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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바른 길]
無生法忍 생기고 없어짐이 본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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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  1997 년 12 월 [통권 제8호]  /     /  작성일20-05-06 08:33  /   조회7,87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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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시작해 본다. 불교라는 종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행하는 데에서 불교라는 종교가 모양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가르침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이른바 팔만 사천 가지 법문을 펼쳤다고 하고 그것을 담은 방대한 양의 경전이 전해진다. 그만큼 여러 가지 주제와 내용의 가르침이 있을 것이고, 선대(先代) 불자들이 그것들을 그토록 오랜 동안 믿고 따르고 보존하고 전수한 것을 보면 그 모두가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다 귀중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 가운데 뭔가 가장 핵심이 되는, 그리고 불교라는 종교의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주제와 내용이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불교 사상을 이끌어 온 사람들과 나아가 불자들 일반, 그리고 심지어 불교라는 종교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이야기하는 것은, 수행을 하여 스스로 부처님이 된다, 성불(成佛)한다는 데 그 핵심적, 특징적인 주제와 내용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라 하면 무엇보다도 우선 수행, 구도(求道)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인들이 편지! 를 쓰거나 할 때 십자 표시(+)를 하나 하고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운운하는 것으로 자기의 신앙을 단적으로 담은 인사말을 삼듯이, 불교인들은 “성불하십시오”하는 말을 인사말로 삼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성불한다,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일단 중생이기를 그만 둔다는 뜻이겠다. 부처님의 반대말이 중생이라는 뜻에서는 그렇다. 중생으로 살기를 그만 두고 부처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중생으로 사는 원인을 없애면 될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대승불교에서는, 적어도 선종(禪宗)에서는, 자기 자신이 워낙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중생이 워낙 부처님이라는 그 진상을 깨치면 된다. 그러므로 사실은 부처님이 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전에는 아니던 것이 지금은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자기의 본래 정체를 깨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두고 선종에서는 “자기 자신의 불성(佛性)을 보면 곧 부처님이 된다”고 표현한다. 『선문정로』 첫 장의 제목 “견성즉불”(見性卽佛)이 바로 그 말이다. 나도, 또 당신도, 나아가 모든 중생이 원래 부처님이니까, 불자들은 누구를 만나면 부처님이신 당신께 경배 드립니다 하는 뜻에서 합장하고 절한다.

 

그런 깨침을 일컬어 최고의 바른 깨침,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asamyaksambodhi)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바로 앞장에서 하였다. 그리고 이제 여기 『선문정로』 다섯 째 장에서는 그 깨침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는 말이 그 제목으로 등장하고 있다. 무생법인이란 일체제법(一切諸法)이 무생무멸(無生無滅)이라는 이치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모든 현상과 존재는 본래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이치를 깨치는 것이다. 아니, 모든 것이 생겨났다 없어지고, 나도 분명히 전에 없던 것이 태어나 살다가 죽을 텐데 이게 무슨 말씀인고? 여기에서부터는 상식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아주 특징적인 대목이며, 또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워낙 납득이니 이해니 하는 것을 갖다 붙일 데가 아니라 깨침의 내용을 표현한 말이어서, 애당초 시원하게 설명을 풀어놓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니다. 큰스님에게 찾아가 짐짓 무생법인이 뭡니까 물어보면 별 쓸데없는 망상을 다 한다고 꾸지람이나 듣고 참선이나 열심히 하라고 지도받을, 그런 대목이다.

 

그래도 여기는 어떻게든 설명을 시도해야 하는 자리니까, 경전이나 그 밖의 문헌에서 말을 빌려다 꾸며 보자. 우리는 모든 현상과 존재를 서로 구별되는, 분단(分斷)된 개별자(個別者)로만 본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나는 특정 일시에 특정 장소에서 태어나 이렇게 살다가 언제 어디선가 죽어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다. 그러나 연기적(緣起的) 존재로서의 나는, 부처님으로서의 나는, 그런 개별자일뿐만 아니라 법신(法身)이기도 하다. 법계(法界) 전체, 세상 전체가 내 몸인 것이다. 눈을 감아 안 보인다고 해서 세상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서산(西山)으로 해가 져 깜깜해졌다고 해서 해가 없어진 것이 아니듯이, 이 개별자로서의 몸이 죽어 없어진다고 해서 법계가, 법신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몸은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일 없이 늘 그대로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이 세상의 모든 현상과 존재가 마찬가지다. 다 한 몸이니까. 그것을 일컬어 일체제법(一切諸法)이 무생무멸(無生無滅)인 이치라고 하며, 그 이치를 깨치는 것을 무생법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는 무생법인을 설명하면서 불퇴전(不退轉), 공(空), 불가득(不可得), 무조작(無造作) 등의 표현을 동원하고 있다. 불퇴전의 깨침을 이룬 이는 우리가 철석같이 사실이라 여기는 개별자들의 분단된 모양들, 그 생겨나고 없어지는 모양들이 기실은 다 공(空)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나는 이런 놈이고 너는 저런 놈이다, 저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또 무엇이다 하고 분단적인 규정을 짓는 것이 다 헛일이다. 그런 식으로 정체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불가득이라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현상과 존재의 정체를 규정하는 것은 조작이다. 현상과 존재를 분단된 개별자로만 보는 조작적 관념의 대표는 그 모든 것을 생겨났다 없어지는 것으로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겉모양이 공이고 조작된 것이며, 그 모두가 기실 생겨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깨쳤는데 다시 그 깨침이 없어지거나 희미해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돈이 호주머니에 들어 왔다가 다시 나가거나 외웠던 영어 단어를 잊어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본래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똑똑히 보았을 뿐이지 새로 만들어 내거나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깨침, 즉 일체제법이 무생무멸이라는 깨침은 불퇴전이다. 일오(一悟)가 영오(永悟)라는, 즉 한번 깨침은 영원한 깨침이라는 마조(馬祖) 선사의 이야기도 바로 그런 뜻이다.

 

그러니까, 앞에서는 성불에 대해 중생이기를 그만 두고 부처님이 되는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중생으로서의 내가 없어지고 부처님으로서의 내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중생도 또 부처님도 무생무멸이다. 중생과 부처님이라는 말을 비롯해서 모든 반대말이 사실은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반대말로 여기는 것도 심각한 망상(妄想)이다. 그래서 마조는 그런 반대말의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바로 무생법인이라 했고, 그런 깨침은 본래 있었던 것이고 지금도 있는 것〔本有今有〕이지 새삼 닦아 얻는 것이 아니다〔不修不生〕라고 하였다. 그러면 닦고 성불하고 하는 것이 다 헛된 짓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무생법인을 얻은 이들이 할 소리이지 망상에 푹 빠져 망상만 붙들고 사는 이들이 할 소리는 아니다. 깨친다는 사건을 실제로 일으키기 전까지는 깨친다는 그 사건의 의미와 효용, 깨쳤냐 못 깨쳤냐 하는 반대말의 의미와 효용은 역시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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