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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큰스님 추모 기사]
눈을 뜨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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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1998 년 6 월 [통권 제10호]  /     /  작성일20-05-06 08:33  /   조회9,08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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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봉 / 인터뷰 정리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큰스님 자료를 정리하면서 모든 사람과 다시 나누고 싶은 글들을 옮겨 봅니다. 이 글은 1981년 큰스님이 종정이 되신 후에도 일체의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시다가 (사)샘터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샘터의 오증자 주간의 서면 인터뷰에 답하신 것을 정채봉 님이 정리한 글입니다. 인터뷰 기사가 나간 지 17년의 세월이 흘렀고, 스님 가신 지 벌써 다섯 해가 되지만 세월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는 글입니다.

 

 

 


 

 

큰스님을 만나려면 절을 3,000번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절을 하는 것은 곧 기도입니다. 얼마 전 절을 하고 올라오는 여학생한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무슨 생각으로 절을 했나?” “스님, 저는 저를 위해 절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절하였습니다.” “그래, 너는 어째서 그렇게 삥삥 두르기만 하지? 바로는 못 가나?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직접 ‘일체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하면 어때. 그렇게 하면 절하는 것 자체가 바로 남을 돕는 것이 될 텐데.” 절을 한 번 해도 남을 위해서 ‘일체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원을 세우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하지 말고 절하는 것부터가 남을 위해 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도 새벽마다 꼭 108번 절을 합니다.

 

아금발심 불위자구 인천복보 …… 원여법계중생 일시동득
(我今發心 不爲自求 人天福報 …… 願與法界衆生 一時同得)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요 ……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가장 높은 지혜) 얻어지이다.

 

불공(佛供)이란 무엇입니까?

 

몸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은 모두 불공입니다. 예를 들면, 버스 속에서 노인이나 어린이, 혹은 병든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도 불공입니다. 또는 정신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불량한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적선을 비는 눈먼 사람에게 10원짜리 한 푼을 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꽉 찼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불공거리, 불공 대상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서 배고파 우는 강아지한테 작은 식은 밥 한 덩어리를 나눠주는 것이 부처님 앞에 만반진수 차려 놓고 백천만 번 절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공이 크다”고.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불공을 하되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그것을 자랑하는 일은 나쁜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란 어떤 길입니까?

 

부처님이 처음 성불(成佛)하신 후 녹야원으로 다섯 비구〔五比丘〕를 찾아가서 제일 첫 말씀으로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했다” 즉 중도를 바로 깨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중도라는 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입니다. 중도란 무엇이냐? 양변(兩邊)을 여읜 것, 즉 상대를 떠난 것입니다. 흔히 ‘중도는 중간(中間)이다’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법문(中道法門)에 의하면 대립되어 있는 선악(善惡)을 떠나서 선악이 융통되는 것입니다. 선악을 떠나면 무엇인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통한다는 것은 유형(有形)이 곧 무형(無形)이고, 무형이 곧 유형이라는 식으로 통한다는 뜻입니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질량과 에너지를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서로 대립되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대 물리학에 와서는 에너지가 즉 질량이고 질량이 즉 에너지로, 에너지와 질량이 서로 완전히 통하는 것으로 증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중도원리(中道原理)입니다. 그래서, 이 중도법문이란 것은 일체만법이, 일체만물이 서로 서로 융합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중도란 모든 모순과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여 그 모든 모순과 대립을 융합해 버리는 세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에 대해서 좀 자세히 설명하여 주십시오.

 

일체법불생 일체법불멸 약능여시해 제불상현전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가 항상 나타나 있다.

 

이 말은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말씀인 동시에 불교의 골수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는 우주의 근본 원리이며 불타(佛陀)의 대각자체(大覺自體: 큰 깨달음 그 자체)이어서 일체불법(一切佛法)이 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 만물 전체가 생자(生者)는 필멸(必滅)입니다. 나는 자는 반드시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어째서 모든 것이 다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했는가?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마음의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리(道理)를 확연히 자기가 알고, 보지는 못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의 등가원리(等價原理)입니다. 즉 자연계(自然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에 대해 각각 에너지 보존원칙 및 ‘질량불변의 원리(原理)’로서 자연계가 불생불멸인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자세히 말하면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전환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전환되어 전환 전후의 질량과 에너지에는 증감(增減)이 없습니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얼음은 질량, 물은 에너지와 같습니다.

 

곧 얼음 한 그릇이 녹아서 물이 될 때, 얼음이 없어지고〔滅〕 물이 생긴 것〔生〕이 아니며, 물이 얼음이 될 때 물이 없어지고 얼음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물 한 그릇이 얼음 한 그릇, 얼음 한 그릇이 물 한 그릇이어서 증감이 없으며 물이 곧 얼음이요, 얼음이 곧 물이므로 우리는 여기서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불생불멸은 생(生)도 아니고 멸(滅)도 아닙니다.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면 결국 어떻게 되느냐? 이에 대한 답은 하나입니다. 질량이 생겼다는 것은 에너지가 없어졌다〔滅〕는 것이고, 에너지가 없어졌다〔滅〕는 것은 질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生)이 즉 멸(滅)이고 멸이 즉 생인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진리(眞理)입니다.

 

극락세계란 어떤 곳일까요?

 

바로 깨치고 바로 알아 나갈 것 같으면 앉은 자리, 선 자리 그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현실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감고 살면 상대생멸(相對生滅)의 세계 속이며, 마음의 눈을 뜨고 살면 모두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절대적 세계에서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불생불멸의 세계, 절대 영원의 세계를 저 먼 곳으로 찾아가서 살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회복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면 해가 떠서 온 천하를 다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지에 있는 무엇이든지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 보인다, 안 보인다” 하는 사람은 바로 눈을 감은 사람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청천백일(靑天白日)이고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캄캄 밤중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의 팔만대장경 중에서 하나를 추천한다면?

 

우리 불교에는 전통적으로 정설(定說)이 있습니다. 경(經) 중에서 어떤 경이 가장 근본적이고 소중하느냐 할 때 『화엄경』, 『법화경(法華經)』이 경 중의 왕이요, 불교의 표준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엄경』이 『법화경』보다 더 깊고 더 넓다 하는 것이 불교의 정설입니다. 『화엄경』은 80권인데 어떻게 다 보겠습니까? 그것도 어려운 한문(漢文)인데. 다행히도 『화엄경』을 요약한 경이 한 권 있습니다. 『보현보살행원품』이란 것입니다. 『약(略)화엄경』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요즈음 말로 하면 『화엄경』의 정수입니다. 이 경(經)을 보십시오.

 

우리는 어디에서 구원을 추구해야 할까요?

 

인과법칙(因果法則)이란 불교뿐만이 아니고 우주의 근본 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 되고, 남을 해치면 결국에는 나를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도운 만큼, 남을 해치면 해친 만큼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법칙에 의해서 그 행복이 전부 내게로 오게 됩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도 그렇습니다. 곡식이 밉다고 곡식을 해쳐 보십시오. 누가 먼저 배고픈가, 자기부터 배고프지요. 남을 도우면 남이 행복한 동시에 나도 배부르고 남을 해치면 남이 배고픈 동시에 나도 배고픈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고파 굶어 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같이 불공을 잘 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문 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통받는 중생들 모습이 하도 불쌍해서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참상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이구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렇게 될 텐데……. 어떻게 도망가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생각이 먼저 날 텐데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서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줄 수는 없을까?’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 뒤에 다시 보니 지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에 그는 극락세계에 와 있었습니다.

 

중생을 대신해서 지옥고(地獄苦)를 받으려고 하는 생각을 하니 지옥이 없어지고 자기가 먼저 극락에 가 있게 되었단 말입니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불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중생이 불공 대상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바른 방향이란 말입니다. 목탁이란 본시 법을 전하는 것이 근본 생명입니다.

 

이는 유교에도 있는 말인데 공자가 자기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세상의 목탁이 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이 모두 바로 살게 하라는 말입니다. 목탁이란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그 근본 사명인데, 그 목탁을 두드려 부처님 앞에서 명 빌고 복 빌고 하는, 돈벌이하는 데 이용하게 되면 이것은 장사입니다.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신도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불공에서 벗어나서 남을 도와주는 참 불공을 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불교의 새싹이 트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무척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린이들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어린이들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더우면 덥다, 추우면 춥다고 하지 거짓말을 안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는 “거짓말하지 말아라” 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거짓말을 참말보다 훨씬 더 많이 하고 있으니…….

 

 

 

큰스님과의 인터뷰 기사가 최초로 실린 1981년 1월호 샘터 표지.

 

 

 

샘터 가족들에게 한 말씀하여 주십시오.

 

“원수를 자기 부모와 같이 섬겨라. 그러면 마음속의 모든 병이 나으리라”고 한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만이 아니고 심지어 기어다니는 벌레까지도 부처되기를 발원(發願)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 모든 중생을 존경하고, 사람끼리 먼저 남의 행복을 발원하며 살아갑시다.

 

※ 이 글을 『고경』에 싣도록 도움을 주신 정채봉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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