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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로 세상 읽기]
궁해야 통하는 길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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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2019 년 12 월 [통권 제8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5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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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자유기고가

 

향엄 화상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서 입에 나뭇가지를 물고 손은 가지를 잡지 않으며 발은 나무를 디디지 않고 있는데, 나무 아래에 사람이 있어서 ‘서래의’를 묻는데, 대답하지 않으면 묻는 사람에게 그릇될 것이고 만약 대답한다면 떨어져 죽을 것인즉 이러한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香嚴和尙云, 如人上樹, 口啣樹枝, 手不攀枝, 脚不踏樹, 樹下有人, 問西來意, 不對卽違他所問, 若對又喪身失命. 正恁麽時, 作麽生對?
『무문관無門關』 제5칙

 

향엄지한(香嚴智閑, ?-898)화상은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선사의 제자로 학문에 있어서는 독보적 존재였다고 한다. 그러나 스승 위산을 만나고 나서 교학敎學에 한계를 느끼고 선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향엄이 선에 전념하게 된 계기를 『조당집』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위산이 향엄에게 말했다. “지금껏 네가 터득한 지식은 눈과 귀를 통해 타인의 견문과 경권이나 책자에서 얻은 것일 뿐이다. 나는 그것을 묻지 않겠다. 네가 처음 부모의 태에서 나와 동서東西를 구분하지 못할 때의 본분사를 일러보라. 내가 너의 공부를 가늠해보려 한다.” 향엄은 그러나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스승의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위산은 “내가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네가 스스로 일러야 비로소 너의 안목이 열릴 것이다”고 답했다. 향엄은 스승에게 이를 답을 찾기 위해 온갖 서적을 뒤졌으나 어디에서도 합당한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향엄은 자신이 갖 고 있던 모든 경권과 책자들을 불살라버렸다. 이것이 향엄이 선에 열중하게 된 계기다.

 

“스스로 일러야 너의 안목이 열린다”

 

『무문관』 제5칙에 나오는 이 공안은 향엄이 스승의 가르침에 영향받은데 기인하고 있다. 책에서 찾을 수도 없거니와 웬만한 수행능력으로서도 풀 수 없는 대표적인 공안이다. 입을 열면 떨어져 죽을 것이 확실하고 그렇다고 아무 답을 해주지 않으면 묻는 이에 대한 올바른 처신이 아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인 것이다. 한마디로 궁지에 몰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내몰린 것이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궁즉통窮卽通이 그것이다.

 

언어는 입으로만 말하는 게 아니다. 눈으로도 말할 수 있고 손으로도 말할 수 있으며 발로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일러 신체언어라 한다. 일명 보디랭귀지Body Language다. ‘보디랭귀지’는 때에 따라선 논리적 언어보다 설득력을 더할 때가 있다. 특히 외국어를 모른 체 해외여행을 나서는 사람들로선 언어 소통을 위해 ‘보디 랭귀지’에 각별한 재능을 보여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낯선 이국땅에서 말은 통하지 않는데 위급한 상황을 맞았다고 가정해보자.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보디랭귀지’뿐이다.

 

그러나 ‘보디랭귀지’가 만국의 언어는 아닌 게 확실하다. 어떤 표현으로 의사 전달을 할까 현지인이 금새 눈치 챌 수 있는 ‘보디랭귀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때 그 때 그 때 기발한 아이디어로 ‘보디랭귀지’를 선보여 위기 상황을 모면했다는 경험담이 많다. 그만큼 ‘보디랭귀지’는 상대방이 금방 파악할 수 있게끔 재치가 깃들어 있다면 만국의 언어로 통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우리나라에 저서도 소개돼 있고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 (주)슈퍼보스의 대표로 있는 데이비드 프리맨틀David Freemantle은 다음과 같은 말로 보디랭귀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물들은 미세한 몸짓 신호를 읽어내는 데 뛰어나다.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프리맨틀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선조들에게서도 동물로부터 배우는 지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개미와 개구리는 기상예보의 첨병이다. 새들의 날개 짓을 통해 폭풍을 예견하기도 한다. 동물들의 미세한 몸짓은 그들의 생명과 직결돼 있다. 이러한 미세한 몸짓을 관찰하여 날씨를 미리 파악해 온 선조들의 지혜는 놀랍다.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의 저자인 이민규 심리학 박사는 신체 언어와 관련해 이렇게 주장한다.
“어느 조직이건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 그들은 대개 조직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신체 언어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동물적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체 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은 데이트나 육아와 같은 개인적인 일에서부터 세일즈, 비즈니스나 경영관리, 범죄 수사, 정치까지 거의 모든 일에서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 모든 일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과 관계가 있으며 공감이란 상대에 대한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악 하는 기술의 핵심은 그 사람의 음조, 몸짓, 표정 등 신체언어를 정확하게 해독하는 능력이다.”
말에 격조가 있듯이 신체 언어에도 격조가 있다. 말에 거짓말이 있듯이 신체 언어에도 거짓됨이 있다. 다시 말해 신체 언어도 의사소통의 한 방법으로써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심을 듬뿍 담아 신명나게 표현해야 상대방도 기꺼이 신체 언어를 수용하게 된다. 잘못 표현된 신체 언어는 생각지 못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선사들의 법거량에서도 ‘보디랭귀지’를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방棒을 사용하는 덕산 선사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선사들도 덕산 선사 못지않게 무애행無碍行으로 진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강(田岡, 1898-1975) 선사는 어느 날 법당에서 요사로 가던 중 오줌이 급했다. 선사는 참지 않고 시원하게 방뇨했다. 그때 원주가 이 광경을 보고 소리쳤다. “어느 놈이 법당 앞에서 오줌을 누느냐?” 그러자 선사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처님의 진신인데 어느 곳을 향해 오줌을 누란 말이냐?” 시원한 방뇨를 통해 일갈하는 한 광경이다.

 

향곡은 고봉의 다리를 바늘로 찔렀다

 

고봉 화상과 향곡 스님의 바늘 일화도 유명하다. 고봉 화상이 누더기를 깁고 있는 향곡 스님에게 물었다. “바느질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향곡 스님은 누더기에서 바늘을 빼내 고봉 화상의 다리를 찔렀다. 고봉 화상이 “아야!” 하니 다시 바늘로 다리를 찔렀다. 그러자 고봉 화상이 “그 녀석, 바느질을 곧잘 하는구나.” 했다. 이것은 젊은 수좌의 바느질에 참견하는 큰스님의 한가로움을 농락하는 선기를 발휘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선가의 보디랭귀지는 표현하는 이와 받아들이는 이의 해석이 제각각 다를 수가 있다. 또한 곡해의 순간도 있다. 법기法器가 다르면 제대로 된 법거량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고봉 화상과 향곡 스님처럼 법기가 잘 다듬어진 이들에겐 매사가 법거량이다.

궁의 경지에 이르러야 이같이 서로 통하는 길을 가게 된다. 수십 번 궁지에 몰려야 빠져나갈 방도를 알아챌 수 있다는 얘기다.

 

‘서래의’는 달마가 왜 중국에 오게 되었느냐는 질문이다. 불법의 대의를 묻는 중국선사들의 대표적인 질문 방식이다. 이 답을 구하는 것이 출가자들의 사명이자 이 답을 들려줘야 하는 것이 스승의 도리다. 하지만 이 공안은 그 답을 들려줄 수 없게끔 난해한 장면을 설정해 놓고 있다. 입을 열면 떨어져 죽는다. 그렇다고 서래의를 묻는 이에게 답을 안 해 줄 수도 없다. ‘보디랭귀지’는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가지만 입에 물고 위태롭게 지내는 사람에게 명예와 권력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고관대실과 절세미인이 필요할 일이 뭐 있을 것인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일대 본분사를 해결해야 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선 나 자신을 더욱 더 궁지로 몰아넣어야 한다. 그래야 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공안은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말하자면 궁즉통극즉반 窮卽通極卽反이다. 궁하면 통하고 극에 달하면 반전이 기다리는 법이다.

 

옛날 어느 왕이 두 마리의 매를 선물 받았다. 그 중 한 마리는 커서도 날지 못하고 늘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왕은 매를 날게 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왕은 매를 키우는 한 농부에게 한 달 내 매가 날 수 있도록 하라며 숙제를 냈다. 매가 날지 못할 경우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도 했다. 고민에 빠진 농부가 어느 날 결심을 굳힌 듯 매가 늘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잘라버렸다. 앉아있을 자리가 없어진 매가 그제야 하늘을 날았다. 농부 역시 궁지에 빠져있다 통하는 길을 찾아 낸 것이다. 

궁해야 통하는 길을 볼 수 있는 법이다. 세상에 답이 없는 경우는 없다. 궁지야말로 그 답을 찾아내는 통로이다. 이번 공안은 이를 일깨워주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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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선시 읽는 법을 소개한 『마음의 밭에 달빛을 채우다』를 펴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오도송에 나타난 네 가지 특징」·「호국불교의 반성적 고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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