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 (27) 운달산 김룡사(상)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4-18 14:24 조회16,266회 댓글0건본문
첫 회상 열고 ‘성철사상 초전법륜’ 펼치다
(27) 운달산 김룡사 (上)
데스크승인 2012.04.04 18:06:44 이진두 | 논설위원
1965년 성철스님은 경북 운달산(雲達山) 김룡사(金龍寺)에 머물렀다. 김룡사는 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룡리에 있는 절이다. 사람들은 ‘점촌 김룡사’라 부르는데 익숙해 있다. 스님은 이곳 김룡사에서 한 해를 보내고 1966년 가을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겼다.
스님의 김룡사 주석(住錫)은 비록 1년에 지나지 않지만 이 기간은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스님은 대중회상을 처음으로 마련했고 사부대중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첫 설법을 했다. 운달산 김룡사는 이른바 첫 ‘성철회상’이었고 ‘성철사상의 초전법륜지’이다.
스님은 김룡사에 머물기 전까지는 은거생활을 했고 그러기에 시봉 몇 명만 데리고 지냈다. 그러던 스님이 큰 절을 마련, 주석처로 삼고 사부대중에게 절문을 활짝 열고, 게다가 스스로 집대성한 불교의 중도사상을 널리 펴는 법석을 펼쳤으니 일생에 획기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일반 대중에게 절문 활짝 열고
집대성한 불교 중도사상
널리 펼친 ‘역사적 도량’
1965년 여름, 스님은 대불련 구도부원 10여명에게 한번에 3000배를 시키고 며칠간 법문한데 이어 동안거에는 사부대중을 대상으로 사자후를 토했다. 구도부원들도 학생신분을 잠시 접고 출가수행자로서 대중 스님들과 일과를 함께 했다.
“당시 김룡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주거하고 있었으나 사찰의 규모가 커서 운영하는데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산내 암자인 양진암(養眞庵)에는 묘전(妙典)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묘전스님은 묘엄(妙嚴)스님의 사형으로 성철 종사님을 받드는 일에 헌신하신 분이다.
현경(玄鏡, 입적, 전 해인사 주지)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김룡사에서 사무를 도운 일이 있어서, 이러한 김룡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묘전스님의 안내로 성철 종사님을 뵙게 된 분이다. 묘전스님과 현경스님의 인연으로 김룡사가 은사 스님을 모시고 대중회상을 이루는데 적합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1965년 여름 대불련 구도부
3000배시키고 며칠간 법문
동안거엔 사부대중 대상 사자후
… 주지로 모실 분을 물색하던 중 석호(石虎, 서옹 전 조계종 종정)스님이 적임이라 생각하고 부탁을 하게 되었고 쾌히 승낙을 하시어 사무절차를 밟아 입주하게 되었다.”
성철스님이 김룡사에 주석하게 된 연유를 밝힌 천제스님의 글이다.
“김룡사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점촌읍이었다. 생필품은 점촌읍에서 구입했다. 지금은 도로가 포장되어 교통이 편해졌지만 근 50년 전의 김룡사는 오지(奧地) 중의 오지였다”고 천제스님은 말한다.
주지로 모신 석호스님은 명의만 빌렸고 도성(道成, 부산 태종사 회주)스님이 총무 직책을, 현경스님이 재무직을 그리고 천제스님이 회계직을 맡아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고 한다.
당시 절 주변에는 숙박할 만한 시설이 없었으므로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을 절에서 수용했다. 쌀 한 됫박을 들고 온 초ㆍ중학생들에게 저녁과 아침을 준비하는 일이 대단히 힘들었단다. 수백 명의 밥, 그것도 돌이 많이 섞여 있는 쌀을 일고 밥을 짓는 일은 참으로 고행이었단다.
그래서 천제스님은, 당시 불평 한 마디 없이 원주를 맡았던 도선(道善)스님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낮에는 설해목(雪害木)을 베어다 땔감을 준비하고 밤에는 참선, 독경하는 신심어린 정진의 나날이었다고 회상한다.
여름에는 논농사도 대중이 직접 지었단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청규를 실천하는 성철스님의 엄한 가르침을 따라 대중스님들은 그렇게 정진했다.
김룡사는 지금은 직지사 말사이지만 1911년에는 전국 30개 대사찰의 하나였다. 신라 진평왕 10년(서기 588년)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했고 이때 이름은 운봉사(雲峯寺)라 했다. 운봉사의 위치는 운달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었던 금선대(金仙臺)라는 암자 자리로서 지금이 위치와는 달랐다고 한다.
서옹-주지, 도성-총무, 현경-재무
천제스님-회계 등 소임 맡아
‘일일부작 일일불식’ 정진
이처럼 절 이름도 다르고 위치도 틀리지만 김룡사의 전신은 운봉사였다고 사적기는 전한다. 어느 시기인가 산 정상 부근의 운봉사는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는데 1904년까지도 운봉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하다.
김룡사에 절 이름과 연관하여 전해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조선 후기 문경 부사(府使) 김 씨가 산중에 은거하며 불공을 드렸다. 처음에는 딸을, 두 번째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용(龍)이라고 했고, 그 이후로 가문이 더욱 번창했다. 그가 불공을 올리던 곳을 김룡동이라 하였고 인근에 있던 운봉사를 김룡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죄를 짓고 운봉산 아래에 숨어 살았다. 매일 불전에 나아가 죄를 참회하였는데 어느 날 용녀(龍女)와 혼인하여 아들은 낳았고 이름을 용(龍)이라 지었다. 이후 김 씨의 가문은 크게 번성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김장자(金長子)라 불렀다. 이로 인해 마을 이름도 김룡리로 바꿨고 운봉사도 김룡사로 고쳤다고 한다.
그 외에 금선대의 금(金)자와 용소폭포의 용(龍)자를 따서 금룡사라 했다는 설도 있다(사찰문화원 간행 ‘전통사찰총서17-김룡사’ 편).
퇴경당 권상로 박사 사적비
석조 사천왕상, 약사여래불 등
정갈한 풍경 참배객 발길 이끌어
김룡사는 창건이후 역사가 오랜 동안 공백으로 남았다가 조선후기에 들어 중창과 중건의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1997년에는 큰 화재가 있어 전각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복원하여 옛날의 큰절 모습 그대로다.
1987년에는 근대 한국불교의 석학 퇴경당(退耕堂) 권상로(權相老) 대종사의 사적비(事蹟碑)를 그의 21주기(周忌)를 맞아 세웠다. 일주문을 지나 법당으로 향해 얼마 안가서 오른편에 세워진 이 비는 권상로 박사의 인연을 참배객에게 알리고 있다.
김룡사의 볼거리 중 하나는 사천왕상을 돌로 조성하여 모신 것이다. 또한 불기2533년(서기 1989년)에 이운(移運)하여 모신 약사여래불은 그 친근감을 갖게 하는 상호(相好)가 인상적이었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염(念)하는 스님의 목탁소리와 낮고 간절한 음성이 주변의 고요를 더하고 있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한적하고 정갈한 산중 풍경은 찾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씻겨주었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지식만능은 물질만능 못지않게 큰 병폐다
‘지식만능은 물질만능 못지않게 큰 병폐입니다. 인간 본질을 떠난 지식과 학문은 깨끗하고 순진한 인간 본래의 마음을 더렵혀서 인간을 타락시키기 일쑤입니다.
인간의 본래마음은 허공보다 깨끗하여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나 진면목을 발휘하려면 삿된 지식과 학문을 크게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보물도 깨끗한 거울 위에서는 장애가 됩니다. 거울 위에 먼지가 쌓일수록 거울이 더 어두워짐과 같이 지식과 학문이 쌓일수록 마음의 눈은 더욱 더 어두워집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을 가리는 삿된 지식과 학문을 아낌없이 버리고 허공보다 깨끗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이 광명을 뚜렷이 바로 봅시다.
- 1984년 신년법어 중에서
[불교신문 2806호/ 4월7일자]
(27) 운달산 김룡사 (上)
데스크승인 2012.04.04 18:06:44 이진두 | 논설위원
1965년 성철스님은 경북 운달산(雲達山) 김룡사(金龍寺)에 머물렀다. 김룡사는 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룡리에 있는 절이다. 사람들은 ‘점촌 김룡사’라 부르는데 익숙해 있다. 스님은 이곳 김룡사에서 한 해를 보내고 1966년 가을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겼다.
스님의 김룡사 주석(住錫)은 비록 1년에 지나지 않지만 이 기간은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스님은 대중회상을 처음으로 마련했고 사부대중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첫 설법을 했다. 운달산 김룡사는 이른바 첫 ‘성철회상’이었고 ‘성철사상의 초전법륜지’이다.
스님은 김룡사에 머물기 전까지는 은거생활을 했고 그러기에 시봉 몇 명만 데리고 지냈다. 그러던 스님이 큰 절을 마련, 주석처로 삼고 사부대중에게 절문을 활짝 열고, 게다가 스스로 집대성한 불교의 중도사상을 널리 펴는 법석을 펼쳤으니 일생에 획기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일반 대중에게 절문 활짝 열고
집대성한 불교 중도사상
널리 펼친 ‘역사적 도량’
1965년 여름, 스님은 대불련 구도부원 10여명에게 한번에 3000배를 시키고 며칠간 법문한데 이어 동안거에는 사부대중을 대상으로 사자후를 토했다. 구도부원들도 학생신분을 잠시 접고 출가수행자로서 대중 스님들과 일과를 함께 했다.
“당시 김룡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주거하고 있었으나 사찰의 규모가 커서 운영하는데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산내 암자인 양진암(養眞庵)에는 묘전(妙典)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묘전스님은 묘엄(妙嚴)스님의 사형으로 성철 종사님을 받드는 일에 헌신하신 분이다.
현경(玄鏡, 입적, 전 해인사 주지)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김룡사에서 사무를 도운 일이 있어서, 이러한 김룡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묘전스님의 안내로 성철 종사님을 뵙게 된 분이다. 묘전스님과 현경스님의 인연으로 김룡사가 은사 스님을 모시고 대중회상을 이루는데 적합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1965년 여름 대불련 구도부
3000배시키고 며칠간 법문
동안거엔 사부대중 대상 사자후
… 주지로 모실 분을 물색하던 중 석호(石虎, 서옹 전 조계종 종정)스님이 적임이라 생각하고 부탁을 하게 되었고 쾌히 승낙을 하시어 사무절차를 밟아 입주하게 되었다.”
성철스님이 김룡사에 주석하게 된 연유를 밝힌 천제스님의 글이다.
“김룡사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점촌읍이었다. 생필품은 점촌읍에서 구입했다. 지금은 도로가 포장되어 교통이 편해졌지만 근 50년 전의 김룡사는 오지(奧地) 중의 오지였다”고 천제스님은 말한다.
주지로 모신 석호스님은 명의만 빌렸고 도성(道成, 부산 태종사 회주)스님이 총무 직책을, 현경스님이 재무직을 그리고 천제스님이 회계직을 맡아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고 한다.
당시 절 주변에는 숙박할 만한 시설이 없었으므로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을 절에서 수용했다. 쌀 한 됫박을 들고 온 초ㆍ중학생들에게 저녁과 아침을 준비하는 일이 대단히 힘들었단다. 수백 명의 밥, 그것도 돌이 많이 섞여 있는 쌀을 일고 밥을 짓는 일은 참으로 고행이었단다.
그래서 천제스님은, 당시 불평 한 마디 없이 원주를 맡았던 도선(道善)스님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낮에는 설해목(雪害木)을 베어다 땔감을 준비하고 밤에는 참선, 독경하는 신심어린 정진의 나날이었다고 회상한다.
여름에는 논농사도 대중이 직접 지었단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청규를 실천하는 성철스님의 엄한 가르침을 따라 대중스님들은 그렇게 정진했다.
김룡사는 지금은 직지사 말사이지만 1911년에는 전국 30개 대사찰의 하나였다. 신라 진평왕 10년(서기 588년)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했고 이때 이름은 운봉사(雲峯寺)라 했다. 운봉사의 위치는 운달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었던 금선대(金仙臺)라는 암자 자리로서 지금이 위치와는 달랐다고 한다.
서옹-주지, 도성-총무, 현경-재무
천제스님-회계 등 소임 맡아
‘일일부작 일일불식’ 정진
이처럼 절 이름도 다르고 위치도 틀리지만 김룡사의 전신은 운봉사였다고 사적기는 전한다. 어느 시기인가 산 정상 부근의 운봉사는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는데 1904년까지도 운봉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하다.
김룡사에 절 이름과 연관하여 전해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조선 후기 문경 부사(府使) 김 씨가 산중에 은거하며 불공을 드렸다. 처음에는 딸을, 두 번째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용(龍)이라고 했고, 그 이후로 가문이 더욱 번창했다. 그가 불공을 올리던 곳을 김룡동이라 하였고 인근에 있던 운봉사를 김룡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죄를 짓고 운봉산 아래에 숨어 살았다. 매일 불전에 나아가 죄를 참회하였는데 어느 날 용녀(龍女)와 혼인하여 아들은 낳았고 이름을 용(龍)이라 지었다. 이후 김 씨의 가문은 크게 번성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김장자(金長子)라 불렀다. 이로 인해 마을 이름도 김룡리로 바꿨고 운봉사도 김룡사로 고쳤다고 한다.
그 외에 금선대의 금(金)자와 용소폭포의 용(龍)자를 따서 금룡사라 했다는 설도 있다(사찰문화원 간행 ‘전통사찰총서17-김룡사’ 편).
퇴경당 권상로 박사 사적비
석조 사천왕상, 약사여래불 등
정갈한 풍경 참배객 발길 이끌어
김룡사는 창건이후 역사가 오랜 동안 공백으로 남았다가 조선후기에 들어 중창과 중건의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1997년에는 큰 화재가 있어 전각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복원하여 옛날의 큰절 모습 그대로다.
1987년에는 근대 한국불교의 석학 퇴경당(退耕堂) 권상로(權相老) 대종사의 사적비(事蹟碑)를 그의 21주기(周忌)를 맞아 세웠다. 일주문을 지나 법당으로 향해 얼마 안가서 오른편에 세워진 이 비는 권상로 박사의 인연을 참배객에게 알리고 있다.
김룡사의 볼거리 중 하나는 사천왕상을 돌로 조성하여 모신 것이다. 또한 불기2533년(서기 1989년)에 이운(移運)하여 모신 약사여래불은 그 친근감을 갖게 하는 상호(相好)가 인상적이었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염(念)하는 스님의 목탁소리와 낮고 간절한 음성이 주변의 고요를 더하고 있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한적하고 정갈한 산중 풍경은 찾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씻겨주었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지식만능은 물질만능 못지않게 큰 병폐다
‘지식만능은 물질만능 못지않게 큰 병폐입니다. 인간 본질을 떠난 지식과 학문은 깨끗하고 순진한 인간 본래의 마음을 더렵혀서 인간을 타락시키기 일쑤입니다.
인간의 본래마음은 허공보다 깨끗하여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나 진면목을 발휘하려면 삿된 지식과 학문을 크게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보물도 깨끗한 거울 위에서는 장애가 됩니다. 거울 위에 먼지가 쌓일수록 거울이 더 어두워짐과 같이 지식과 학문이 쌓일수록 마음의 눈은 더욱 더 어두워집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을 가리는 삿된 지식과 학문을 아낌없이 버리고 허공보다 깨끗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이 광명을 뚜렷이 바로 봅시다.
- 1984년 신년법어 중에서
[불교신문 2806호/ 4월7일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