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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은해사 운부암   2012-03-08 (목)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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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뒤에서 본 운부암.새롭게 단장하지 않은 고택(古宅)으로 ‘ㄷ’자로 되어 있다. 오른쪽 앞 갓방이 성철스님이 머물던 방이다. 김형주 기자
 

평생의 도반 향곡스님을 만나다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를 마친(1938년) 성철스님의 발길은 경북 은해사 운부암으로 향했다(1939). 하안거 한 철을 나기 위해 운부암으로 가는 스님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본다. 은해사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동 479번지가 지금의 주소다.
팔공산 깊숙이 자리 잡은 은해사. 운부암은 은해사 큰절에서도 산속으로 약3킬로미터(km) 더 간다. 산중의 산중에 자리하고 있다. 운부(雲浮)라는 이름도 산이 구름에 맞닿아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수행납자의 행리가 구름처럼 떠도는 것이어서 그리 한지도 모르겠다.북통만한 걸망을 지고 큰절에서 운부암으로 스님은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그 길을 필자는 지금 자동차로 휑하니 달려가고 있다. 70여 년 전엔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었던 것이 이제는 찻길이 뚫려 편히 가게 되었다고는 하나 포장된 그 찻길도 차 2대가 겨우 스쳐 지날 만큼 좁은 길이다. 문명발달의 혜택으로 차를 타고 산 속 길을 가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다. 옛날 스님이 가던 그때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는 게 제격이지 않나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운부암은 애초에는 어엿한 독립 사찰로 운부사라 했다고 한다. 절을 처음 지을 때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떴다하여 운부(雲浮)라 했단다.
상서로운 구름아래 놓인 한적한 ‘아란야’에는
3평 남짓 무문관 같은 한주실이 그대로 남아
지금도 스님이 그곳에서 정진하는 듯 고요하기만…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 의상스님이 창건했다기도 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연 홍척(洪陟) 국사가 창건했다기도 한다. 운부암의 선원은 운부난야(雲浮蘭若)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적정처(寂靜處), 무쟁처(無諍處), 원리처(遠離處)라 번역한다. 시끄러움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수행하기에 적당한 숲속, 넓은 들, 모래사장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선원 당호 ‘운부난야’
운부난야 현판 글씨는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필체다. 동글동글 하면서도 그 속에 뼈대가 느껴지는 글씨다. 선원이 근대에 들어 언제 개원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경허스님이 영남지역에 선방을 열었던 1900년대 초이거나 그 중반에 개원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1927년 동광(東光)스님이 운부선원에 들렀다는 기록으로 보건대 이때엔 선원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35년에는 조실 이성우(李聖雨)스님의 지도아래 입승 정한종(鄭漢宗)스님을 비롯하여 23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선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8년 하안거부터 금모(金毛, 일명 佛山)스님이 선원을 개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운부난야는 ‘ㄷ’자로 된 집이다. 오랜 세월 새롭게 단장하지 않아 옛 그대로의 고택(古宅)이다. 큰방은 지금 10평 정도 수용할 공간이고 큰방 죄우로 작은방이 있어 수행스님들이 거처하게 했다.
큰방 양쪽으로 3~4개 있는 이 작은방 중 맨 갓방이 성철스님이 머물던 방이다. 지금은 한주실(閑住室)이라 하는 이 방엔 군불을 땔 아궁이가 있다. 3평도 채 안 되는 이 작은 방에는 한쪽에 이부자리가 개켜져 있고 경상(經床)이 하나 있다. 마치 무문관의 한 방을 연상케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 운부암은 마냥 조용했다. 불산스님은 외출 중이었고 암자 내 행자들도 직지사 행자교육에 갔다고 한다. 암자 입구에는 큰 못이 있다. 그 못 한쪽에 달마스님 입상을 모셔 이곳이 전통선원임을 일러준다. 운부암은 입구의 큰 돌에 새겨진 ‘남운부 북마하(南雲浮 北摩珂)’ 남쪽은 운부요 북쪽은 (금강산에 있는 암자)마하연이라는 글 그대로 남쪽에는 선객들의 수행처로 유명한 곳이다. 성철스님은 운부난야에서 당신 평생의 도반(道伴) 향곡(香谷)스님을 만난다.
   
성철스님이 수행하던 당시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운부암 선방 안. 달마그림과 함께 '용상방'이 눈에 들어온다.
이 두 고승의 이때의 만남은 성철스님 일생에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향곡스님은 1912년 1월18일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출생했다. 성철스님과 같은 해 출생이다. 1927년 16세에 경남 양산의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에 입산, 1929년 18세에 조성월(趙性月)스님을 은사로 득도(得度)했다. 법명은 혜림(蕙林). 1931년 20세에 범어사에서 운봉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1944년 8월 운봉스님으로부터 크게 깨침을 인가(印可)받고 전법게를 받았다. 1947년 성철스님과 함께 봉암사(鳳岩寺) 결사(結社)에 참여했고 이해 활연대오 한 후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의 조실로서 후학을 길렀다.
경남 기장군 월내(月內, 지금은 부산 기장)에 있는 묘관음사(妙觀音寺)에서 눈 푸른 납자들을 길러내다 1978년 음력 12월18일 입적했다. 세수 67세 법랍 50세. 향곡스님의 봉암사에서의 활연대오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향곡선사 법어집>에 있는 기록에 그 이야기가 있다. 향곡스님의 법제자 진제(眞際 , 동화사 조실)스님이 쓴 ‘향곡대종사 행화비(行化碑)’에 있는 이 글을 보자.
“… 문경 봉암사에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정진하던 중 한 도반이 묻기를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면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또 죽은 사람을 살려 다하면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殺盡死人 方見活人 活盡死人 方見死人)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었이겠느냐’ 하거늘 몰록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어 3.7일동안 침식을 잊고 정진하다가 하루는 홀연히 자기의 양쪽 손을 발견하자마자 활연대오를 하셨으니…”
   
성철스님이 공부하던 방으로 지금은 한주실로 쓰고 있다.
이 때 향곡스님에게 물음을 내 건 도반이 성철스님이었다고 한다. 진제스님은 이 이야기를 필자에게 하면서 “당시 봉암사에서 이 물음이 나올 때 청담스님 성철스님 향곡스님이 한 자리에 있었다. 향곡스님이 3.7일 후 활연대오 한 후 ‘성철이가 아는 불법(佛法)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바른 법을 알았다’라면서 말싸움을 했다”고 한다. 절집에서는 도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자기 공부의 반(半)은 도반이 해준다고 말한다.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도(道)로서 사귄 벗이 도반이다. 성철스님은 당신과 동갑이면서도 당신보다 일찍 열반한 향곡스님을 못내 아쉬워했다. 성철스님은 향곡스님의 열반에 ‘곡향곡형(哭香谷兄)’이란 글을 남겼다. “향곡형을 곡하여 - 슬프고 또 슬프다. 이 종문에 악한 도적아, 천상천하에 너 같은 놈 몇일런가. 업연이 벌써 다해 훨훨 털고 떠났으니, 동쪽 집에 말이 되든 서쪽 집에 소가 되든. 애닳고 애닳다. 갑을병정무기경. 도우 성철(哀哀宗門大惡賊 天上天下能幾人 業緣已盡撒手去 東家作馬西舍牛. . 甲乙丙丁戊己庚. 道友 性徹)”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수행자가 지킬 5계 첫째 잠을 적게 자야 한다. 3시간이상 자면 그건 수도인이 아니다. 둘째 말하지 말라. 말할 때는 화두가 없으니 좋은 말이든 궂은 말이든 남과 말하지 말라. 공부하는 사람끼리는 싸움 한 사람같이 하라.셋째 문자를 보지 말라. 부처님 경(經)도 보지 말고 조사어록도 보지 말고 신문 잡지는 말할 것도 없다.
참으로 참선하여 자기를 복구시키면 이 자아(自我)라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다 해도 설명할 수 없고 소개할 수 없는 것이다. 세속적인 어떤 문장으로도, 부처님이라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자아를 완전히 깨치려면 불법(佛法)도 버려야 한다. 불교를 앞세우면 그것이 또 장애가 된다. 참으로 깨끗한 자아에 비춰보면 먼지요 때(垢)다. 오직 화두만 해야 한다. 넷째 과식하지 말고 간식하지 말라. 음식은 건강유지가 될 정도만 먹어라. 과식하면 잠이 자꾸 온다. 혼침(昏沈)해선 안 된다.
소식(小食)이 건강에도 좋고 장수비결이다. 다섯째 돌아다니지 말라. 해제하면 모두들 제트기같이 달아나는데 그러지 말라.이 5계를 못 지키면, 그런 사람은 공부 안하는 사람이다. 이 5계를 지키며 10년을 공부하면 성불할 수 있다. 이 5계를 수백 명에게도 더 일러주었는데 그대로 지키는 사람 아직 못 보았다. 아마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물론 숨어서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2011.05.23 -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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