 세운 것이다.

‘친필 수행 요강’ 보면 출가수행자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케 해

봉암사 결사정신의 불꽃 다시 타오르게 하는 큰 의미

성철스님은 실달학원 수행요강을 직접 정하고 친필로 써 남겼다. 그 친필 기록이 지금 부산 청사포 해월정사 봉훈관 성철스님 친필 봉안실에 있다. 천제스님은 그 친필을 복사하여 자신의 회상기에 적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본다.

실달학원 수행요강(修行要綱)

고불고조(古佛古祖)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하고 숭고무쌍(崇高無雙)한 성교(聖敎)는 실(實)로 우주(宇宙)의 영원(永遠)한 광명(光明)이며 인류(人類)의 만세사표(萬世師表)이시다. 본원(本院)은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이 성교(聖敎)를 수습역행(修習力行)하여 무상대법(無上大法)의 철두철미(徹頭徹尾)한 수호자(守護者) 양성(養成)을 목표(目標)로 한다.

1. 생활기준(生活基準)은 불조유칙(佛祖遺勅)의 최고(最高) 헌장(憲章)인 청규(淸規) 실천(實踐)을 철칙(鐵則)으로 하여 여하(如何)한 개인(個人) 사견(私見)도 단연(斷然)코 용납(容納) 않는다.

2. 반월(半月) 반월(半月) 포살(布薩)을 행(行)한다.

3. 불전(佛前) 의식(儀式)은 조조(早朝) 대능엄주(大嚴呪) 만후(晩後) 대참회(大懺悔)로 한다.

4. 불전(佛前) 헌공(獻供)은 사시(巳時) 이외(以外)는 봉행(奉行)치 않으며 삼보(三寶) 이외(以外)의 예배(禮拜) 공양(供養)은 엄금(嚴禁)한다.

5. 불공(佛供) 기도(祈禱)는 참회(懺悔)로, 영가(靈駕) 천도(薦度)는 전경(轉經)으로 한다.

6. 취침(就寢) 대소변(大小便) 특별(特別) 작무(作務)시 이외는 항상(恒常) 오조(五條)와 직철(直綴)을 착용(着用)하여 외출(外出)시에도 역연(亦然)하다.

7. 직무(職務)이외의 출산(出山)은 일체(一切) 불허(不許)한다. 단(但) 생명적(生命的) 관계(關係)의 특수사항(特殊事項)으로 원규(院規)에 의(依)하여 특허(特許)를 득(得)한 자(者)는 제외(除外)한다.

8. 식사시(食事時) 급(及) 일상행동(日常行動)은 청규(淸規) 중 일용잡범(日用雜範)에 의한다.

9. 좌선(坐禪) 급(及) 독경(讀經) 과정(過程)은 원규(院規)에 의(依)하여 행(行)한다.

10. 시물(施物)은 공적(公的) 헌납(獻納)에 한(限)하고 개인(個人) 거래(去來)는 일체(一切) 불허(不許)한다.

11. 기타(其他) 세칙(細則)은 청규(淸規)의 각 장(各章)에 의(依)한다.

년(年) 월(月) 일(日)

실달학원(悉達學院) 원장(院長) 백(白)

이제 보면 스님의 수행요강은 한문투의 문장이어서 찬찬히 보면 출가수행자의 정신이 어떠해야 함을 새삼 일깨우게 했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성불을 위하여 일체를 희생한다

억천만겁토록 생사고해(生死苦海)를 헤매다가 어려운 일 가운데도 사람 몸을 받고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꼬.’

철석같은 의지, 서릿발 같은 결심으로 혼자서 만 사람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듯,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마침내 물러서지 않는다는 각오가 서야만 한다.

오직 영원한 해탈, 즉 ‘성불을 위하여 일체를 희생한다’는 굳은 결의로써 정진하면 결정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불교신문 2796호/ 3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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