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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 ④ 선찰대본산 범어사ㆍ내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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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4-18 09:16 조회17,1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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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선찰대본산 범어사ㆍ내원암

거침없는 ‘운수납자’ ‘괴각쟁이’ 일화 남겨

범어사 일주문. 선찰대본산 범어사의 사격(寺格)을 드러낸다.

성철스님은 1936년 3월 해인사에서 득도 후 범어사에 와서 그해 하안거를 금어선원에서, 동안거를 원효암에서 했다. 1937년 3월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아 지닌 스님은 그해 원효암에서 하안거를 하고 1938년엔 내원암에서 하안거를 했다. 스님의 일생에서 범어사에 머무른 시기는 이때뿐이다.

은사 동산스님은 평생 범어사를 당신의 주석처(住錫處)로 삼은 데 비해 상좌인 성철스님이 범어사에 주석한 시기는 운수납자 시절이 전부다. 훗날 종단의 어른이 되고나서도 스님은 범어사에는 주석하지 않았다.

스승이 계신 곳에 제자가 함께 있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그러나 스님의 이런 행적은 언뜻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필자가 해인사 백련암에 있을 때 스님은 당신이 범어사에 머무르지 않은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거기는 내하고 안 맞아. 물이 안 맞아서 안 갔어” 라고.

물이 맞지 않아서 가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의 건강을 헤아리면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산은 제각기 독특한 물을 지닌다. 그 산에서 솟는 물의 성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건강에 각별히 유의해야 할 사람은 물을 가리게 마련이다. 성철스님이 범어사에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건강상 물 때문이라는 당신의 말씀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나 하고 짚이는 점이 없지 않으나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범어사의 상징인 일주문. 4개의 돌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일주문은 기둥 사이 3개의 문 중앙엔 조계문(曹溪門), 오른쪽에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왼쪽에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금정산에 자리한, 참선수행도량의 으뜸가는 절이라는 표시다.

범어사 내원암. ‘제일선원’의 현판이 말해주듯 역대 고승들의 참선 수행처로 유명하다.

범어사.금어선원서

사미.비구계 수지

내원암에서 하안거

“한국 고승 가운데

전라도 출신 누군가”

손상좌 ‘철스님’ 질문에

용성스님은 “… ”

범어사는 선찰대본산이라 내건만큼 참선도량으로서의 사격(寺格)을 크게 드러낸다. 범어사의 큰 절 선원인 금어선원(金魚禪院)은 지금의 관음전 자리에 있었는데 1968년 청풍당(淸風堂)을 헐고 이전, 신축하였다.

청풍당은 1613년 묘전스님이 창건한 선원이다. 금어선원의 크기는 앞면 6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범어사가 선찰대본산으로 선풍을 크게 드날리게 된 것은 오성월스님의 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월스님(性月, 1871~1943)은 범어사 주지로 있으면서 전각을 중건하고 선원을 창건하여 절이 선찰(禪刹)로 거듭나는데 크게 공헌했다.

성월스님은 경남 양산 출생으로 15세에 출가, 20세까지 여러 경전을 공부한 후 범어사 계명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참선수행에 전념했다. 이후 주지를 맡아 1910년까지 산내 여러 선원을 개설했다. 1899년 10월 금강암 선원을 시작으로 1900년 10월에 안양암, 1902년 4월에 계명암, 1906년 6월에 원효암, 1909년 1월에 안심료와 승당 그리고 1910년 10월에 대성암 등에 선원과 선회(禪會)를 창설하여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스님의 이러한 노력은 경허스님(鏡虛, 1849~1912)의 선종결사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경허스님은 1900년 범어사 결사이후 통도사 화엄사 송광사 등에 선원을 복원하고 선수행을 이끌었다.

성철스님이 수행한 내원암은 일주문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아 개울 옆 산길로 약 1.5킬로미터(km) 올라간다. 중간에 청련암을 지난다. 내원암은 ‘제일선원’이라 일컫고 있다. 근ㆍ현대 고승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도량이다. 지금은 범어사 어른이신 능가(能嘉)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성철스님이 내원암에서 정진할 때 백용성스님(1864~1940)이 계셨다. 용성스님은 동산스님의 은사다. 성철스님은 용성스님에게는 손상좌다. 용성-동산-성철, 이렇듯 3대가 된다. 스님이 내원암에서 정진할 시절의 일화를 흥교스님(興敎, 범어사 전계대화상)은 이렇게 들려주었다.

“성철스님이 용성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한국의 고승 가운데 전라도 출신이 누구 누구입니까? ○○스님이 전라도입니까? ○○스님이 전라도입니까? 유명한 스님 중에 전라도 스님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했다.

금어선원. 범어사 큰 절 선원으로 1968년 이전 신축했다. 성철스님은 득도 후 첫 하안거를 이곳에서 났다.

용성스님은 성철스님의 이 말에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철 수좌가 잘 모르는 말일세. 들어보시게. ○○스님도 전라도고 ○○스님도 전라도 아닌가. 그리고 나도 전라도지.’

성철스님은 용성스님이 전라도 출신임을 뻔히 알면서 던진 질문이고 용성스님도 성철스님의 말밑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 답한 말이다.

성철스님은 이어서 전라도 비하 발언을 직절적으로 용성스님에게 했다. 용성스님의 이에 대응한 말은 ‘그게 다인가. 내 말 더 들어보시게. 스승과 상좌가 있었네. 상좌가 아플 때 스승이 약을 지어 주었지. 상좌가 병이 낫자 스승은 상좌에게 약값 내놓으라고 했지. 또 있어. 스승이 차고 있는 주머니가 하도 예쁘기에 상좌가 갖고 싶어 했어. 스승은 상좌에게 주머니를 사라고 했지. 주머니를 상좌에게 팔고 돈을 받았지. 그런데 이보시게. 스승이 받은 약값이나 주머니값을 나중에 상좌가 알고 보니 시중가격보다 3배나 비싸더라는 거야. 스승은 그렇게 상좌에게 3배나 더 받은 거지.’ 그런 스승과 제자 모두 전라도야.”

흥교스님은 이 일화를 들려주면서 덧붙였다. “성철 사형님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흥교 니도 전라도제. 공부 열심히 하거래이’ 하셨어.”

스님의 행적을 좇다보면 스님을 일컫는 말에 ‘철 수좌’ ‘괴각쟁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철 수좌’는 성철이란 이름을 줄인 말이고 ‘괴각쟁이’라는 말은 스님의 성정(性情)을 일컫는 말이다.

‘괴각(乖覺)’은 사전의 풀이에 따르면 ‘재주가 있고 총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절집에서는 특히 선객(禪客) 사이에서는 이 밀을 다르게 쓴다. 성질이 괴팍스러운 사람을 일컫는다. 절집 이야기 속의 괴각에 대한 풀이는 인습과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엉뚱스러우면서도 밉상이 아닌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언행은 한참 웃다가도 뒤통수를 한방 맞은 듯한 여운을 갖는다.

성철스님의 수행시절 여러 일화는 ‘괴각쟁이’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거침없고 당당하고 호호탕탕(浩浩蕩蕩)하다. 출가시(出家詩)에서 밝혔듯 ‘초연히 홀로 만고의 진리를 향해 가겠다’는 의지의 일관된 모습이라 하겠다.

이진두 논설위원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713호/ 4월20일자]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아라 -

6.25 한국전쟁때 서울대에서 교수하던 문 박사라고 하는 이가 성철스님을 찾아와 나눈 대화다.

“스님네는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서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 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형제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자 입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당신 여태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한 것이야. 내 부모 내 형제는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오직 큰 가족인 일체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당신 말처럼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철두철미한 개인주의자 아닌가?”

“스님 해석이 퍽 진보적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에 모두 그렇게 쓰여 있어. ‘남을 위해서 살아라’하고.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고.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야.”

“…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릴 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 1981년 6월 방장 법어에서 -

2011-04-16 오전 10:07:33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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