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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기도]
백련암에 다시 켠 생명의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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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  1998 년 9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5-06 08:33  /   조회11,15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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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부처님! 이 중생 살려주옵소서. 

1980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 설날 명절이었다. 설날이라 친척집에 다니며 세배하고 평소 좋아하고 즐겨 마시는 막걸리 동동주를 대접받았다. 즐겁게 노래 부르고, 춤추고, 낮부터 밤까지 놀다 보니 신체에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반응이 왔다. 구역질, 그것도 매우 힘들게 뱃속에 있는 오물을 다 쏟았다. 반응치고는 이상하다고 느끼고 바로 부산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 길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정밀검사 결과 만성간염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지금 당장 입원하세요”라고 하였다. 그때 검사 수치가 GOT 530 GPT 680 정도로 기억난다. 의사는 발병한 지가 오래되었다며, 왜 여태껏 있었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평소 건강만큼은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여서 건강에는 의심을 두지도 않았고, 게다가 가정 형편상 종합검진 같은 것은 생각조차도 못했다.

 

 


 

 

당시 병원 방사선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고향 친구(이박정 씨)의 소개로 의사를 소개받았다. 같은 의사 친구 소개를 받은지라 친절하고, 최선의 치료를 하는 것 같았으나 날이 갈수록 GOT, GPT는 더 올라가고 피로는 더해만 갔다. 일주일 치료받은 후 병환의 차도가 없어 또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담당의사는 내과 전문의였다. 역시 친구의 소개를 받은지라 그 분도 나에게 최선의 치료와 간호로 보살펴 주셨다. 일주일마다 혈청감사로 GOT, GPT를 체크하였다. 입원한 지 10개월이 접어든 어느 날, 나를 담당했던 간호사가 야간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담당의사는 3일간 휴가로 방문치료가 없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내 병이 많이 좋아졌다고 만 하는데 얼마나 좋아졌는지 알 수 있도록 매주 체크하는 GOT, GPT 검사 결과를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간호사는 한마디로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간호사에게 매달려 설득했다.

 

“의사 선생님이 내 병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얼마나 좋아졌는지 본인이 알아야 병을 이기는 힘이 날 것 아닙니까. 또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시간이 얼마 흘렀을까? 간호사도 환자가 매달려 애원하는 모습이 안됐었는지 10개월 동안 검사한 GOT, GPT 체크리스트를 보여주었다. 그 체크리스트를 보는 순간, 당장 퇴원 준비를 했다. 병이 좋아져서요? 아니다. 너무 나빠졌기에 퇴원을 생각했다. 이 병원에 이대로 더 있다가는 죽어서 시체로 나가겠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미 GOT, GPT가 1,000이 넘어 있었다. 의사가 병진 왔을 때 “많이 좋아졌다”라고 말하는 순간에만 환자의 기분이 좋아졌다가 의사가 병실 문을 닫는 순간부터 본래의 아픔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마음의 장난이겠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그 병원에 있었으면 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로 여러 병원을 다니며 전전긍긍했다. 아마 7,8 군데 병원은 더 다녔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복음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병원 문을 들어섰다. 그런데 다른 병원에 입원할 때는 입원비 선수금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선수금 일백만 원을 먼저 걸어야만 입원이 된다고 하는데 그 돈이 없어서 입원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워낙 가정형편이 어려운데다가 10개월 동안 병원 치료를 하면서 돈만 썼지 돈 버는 사람은 없었으니 내 아내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자녀는 셋이요 죽자 하니 청춘은 아깝고 내가 뿌린 씨앗은 내가 거두어 주는 것이 아비의 도리인지라, 죽는다 해도 태산 같은 걱정 앞에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집에 와서 불경, 천수경, 금강경 테이프를 들으며 “부처님 이 중생 업장이 두터워 청춘에 병이 나서 죽기를 기다리니 원통하고 애닮사오니 굽어 살펴 주옵소서….”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그리고 불경을 펼쳐 놓고 녹음테이프를 따라 독경하는 일이 불교와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처음으로 절 마당을 찾은 것은 고향인 함안에 있는 천궁사라는 조그마한 암자였다. 그때만 해도 부처님께 3배 올리는 것을 남이 볼까 봐 몰래 했었다. 그리고 김해에 있는 미륵암이라고 하는 데를 다녔다. 이곳은 이름만 불교의 미륵암이지 부처님을 모신 곳도 아니요, 그저 바위만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곳이었다. 말없이 서 있는 자연석 앞에 엎드려 3배 하며 업장 소멸, 건강 회복, 가정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 불교의 믿음으로 가는 교두보 역할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이곳을 찾아 이렇게 기도하고 소원성취를 빌던 중, 한 도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도반도 간혹 이곳을 찾아서 말없는 바위 앞에 서서 소원을 빌곤 했다고 한다.

 

그 도반이 나와 아내를 부처님께 인도하였다. 그 도반은 부처님 형상도 아닌 바위 앞에 엎드릴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어 부처님이 계시는 큰 도량으로 가자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부처님이 계시는 그 큰 도량이 어디냐고 물으니 해인사 백련암이라고 하였다. 그때만 해도 해인사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백련암은 처음 듣는 곳이었다. 그는 백련암에는 성철 큰스님이 계시고, 그 큰스님을 친견하려면 절 3천배를 해야만 하고 그래야만 불명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아직 불교의 초보자인지라 큰스님, 친견, 3천배라는 용어가 아주 생소하였다. 그저 절에 가면 부처님 전에 3배하는 것이 불교의 법도로만 알았고 3천배라는 것은 상상조차 못하고 어찌 3천배를 하나, 정말 3천배를 하는 신도가 과연 있는가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그 후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계속 병석에 누워 있고, 아내는 권유하는 도반과 약속을 하여 해인사 백련암을 찾게 되었다. 그때가 아마 1987년 정도쯤일 게다. 아내는 처음 백련암을 찾아 도반이 이끄는 대로 3천배를 마치고 큰스님을 친견하고 불명을 받고 화두를 받고 왔다. 그때 어찌나 좋아하던지 '나도 백련암을 찾아 3천배를 해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도반 천호선 보살님께서도 나에게 몇 차례 백련암에 가서 3천배를 하라고 권유하였다. 성철 큰스님께서도 처사님들이 오는 것을 아주 좋아하신다며, 이제나저제나 하고 내가 백련암을 찾기를 기다려 주신 천호선 보살님 그러나 쉽게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후 병세는 악화되었지만 치료비, 약값이 없어 집에서 조약, 신약 등 좋다 하는 것은 모두 구해 먹었다. 그러다가 이웃에 내 병 얘기를 했더니, 돈도 많이 들지 않고 입원도 하지 않고 통원치료로 약을 먹으면 되는 곳이 있다며 소개를 해주었다. 그 분은 간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내과 전문의였다. 그곳은 환자가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니 일찍 가라고 해서 새벽 4시에 병원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 시간에도 5, 6명 정도의 환자가 먼저 와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이 병원에서는 치료가 가능할 것만 같은 느낌이 왔다. 시간이 갈수록 환자는 20여 명 정도로 늘어났다. 환자 1명에 가족 1, 2명 정도가 동행을 하니 조그마한 대기실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의사에게 지금까지 병원치료 경과를 말했다. 의사는 진찰을 마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환자는 한 곳의 병원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최선을 다해 봅시다.”
간염에 대한 치료 방법은 어느 병원 의사 없이 비슷하다. 다만 처방이 다를 뿐이다. 자기 병원에서도 2주일만 치료를 받아 보고 반응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했다. 한곳에 오래 치료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첫 번째 일주일 약을 받았다. 일주일 복용하니깐 반응이 보였다. 다시 일주일 약을 먹었다. 아주 좋은 반응이 보였다. 60일 치료를 받고 병세가 거의 완쾌된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도 치료를 그만 받아도 좋겠다 하시며 주의할 음식물과 피로와 과로는 피하라고 하며, 가까운 약국에서 계속 복용할 처방을 해 주면서 병원 치료는 끝이 났다.

 

그 해가 1981년 11월이었다.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남에게 빌린 돈과 우선 먹고 살아야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울산에 조그마한 구멍가게 같은 사업장을 마련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상호는 한신기계로, 업종은 산업기계 납품과 수리였다. 무일푼으로 남의 사무실 한쪽 구석에 책걸상 하나씩 얻어서 사용하고 전화도 구입할 돈이 없어 남의 전화를 사용했다. 어려움이란 말할 수 없었다.

 

오랜 병에 남은 것은 남의 빚뿐이었다. 병이 들어 몸은 고생하였으나 근본의 바탕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니까 일터를 일구어 열심히 뛰어다녔다. 병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한 아내와 아빠의 오랜 투병 생활에 풀이 죽어 있는 자녀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와 부지런히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병 수발 1년 10개월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날이 새면 이 집 저 집 안면이 있는 곳은 다 찾아다니며 약값이다 병원비를 빌려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는 가운데 남편을 꼭 살려야 한다는 굳은 결심과 지극한 정성을 알게 된 이웃집 김동찬 씨의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돈은 철저한 이자관리, 신용관리로 빌렸다. 벌어들이는 사람은 없어도 쓰는 곳은 많으니 빌린 돈은 태산처럼 쌓여만 갔고, 오늘은 이 집에서 빌려 저 집에 이자 주고 내일은 저 집에서 빌려 또 다른 집에 이자 주고 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러니 30일 중에 26일은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날이며, 기껏 4일은 공한 날이었다. 아내의 머리는 과연 컴퓨터였던가? 의심이 날 정도로 정확하였다. 하루도 이자 지불일을 어기는 날이 없었다. 돈에는 철두철미하였다. 오직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애틋한 그 한 마음. 살려면 놓으면 부지런한 사람이니까 남의 돈 빌린 것은 떼먹지 않는다는 자신감 하나와 어린 세 자녀를 위하여 노력한 것이다. 하나를 잃으면 남편 없는 과부요, 아비 없는 자식이니 그 허망함과 억울함이 또 어디 있을까? 나와의 고약한 인연으로 고생함을 한탄하고 원망도 했겠지만 전생의 과보이니 어찌 남을 탓하랴. 나의 복이 이것이요, 또 내가 있어야 이 죄 많은 중생의 목숨을 건진다 하는 애틋한 마음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부처님 전에 엎드려, “불쌍하고 가여운 이 중생의 병환을 거두어 주옵시고 남에게 빌린 돈 갚을 수 있도록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찾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빌고 또 빌고 한 것이 하루 이틀 지나 한 달 두 달 지나서 어언 수년이 흘렀던 것이다.

 

의사는 나에게 "병을 짊어진 몸이니 과로를 피하라, 피로하면 장소를 가리지 말고 누워 쉬어라"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구멍가게라고는 하지만 시작한 사업이라 열심히 하다 보니 피로는 따르게 마련이요, 내 몸 아픈 것을 아랑곳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손님 접대였다. 간단한 식사접대는 괜찮지만, 술 접대는 어찌나 괴롭고 피로한지 모른다. 먹어서는 안 되는 술, 술은 간염에는 화약과도 같은 적인데 접대 받는 손님은 그것을 알 턱이 없고 고통을 참아내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건넸다. 못 먹어도 먹는 척하며, 탁자 밑으로 술을 부어버리거나 잔을 돌리며 내숭을 떨고, 그러다 보면 시간은 자정을 가까운데 술판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 마음은 조급하기만 하고, 몸도 괴롭고 마음도 괴로운데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일을 따내기 위해 기계를 판매하기 위해 상대의 기분을 맞추며 내숭을 떨기가 너무도 힘이 들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까 나에게는 크나큰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 제발! 그러나 간염 재발! 두 번째 재발을 했을 때 간경화, 세 번째 재발은 간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의사 선생님의 진단이었다. 세월은 흘렀다. 1988년 10월 막 올림픽이 끝나고 가을은 무르익어 농부의 손길이 바빠지는 일년 중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 복호의 가슴속에는 사형선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방사선 과장으로 근무하는 병원에서 CT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 악성종양이다. 동전 백원짜리 크기 만한 구멍이 간 한복판에 뚫린 것이 눈에 보인다. 훗날 들은 이야기이지만, 의사인 친구는 아내 대삼인을 한쪽으로 데리고 나가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까운 친구 떨구게 되었습니다. 간암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집으로 데리고 가서 먹고 싶다는 것 사 먹이고, 하고 싶다는 것 해주고 마음 편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나 하여 다른 병원으로 가서 CT검사를 또 했다. 역시 같은 진단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은 조용하다. 조용한 가운데 불경 테이프 소리만 들린다. 천수경, 금강경이 번갈아 돌며 24시간 집안을 울린다. 
“부처님! 부처님! 이 중생 살려주옵소서. 할 일을 못다 한 이 중생 할 일 하게 해 주옵소서. 어린 세 남매 시집장가 보낼 때까지 살려주옵소서.”
마음속으로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백련암의 첫길

 

내가 백련암을 처음 찾게 된 것은 1993년 7월이었다. 도반보살 처사의 부친사망으로 49재를 백련암에 입제하였다기에 인사차 2재 때 백련암을 찾은 것이 처음이었다. 3재가 되던 날, 도반 천호선 보살의 인도로 금강굴을 처음 찾았다. 금강굴 법당에서 부처님께 3배를 올리고 불필스님을 친견하였다. 스님께서는 나에게 숙제를 주셨다. 하루 일과 3백배와 능엄주 독송 3년이었다. 그 날부터 숙제를 시작하였다. 하루일과 3백배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난 9월 셋째주 일요일, 4재 영가 천도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도반 친구가 준비한 봉고 승합차에 몸을 싣고 백련암을 다시 찾았다.

 

셋째주 일요일인지라 백련암에는 많은 신도님들이 3천배 또는 만배 참회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날 3천배 참회기도에 동참하기 위해 수많은 보살 처사님들의 틈 사이에 끼여 섰다. 3천배. 말로만 듣고 해야지 하는 생각뿐인 그 참회기도. 백련암의 적광전 부처님께 촛불을 밝히고 도반처사와 나란히 3천배를 시작하였다. 사시마지 예불을 마치고 영가천도재를 마칠 때까지 겨우 천오백배를 마쳤다. 점심공양을 마친 여러 보살 도반들과 처사도반들은 각자의 참회기도 3천배를 끝낸 듯 짐을 챙겨 하산하였고 같이 절하던 도반도 천도재를 마치고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나에게 “너는 오늘 처음 와서 3천배를 못하니까 같이 내려가자. 다음 첫째주에 와서 그때 3천배를 하는 것이 좋겠다”며 만류를 하였다. 이유인 즉, 내 건강이 매우 나쁜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천 5백배나 했는데 도중에 포기할 수 없어서 3천배 다 할 수 있으니 먼저 가라고 하였다.

 

도반처사와 영가천도재에 참석한 일행들은 모두 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3천배를 마치고 내려갈 차편을 걱정하고 있으니 처음 보는 어느 보살님이 기다렸다가 "처사님이 3천배를 마치고 나면 부산까지 태워다 줄 테니 걱정 말고 열심히 끝마무리를 잘 하라"는 것이다. 그 보살님은 오늘까지도 고마운 도정장 보살님이시다. 시간이 흘러 오후 4시경에는 절하는 여러 도반들이 다 돌아가고 1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같이 절하던 도반들이 한둘씩 가는 것을 보니 힘은 더욱 없어지고 사지는 통증으로 신심은 약해지기만 하였다. 그때 부처님 전에 향을 사르며, "부처님 이 중생 힘을 주옵소서. 3천배 마치도록 힘을 주옵소서" 하며 구원을 하였다. 어쩐지 부처님 전에 향 공양을 올린 후 나도 모르는 힘이 솟았다. 2천 7백배, 마의 고비까지 넘겼다. 어찌나 힘이 들던지, 부처님 3백배 또 부처님 2백배 남았습니다, 마칠 때까지 힘을 주옵소서. 마지막 백배 부처님. 감사합니다. 이제 100배만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 마지막 백배를 마치니 도반 보살님이 하는 말.

 

"처사님 수고하였습니다만 중간에 빠뜨린 것이 있을지 모르니 30배만 더 하십시오."

3천배를 다 마쳤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30배를 더 하라는 것은 마치 지옥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큰스님께서는 한 배 빠뜨린 것도 알고 계시며, 빠뜨린 것이 있으면 불명을 받을 수 없다는 말에 30배를 더 하였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세 번 절하고 뒤로 돌아 도반 보살들께도 일배하며, 보살님들 감사합니다, 3천배 다 하였습니다, 인사하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오던지……. 눈물은 참다못해 소리 내여 울어버렸다. 지난날 살아나온 것을 생각하고 또한 아내에게 마음 아프게 한 것을 참회하니 눈물이 먼저 쏟아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3천배를 마치고 복호(伏虎)라는 불명을 받고 화두도 받았다. “부처님을 물었는데 삼세근 이라네”라는 의심을 가지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것이다..

 

그날 마지막 백련암 순회 차 성철 큰스님이 오셨다. 모든 보살신도들이 그 자리에 엎드려 3배를 올렸다. 나는 큰스님을 친견하여 마당에서 엎드려 3배를 올렸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해 11월, 큰스님께서는 영원히 우리 곁에서 떠나가셨다. 그러나 아직도 그 날 큰스님께 삼배를 올리자 환하게 미소 지으시던 자비로운 모습이 마음속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 후 1개월이 지났다. 한 달에 두 번씩 첫째, 셋째 토요일은 백련암에서 3천배 참회기도를 하고 하루일과 3백배도 빠트리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하였다. 그런데 1개월을 조금 지난 11월 4일 성철 큰스님이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한 달 전에 3천배하고 친견한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그립다. 왜 일찍 백련암을 못 찾았을까 천호선 보살께서 그토록 백련암에 가자고 권유할 때 왜 안 갔을까?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큰스님은 육신의 옷을 벗어 던지시고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큰스님의 법을 따르는 나의 3천배는 계속 이어졌다. 불필스님이 주신 하루일과 3백배와 능엄주 독송은 물론이요, 남을 위해 기도하라고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 처음에는 나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업장이 두터운지라 남을 위하는 것보다는 내가 우선이 되었다. 그러나 백련암 문턱을 자주 넘다보니 스님의 법문과 도반 보살님의 인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교의 진리가 몸에 스며들었는지 남을 위한 기도 발원을 하게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 함께 나누는 기쁨

 

성철 큰스님의 참회기도 법을 따라 아내인 대삼인 보살과 일구월심 지극정성으로 매일같이 참회기도 일과를 한 지가 어언 3년이란 세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내 대삼인은 매일 6백배를 하는데, 거실 한쪽 벽면 중앙에 원상을 걸고 왼쪽에는 관세음보살님, 오른쪽에는 성철 큰스님을 모시고 그 앞에서 참회기도를 한다. 나는 집에서 또는 범어사에서 또는 울산 문수산 문수사와 울산 입구에 위치한 정토사 등으로 다니며 하루도 빠짐없이 참회기도를 하였다. 지극정성으로 참회기도를 하다 보니 건강은 저절로 회복하고, 마음은 편안해지고, 어제의 잘못을 뉘우치고 오늘의 좋은 일을 찾게 되며, 남을 해롭게 하지 않고 남을 위한 선한 일을 한 가지씩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아내 대삼인과 나는 서로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렵게 자라온지라 또한 두 사람이 만난 것도 그러하듯이 우리의 가정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법에 귀의한 우리 두 사람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육바라밀 가운데서 첫 번째인 보시 바라밀을 실천하기로 했다. 어려운 형편이라 돈으로는 할 수 없고 마음과 육신으로 노력을 하기로 하였다. 대삼인은 틈틈이 이웃이나 시장에서 자그마한 것이지만 가정 필수품이나 가재도구 등의 필요한 물건들을 보는 대로 모아서 살림이 어려운 산골 마을과 부처님 도량인 ‘절’에 실어다 주었다. 특히 헌옷은 10년 동안을 수거하여 전남 승주군 주암면 어느 시골마을에 보냈다. 당시만 해도 그 마을은 첩첩산골이며 농업도 그다지 발달되지 않아서 살림이 어렵다는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헌옷이라고는 하지만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들로 세탁만 하면 새것이나 다름이 없기에 보시바라밀을 실천해 보기로 발심을 하게 것이다. 나와 아내는 틈틈이 모은 헌옷을 쌀 포대에 담아 두 마대씩 천일정기 화물로 보냈다. 그리고 그 옷을 마을 주민들이 나누어서 입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신심을 내어 열심히 보낸 것이 어언 10년이나 된 것이다. 우리의 생활도 비록 어려웠지만 남이 버리는 물건을 열심히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것이 참으로 기쁜 일임을 느꼈다.

 

꿈과 현실이 하나로

 

잠시 꿈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한다. 때는 1993년 8월경, 시간은 아침 8시 30분경, 나는 직장이 있는 울산으로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 막 울산 시내로 접어들 때이다. 옥동 사거리 신호등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운전대를 왼쪽으로 돌리려 하는 순간, ‘꽝’ 하는 소리가 났다. 뒤좇아 오던 구형 그랜저가 내 차를 앞질러 좌회전하려고 중앙선을 넘어 과속으로 달려오다가 왼쪽 앞바퀴와 운전석 사이 옆구리를 받아버린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관세음보살님하고 외치면서 고개를 숙여 핸들에 머리를 박고 한참 동안 엎드려 있었다. 가만히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 앉은 채로 사지를 움직여 보기도 하고 목과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기도 하였다. 다친 곳이 없음을 알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내 차와 상대 차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바로 폐차가 되었다. 그렇게 큰 교통사고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다친 곳이 한 군데도 없으니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으니, 이 어찌 부처님의 가피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고가 난 그 순간에 집에서 삐삐 호출이 와 있었다. 집에서 아내가 보낸 호출이었다. 사고처리를 대충해 놓고 이 시간에 집에서 왜 호출을 했을까? 하고 궁금해 하며 집에다가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전화를 받더니 “당신 별 일 없어요? 당신 목소리가 깨끗하니 되었어요” 하였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하니까, 지금 이상한 꿈을 꾸고 깨어나 바로 호출을 한다는 것이었다. 꿈 이야기인즉, 내가 출근을 하고 난 뒤에 잠시 누웠는데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검은 옷을 입은 윗대 조상이라고 하면서 세 가지 과일과 조기 한손을 사서 해인사 올라가는 길옆에 냇물이 흐르고 물이 많이 고여 있는 곳의 바위 위에서 기도를 드리고 조기를 물에 던지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제일 좋은 과일 세 가지와 조기 한손을 사서 기도를 올린 후에 그 조기를 냇물 웅덩이에 던졌는데, 그 죽은 조기가 살아서 헤엄쳐 가더라는 것이다. 꿈치고는 너무 이상해서 출근길에 있는 나에게 호출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내가 꿈을 꾸는 그 순간에 나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정신없이 엎드려 있지 않았는가. 이 얼마나 감동할 꿈 이야기인가. 우리 둘은 결국 부처님이 우리를 돌보신 덕분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또 다른 꿈 이야기이다. 아내가 백련암에서 삼천배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 밤에 꾼 꿈이다. 어떤 스님 두 분이 내 입을 크게 벌리더니 입 안에서 여러 가지 오물 부스러기, 라면봉지, 휴지, 나무껍질 등을 끄집어내더란다. 아마도 이 꿈은 나의 건강 회복을 뜻하는 꿈이 아니었을까. 부처님께서 이 몸속에 모든 잡병을 거두어 주신 것이 아닐까요?

이외에도 실제의 사고와 꿈이 일치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많이 있었다. 나와 아내는 둘이서 일념으로 기도한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참회하고 또 참회하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다시 찾은 나의 생명

 

일찌감치 나를 찾아온 만성간염. 일반적으로 만성간염을 앓다가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내 주위에도 간염을 앓다가 죽어간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그것도 아주 건강하게…….

 

1980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에 발병을 했으니, 병은 아마 수개월 전부터 내 몸 속에서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10개월 동안 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병세는 악화되었고, 그 후 일여덟 군데의 병원을 전전긍긍하면서 옮겨 다니지 않았던가. 게다가 한 생명을 살리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약, 신약, 조약은 물론이고 간염에 좋다는 약초, 채소, 과일 등 수십 가지의 약들을 구해 먹이느라 고생한 내 아내 ‘대삼인’, 남편을 살리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약이라고 먹은 것을 정리해 보면, 일엽초, 바위버섯, 바위돈냉이, 사과즙, 토마토즙, 딸기즙, 푸른 야채즙, 당근즙, 인정쑥 다린 물, 누릅나물, 웅담, 돼지쓸개, 수삼과 우유벌꿀, 홍삼과 영지버섯, 대추, 돌미나리, 소눈알, 굼벵이, 토룡탕, 개소주, 붕어곰, 잉어곰, 짱어곰, 송아지 사태곰, 재첩국, 심지어는 화장터 사체 태운 뼛가루도 먹었고, 수많은 약재들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해 먹었으니 그녀의 노고는 말 다할 수 가 없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회한다.

 

만성간염을 극복하고 살기 위해 일을 시작한 뒤에 다시 찾아온 간경화, 또 재발로 인한 간암까지의 길고도 지루한 병마를 이기고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내 대삼인 보살의 지극한 정성과 꿋꿋한 인내심, 그리고 남편을 꼭 살려야 한다는 굳은 의지와 부처님을 믿고 따른 신심에서 비롯된다. 그 덕분으로 건강을 되찾고 백련암 문턱을 넘게 되었으며, 더군다나 성철 큰스님 생전의 마지막 유발 상자로서 스님의 법을 따라 3천배 참회기도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운명적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1988년 10월에 간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는 경영하던 사업은 물론 내 가정의 장래를 걱정하며 죽는 날만 기다리던 그때의 심정은 정말 암담했다. 사는 것이 고작 이것이요, 죽는 것이 바로 내 눈앞에 있으니 허망한 것은 인생이로구나 하고 한탄도 해보고, 소리 없이 울어보기도 하고, 부처님 이 중생 한 목숨 살려주옵소서 하고 빌어도 봤다. 마지막 사경을 헤매면서는 생노병사는 고통이라 하셨으니 어서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게 하옵소서 하고 포기도 했었다. 그러나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애끓는 아내의 정성에 부처님도 감동하셨고, 나 또한 백련암에서 3천배 인연을 맺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면 아내가 내게 보여준 정성과 믿음이 나에게 필요한 약이었던 것 같다. 처음 금강굴을 찾았을 때, 스님께서는 나에게 매일 일과 3백배와 능엄주 독송, 한 달에 두 번의 3천배를 숙제로 주시면서 ‘참회기도를 지극정성으로 하면 병원을 찾지 않아도 건강이 좋아질 것’이라는 하지 않으셨던가.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른 결과, 사형선고를 받은 지 5년이 지난 오늘까지 한 번도 병원을 찾아본 일이 없다. 얼마 전 건강을 체크해 보기 위하여 종합검진으로 CT촬영을 했는데, 간에 생겼던 동전 100원 짜리 크기의 구멍은 어디론가 말끔히 사라졌고, GOT, GPT도 정상인보다 더 좋다는 결과를 얻었다. 검진을 받으러 온 나를 보고 의사는 깜짝 놀랐다. 몇 년 전에 죽고 없을 사람이 살아 있으니 말이다.

 

오늘도 일과 참회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다. 글을 마치면서 오늘이 있기까지 나를 도와주신 세 분에게는 꼭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 분들은 이 몸이 다할 때까지 도움 받은 빚을 갚아야 할 고마운 인연이다. 첫째 분은 병고에 시달리며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자금이 부족할 때 낮이나 밤이나 대문을 두드리면 열 번이든 백번이든 한마디의 거절도 없이 돈을 빌려 주신 도반처사 김동찬 씨와 그의 아내 천호선 보살님이시고, 두 번째 분은 역시 사업자금의 충당으로 약속어음을 7년 동안 빌려 주신 허원량 씨(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세 번째 분은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오늘까지 물건(기계제품)을 제공하여 주신 부산 서면에 있는 한신기계 유장천 사장님.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을 주신 분들입니다. 이 생명 다할 때까지 그 빚을 갚을 것입니다. 그 분들의 영원한 행복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저의 기도 도반 여러분, 큰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루 일과를 열심히 하고 계신 모든 분들이 하루 빨리 성불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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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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