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이 오고 있었다. 해인성지(海印聖地), 가야산에 들었다. 남쪽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참사에 깊은 산사도 슬픔에 잠겨 있었다. 해인사 대적광전에서는 실종 승객의 생환을 기원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목탁소리가 법당 아래 연등으로 떨어졌다. 가야산 연봉들이 바다로 달려가고, 저 연등이 바닷속을 비춘다면 봄처럼 화사했던 우리 아이들을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
백련암(감원 원택 스님)으로 올라갔다. 가야산에서 가장 높은 암자 백련암은 가야산 제일의 절승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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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蓮庵’이라 쓰인 절 대문이 높이 달려있다. 세월이 곱게 눌어붙은 돌계단은 단숨에 오르기 아깝다. |
홀연 나타난 백련암은 단아하고 고요했다. ‘白蓮庵’이라 쓰인 절 대문이 높이 달려있다. 세월이 곱게 눌어붙은 돌계단은 단숨에 오르기 아깝다. 절로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이다. 다른 절과는 달리 연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백련암에서 26년 동안 주석했던 성철 스님은 연등 다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그 뜻을 받들어 백련암에는 연등이 없다. 대신 꽃들이 피어 있었다. 절 입구에서는 목련이 큼지막한 웃음을 막 터뜨리고 있었다. 뒷산에는 산벚꽃이 생글거리고 있었다. 담장 아래 여기저기서 제비꽃이 지저귀고 있었다. 저 아래 초여름 속에 있다가 백련암 봄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문득 절 대문에서 돌아보니 가야산은 온통 새잎이다. 원택 스님 말대로 초록은 동색이 아니라 만색(萬色)이었다.
해인성지 가야산 가장 높은 곳
선종의 기운들이 뭉져 있는 절
한국불교 깨우는 상징 ‘불면석’
산 아래 세속 굽어보는 부처님
26년간 주석한 선승 성철 스님
찾아온 대중마다 3000배 일갈
스스로 자신의 교만 보라는 뜻
남 위한 기도 강조했던 큰 스승
성철 스님 시봉하는 원택 스님
사후 20년 지나도 모시고 있어
여생을 스승의 가르침 전하며
겁외사·사리탑 등 건립 불사
경내에 들어서자 우람한 바위가 서있다. 실눈을 뜨고 산 아래를 굽어보는 백련암의 상징, 불면석(佛面石)이다. 백련암 뒷산에는 9개의 골짜기가 있고 골마다 용이 있었는데 구룡의 기운이 흘러내려와 한데 뭉쳐 있는 곳에 불면석이 서 있다고 한다. 원택 스님은 여의주 혈(穴) 자리라고 했다. 성철 스님이 1967년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하면서 백련암은 늘 깨어 있었다. 선종의 기운이 뭉쳐있었으니 백련암은 한국불교를 깨우는 불면석(不眠石)이었다. 성철 큰스님이 있어서 작지만 가장 큰 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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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눈을 뜨고 산 아래를 굽어보는 백련암의 상징, 불면석(佛面石)이다. 백련암 뒷산에는 9개의 골짜기가 있고 골마다 용이 있었는데 구룡의 기운이 흘러내려와 한데 뭉쳐 있는 곳에 불면석이 서 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이 1967년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하면서 백련암은 늘 깨어 있었다. 선종의 기운이 뭉쳐있었으니 백련암은 한국불교를 깨우는 불면석(不眠石)이었다. |
백련암에서 한 밤을 묵었다. 법당에서는 보살 몇이서 3000배를 하고 있었다. 봄 밤 소쩍새울음을 기다리자니 온갖 새 울음이 쏟아져 들어와 선잠을 쪼아댔다. 풍경이 울리면 마음 하나를 꺼내 보았다. 성철 스님은 이곳에서 어떤 눈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성철 스님이 시킨 3000배는 절 어디에 쌓여있을까.
성철 스님은 청정비구의 외길을 걸어간 수행승이었다.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진정한 무소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봉암사 결사를 통해 조사들이 걸었던 옛길을 찾아냈다. 10년 장좌불와(長坐不臥)에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은 어찌 보면 가야산 백련암에서의 무량불사를 위한 수행이었다. 서릿발 같은 가르침은 자신에게 엄격했음이었다. 사람들은 스님을 ‘가야산 호랑이’라고 불렀다.
백련암에 뇌성이 으르렁거려도 사람들은 말씀을 얻겠다고 기어 올라왔다. 스님은 누구를 막론하고 3000배를 시켰다. 감투와 돈 보따리는 가야산 소나무에 걸쳐두고 몸만 올라오라 했다. 나를 보지 말고 부처를 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렀다. 3000배를 하고난 사람은 달라졌다. 절을 마치면 비로소 자신의 교만과 위선이 보였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사람이 사람으로 돌아왔다.
큰스님은 백련암을 떠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큰절(해인사)에 왔어도 내려가지 않았고, 종정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광장집회를 의식하여 불교도 광장법회를 하겠다며 제발 얼굴만 비춰 달라 간청해도 이를 일축했다.
하지만 산중에 있음이 만 리 밖에 있음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했다. 3000배를 시키며 산승으로 있음이 불교의 때를 벗기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아무리 나오라고 해도 나가지 않자 모든 관심이 백련암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세상이 작은 절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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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불교의 스승이었던 성철 스님이 계셨던 염화실을 이제는 원택 스님이 지키고 있다. |
원택 스님은 1972년부터 성철 스님을 모셨다. 스님을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1971년 3월 속인 여무의는 친구를 따라 ‘유명하다는 스님이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호기심에 해인사 백련암을 찾았다. 형형한 눈빛에 주눅이 들었지만 평생 지닐 말씀을 받겠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성철 스님은 누구에게 그랬듯이 3000배를 하고 오라 했다. 무의는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절을 마쳤다. 그러자 스님이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속이지 마라! 이 한마디 해주고 싶다.”
큰스님이 내린 좌우명이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속이지 마라’는 큰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남이 아닌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 아닌가. 이듬해 정초 자석처럼 끌려 백련암을 찾았다. 무의에게 스님이 말했다.
“이 놈아, 나이 서른이 다 돼서 세상에서 뭐 할거고. 세상살이가 좋은지 백련암에서 참선 잘해 도 닦는 것이 좋은지 잘 생각해봐라.”
마침내 무의는 백련암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생활을 마치자 스님은 원택이란 법명을 내렸다. 원택은 성철 스님 곁을 지키며 백련암을 떠나지 않았다. 성철 스님에게 원택은 “희한한 놈”이며 “미련한 곰새끼”였다. 숱하게 구박을 받았다. 큰스님은 혀를 찼다.
“곰새끼들아, 너희들 나 없으면 굶어죽을끼다.”
욕을 먹고 매를 맞아도 스님은 가야산처럼 듬직했다. 스님 말만 따르면 편했다. 원택 스님은 큰스님의 열반을 지켜드렸다. 스님은 팔십 평생을 걸치고 다니던 육신을 상좌 원택에게 맡겼다. 제자의 품에 안긴 스님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1993년 11월4일 아침, 참선 잘하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갔다. 아무리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지만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돌아보면 스님은 계시기만 해도 힘이었다. 계실 때 20년을 모셨고 떠난 후에도 20년 넘게 스님을 모시고 있다.
성철 스님이 계셨던 염화실을 이제는 원택 스님이 지키고 있다. 큰스님의 사상과 행적을 이리 고르고 저리 묶어서 세상에 내놓았다. ‘성철 스님이 말씀하시기를…’은 거의 원택 스님이 정리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부처 곁에 아난이 있음을 비유하며 ‘원택이 있기에 성철 큰스님이 있었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이 서운하고도 야속하다. 성철 큰스님은 그렇게 포장해야할 만큼 작은 어른이 아니었다. 아무나 깨쳤다고 말하는 미혹의 시대에 진정한 깨침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스승이었다. 한국불교에서 삿된 믿음을 걷어냈다. ‘자기 집의 무진장 보화를 버리고 집집마다 밥그릇 들고 거지노릇을 하는’ 절집들을 주장자를 내리치며 꾸짖었다.
성철 스님의 깨침이 있었기에 저 작은 선방에서 푸른 눈의 수좌들이 환희심을 내며 오늘도 용맹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성철 스님의 참선수행은 긍정의 에너지로 변하여 우리 산하를 적시었다. 이것이 진정한 불생불멸 아니던가. 제자인 원택 스님은 이를 알고 있다. 그런 성철 스님의 생과 사상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자신이 참으로 못났다고 생각했다. 삶 자체가 커다란 울림인데도 첨단시대라는 요즘 영상물 하나 변변히 남겨드리지 못했다.
성철 스님이 떠난 후 백련암은 그 풍경이 달라졌다. 석축을 쌓아서 마당을 넓혔고 법당과 고심원(古心院)을 새로 지었다. 스님이 끔찍이 아낀 불서들을 ‘모시기’ 위해 고심원을 지었지만 스님이 떠나자 결국 법당 겸 성철 스님의 기념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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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철 스님이 아낀 불서들을 ‘모시기’ 위해 고심원(古心院)을 지었지만 스님이 떠나자 법당 겸 기념관이 되었다. |
고심원에는 스님의 존상을 모셔놓았고 아래층에는 서책들을 보관하고 있다. 견성하고 열반했으니 스님에게는 ‘고름 묻은 휴지조각’에 불과하겠지만 후학들에게는 여전히 깨침을 안내하는 소중한 노정기(路程記)가 될 것이다. 이제는 이 불서들을 더 많은 선객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쩌면 백련암을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원택 스님은 큰스님을 모셨다는 보람이 하늘만큼 크지만 지난 백련암의 시간들을 뒤적이면 외로움도 묻어나온다. 성철 스님만 지성으로 섬겼지 제대로 공부를 못했고, 그래서 도반 또한 많지 않다. 돌아보니 성철 스님만 있고 원택 스님 자신은 없었다. 스님이 곁에 계실 때에는 욕먹고 혼나면서도 말씀만 따르면 됐지만 스님 가신 후로는 홀로 그 뜻을 헤아려야 하니 어렵고 힘들다. 그럴수록 떠난 스님이 그립다. 이제 홀로 묻고 홀로 답해야 한다.
‘스님 어찌해야 합니까? 이 일을.’
‘스님 어떠십니까? 제가 한 일이.’
그러면서 간혹 큰스님의 뜻을 거스르기도 한다. 절대 단청을 하지 말라 했지만 백련암 법당에 색을 칠했다. 스님의 산청 묵곡리 생가에 불필 스님과 함께 겁외사를 세웠다. 큰스님은 출가 후에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곳에 절을 지었다. 또 해인사 입구에 사리탑을 건립했다. 성철 스님은 평소에 “사리가 무엇이 중하냐”며 재를 뒤적이는 이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제자 원택 스님은 알고 있었다. 도반인 자운 스님이 입적하고 다비 후에 나온 사리를 바라보더니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자운인가. 사리가 이리 나왔으니 얼마나 좋은가.”
원택 스님은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사리탑 건립을 밀어붙였다. 청정비구의 삶을 원(圓)이란 형태로 나타내어 선(禪)과 참배의 공간으로 조성했지만 스님이 꾸짖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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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반 자운 스님의 사리를 본 성철 스님의 모습을 원택 스님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사리탑을 건립했다. 청정비구의 삶을 원(圓)이란 형태로 나타내어 선(禪)과 참배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
백련암을 내려와 성철 스님 사리탑 앞에서 손을 모았다. 먼 바다에 우리 아이들이 갇혀있는데 물 위에서는 더없이 추한 인간들이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다. 성철 스님이 “무엇이 너희의 본래 모습이냐”고 묻고 있었다.
백련암에서는 개인의 축원은 해주지 않는다. ‘자기 공덕은 자기가 쌓아야 한다. 자기 기도는 자기가 해야 한다’는 성철 스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 큰스님은 ‘아비라 기도가 끊이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1년에 네 번 1, 4, 7, 10월에 아비라 기도를 하고 있다. 수백명이 모여 기도를 올리면 백련암은 살아서 펄떡거린다. 향보다 땀 냄새가 진동하지만 3000배가 끝나면 환희가 넘실댄다. 큰스님 열반 후 아비라 기도를 드리면 백련암에 방광이 일어났다. 오렌지색 둥근 불빛이 백련암에서 피어올라 큰절 퇴설당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백련암으로 올라왔다. 가야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큰스님 떠난 후 5년 동안 계속 방광을 목격했다.
백련암에는 3000배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결국 3000배는 미련한 곰새끼들을 위해 성철 스님이 남긴 양식이었다.
백련암에는 원택 스님이 지금도 성철 스님을 ‘시봉’하고 있다.
김택근 본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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