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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참선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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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0 년 1 월 [통권 제8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70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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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6 · 7대 종정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일체유심一切唯心〕.”라고 말합니다.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 만큼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봐야 할 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심心’ 한 자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심’자 한 자 위에 서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자기의 본성, 즉 자성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자기의 본성, 즉 자성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불교에 관심이 있고 참선 좀 한다는 사람은 참선 시작한 지 한 사나흘도 안 되어 모두 견성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곳에도 견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견성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살지가 다하여 멀리 미세망상을 떠나면

마음의 성품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을 구경각이라 한다.

菩薩地盡, 遠離微細, 得見心性, 名究竟覺.”

 

보살이 수행을 하여서 마침내 십지十地와 등각等覺을 넘어서서 가장 미세한 망상인 제8阿賴耶識의 근본무명根本無明까지 완전히 다 떨어져 버리면 진여眞如가 나타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견성이고 구경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묘각妙覺이라고도 합니다. 또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상정각을 이루면 부처님 성품을 볼 수 있고,

부처님 성품을 보면 무상정각을 이룬다.

成無上正覺, 得見佛性, 得見佛性, 成無上正覺.”

 

위없는 바른 깨달음, 즉 성불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보는 것이고, 불성을 보는 견성이 바로 바른 깨달음인 성불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구경각이 견성’이라는 것과 내용이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열반경』에서는 더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의 지위가 십지가 되어도 菩薩地盡十地,

불성은 아직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尙未明了知見佛性.”

 

결국 보살의 수행단계가 십지가 되어도 견성 못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불해야만 견성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견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경지보살은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究竟地菩薩, 如微闇中見物.”


어두운 곳에서는 물건의 바른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십지나 등각 위의 구경지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국 일체 만법의 본모습인 자성을 보려면,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듯 하는 수행단계를 지나서 밝은 햇빛 속으로 쑥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즉 구경각을 성취해서 성불하는 것이 바로 견성인 것입니다. 

 그럼 선종禪宗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선종의 스님들 중에서도 운문종雲門宗의 종조인 운문雲門 스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십지보살이 설법은 구름 일고 비 오듯 하여도

견성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과 같다.

十地菩薩, 說法如雲如雨, 見性如隔羅穀.”

 

십지보살은 법운지法雲地보살이라 하여, 법문을 할 때는 온 천지에 구름이 덮이고 비가 쏟아지듯이 그렇게 법문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견성, 즉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 같다는 말이니, 비단으로 눈을 가렸는데 어떻게 물체를 바로 볼 수 있겠습니까.

 

앞줄 왼쪽에서부터 춘성 스님, 성철 스님, 탄허 스님. 1969년 거행된 오대산 월정사 적광전 상량식 당시 촬영된 사진인 듯하다.

 

이렇듯 대승불교의 총론總論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서는 보살지가 다 끝난 구경각을 견성이라 했고, 부처님 최후의 법문인 『열반경』에서는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인데 십지보살도 견성 못 했다고 하였고, 유식종唯識宗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유가사지론』에서는 불성을 보는 것은 구경지보살도 어두운 가운데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하였고, 종문의 조사인 운문스님은 십지보살도 견성하지 못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선禪과 교敎를 통해서 어느 점에서 보든지 간에 견성이 바로 성불이며, 그것은 보살수행의 십지와 등각을 넘어서 구경각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지는 고사하고 삼현三賢도 아닌 단계, 비유하자면 층층대의 맨 꼭대기가 견성인데 그 첫째 계단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견성했다고, 도통道通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견성해서 다시 성불한다고 하니 대체 그 견성은 어떤 것인지, 이것이 요새 불교 믿는 사람의 큰 병통病痛입니다.

 

그렇다면 이 병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면 보조普照 스님이 지은 『수심결修心訣』에서 비롯됩니다. 거기에 돈오점수頓悟漸修라 하여 자성을 깨치는 것을 돈오라 하고, 돈오한 후에 오래 익힌 습기習氣를 없애는 점수漸修를 닦아야 한다고 하였고, 그 돈오한 위치가 보살의 수행 차제次第의 십신초十信初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보조 스님은 중국의 규봉圭峰 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돈오점수를 주장했습니다만, 규봉 스님은 십신초인 보살지를 돈오 즉 견성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또 그가 주장한 깨침이란 것은 단지 교학상의 이론을 아는 해오解悟를 말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조 스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돈오를 견성이라 하면서, 그 지위가 십신초라고 『절요節要』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려시대의 큰스님인 보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잘못되었겠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경經이나 논論에서는 분명히 삼현, 십지를 넘어선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을 견성이라 하고 있으니, 결국 보조 스님의 『수심결』이 『기신론』보다 낫고, 『열반경』보다 낫고, 『유가사지론』보다 낫다는 말인가?

 

또 종문의 대표적 스님인 운문 스님보다 낫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보조 스님이 『수심결』에서 말씀하신 ‘십신초에서의 돈오가 견성’이라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시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지보살이니 구경각이니 하는 그 깨달음의 경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표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종문에 분명한 표준이 있습니다.

 

『화엄경』「십지품十地品」에 “보살지가 7지地가 되면 꿈속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여여하다.”고 하였습니다. 참선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을 때에도 아무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한결같으면 ‘7지 보살’이라고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7지 보살이 설사 꿈에는 공부가 일여一如하다 할지라도 깊은 잠에 들면 캄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잠이 깊이 들어도 일여한 경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잠을 자는 것 같지만 外似現睡,

실지는 잠을 자지 않는다. 實無睡也.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어도 정신 상태는 항상 밝아 있어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밝아 있는 정신 상태가 올 것 같으면 8지 보살 이상, 즉 자재위自在位라 합니다. 그런데 자재위에는 두 종류가 있어서 깊은 잠, 즉 숙면에서 일여하여도 아뢰야식의 미세한 망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8지 이상의 자재보살이고, 그 미세망상까지 완전히 다 끊어져 버리면 그때에는 진여眞如가 드러나고 그것이 견성이고 부처님입니다. 그때는 여래위如來位라 합니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공부하는 단계를 보면, 첫째 동정일여動靜一如, 즉 일상생활에서 가고 오고 할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을 하거나 안 하거나, 변함없이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여여불변如如不變하여야 합니다.

 

동정일여가 되어도 잠이 들어 꿈을 꾸면 공부는 없어지고 꿈속에서 딴짓 하며 놀고 있는데, 꿈에서도 일여한 것을 몽중일여夢中一如라 합니다.

 몽중일여가 되어도 앞에서 말했듯이 잠이 깊이 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이 푹 들었을 때에도 여여한 것을 숙면일여熟眠一如라 합니다.

 

숙면일여가 되어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 말입니다. 그리하여 깨쳐야만 그것이 실제 견성입니다.


 그런데 참선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숙면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도 고사하고, 더구나 동정일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견성했다, 깨쳤다고 인정해 달라고 나한테 온 사람만도 수백 명은 보았습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무엇인가가 정신을 확 덮어 버립니다. 그때에는 자기가 깨친 것 같고 자기가 부처님보다 나은 것 같고, 조사스님보다 나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들게 되면 누구 말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설명해 주면 어떤 사람은 잘못된 줄 알고 다시 공부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병을 한동안 앓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젊은 스님이 불교를 믿고 참선을 한다는 처사들 모임에 갔더라고 합니다. 약 백여 명 모인 처사들 중에서 90명은 견성했더라는 것입니다.

 “이럴 것이 아니라 해인사 큰스님께 가서 한번 물어보시오.”

 “뭐, 큰스님이니 작은 스님이니 물어볼 것 있습니까.”


 큰스님, 작은 스님이 소용없다니, 그렇게 되면 부처님도 소용없습니다. 이리 되면 곤란합니다. 좀 오래 전의 일입니다. 

 70세 남짓 된 노인이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그때에도 3천 배 하고서 내 방에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안 오려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하도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합니다.

 “나이가 70이나 되면서 옆의 사람이 가보라 한다고 쫓아왔단 말이오. 자기가 오기 싫으면 안 오면 그만이지, 대체 무슨 일로 옆에서는 그렇게 권했소?”


 “내가 40여 년을 참선을 하는데 벌써 20년 전에 확실히 깨쳤습니다. 그 후 여러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물어봐도 별 수 없어 이젠 찾아다니지도 않는데, ‘성철 스님께 가보라’고 하도 이야기해서 할 수 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어쨌든 잘 왔소. 들어보니 노인은 참 좋은 보물을 갖고 있네요. 잠깐 앉아 있는데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몇 시간도 금방 지나가 버리니, 그런 좋은 보물이 또 어디 있겠소. 내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딱 양심대로 말하시오.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그 보물이 꿈에도 있습니까?”

 그러자 눈이 동그래지는 것입니다.

 “꿈에는 없습니다.”

 “뭐, 꿈에는 없다고? 이 늙은 놈아! 꿈에도 안 되는 그걸 가지고 공부라고 선지식善知識이 있니 없니 하고 있어? 이런 놈은 죽어야 돼. 하루에 만 명을 때려죽여도 괜찮아, 인과도 없어!”

 

그리고는 실제 주장자로 두들겨 패주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맞고만 있더군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더니 자기 공부가 틀린 줄 알고서 다시 새로 공부를 배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병폐가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꿈에도 안 되는 이것을 가지고 자기가 천하제일인 듯이 하고 다닙니다. 여기 이 대중 가운데에도 나한테 직접 덤빈 사람도 몇 사람 있습니다. 요새도 보면 그 병을 못 버리고 무슨 큰 보물단지나 되는 것처럼 걸머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상으로 견성이라고 하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떤 방법에 의하면 견성을 할 수 있는가?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관법觀法을 한다, 주력呪力을 한다, 경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운다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 신도나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나 수녀도 백련암에 와서 3천 배 절하고 화두話頭를 배워 갑니다. 나한테서 화두 배우려면 누구든지 3천 배 절을 안 하면 안 가르쳐 주니까.

 며칠 전에도 예수교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천 배 절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절을 하는 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 반대하고 예수님 욕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고 절하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 종교 안 믿는 사람은 모두 다 나쁜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면 그는 점잖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욕하고 나를 해치려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돕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에 앉게 하라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닦아야 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인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 수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왜관에 있는데, 그 수도원의 독일인 원장이 나한테서 화두를 배운 지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도 종종 왔는데, 화두 공부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도 화두를 배워서 실제로 참선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마음을 닦는 근본 공부인 선禪을 알아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두를 말하자면 또 문제가 따릅니다. 화두를 가르쳐 주면서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배우라고 해서 배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은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고는 뭐라고 뭐라고 아는 체를 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앞에 의자에 앉아계신 분이 성철 스님. 뒷줄 서있는 스님 가운데 왼쪽에서 두 번째가 삼밀 스님, 세 번째가 원택 스님, 네 번째가 원기 스님, 다섯 번째가 원명 스님.

 

화두, 즉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을 떠 확철히 깨쳐야 알지 그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여 비록 몽중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이고 또 숙면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인데, 그런데 망상이 죽 끓듯이 끓고 있는 데서 어떻게 화두를 안다고 하는지, 이것이 조금 전에 말했듯이 큰 병입니다. 그럼 어째서 화두를 안다고 하는가? 껍데기만 보고 아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만 보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말 밖에 뜻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예전 종문의 스님들은 ‘암호밀령暗號密令’이라고 하였습니다.

 

암호라는 것은 본래 말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이지요. ‘하늘 천天’이라고 말할 때 ‘천’ 한다고 그냥 ‘하늘’인 줄 알다가는 그 암호 뜻은 영원히 모르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안은 모두 다 암호밀령입니다. 겉으로 말하는 그것이 속 내용이 아닙니다. 속 내용은 따로 암호로 되어 있어서 숙면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가장 큰 병통을 가진 이는 일본 사람들입니다. 일본 구택대학駒澤大學에서 『선학대사전禪學大辭典』이라는 책을 약 30여 년 걸려 만들었다고 하기에 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니 중요한 공안은 전부 해설해 놓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 참선할 필요 없습니다. 공안이 전부 해설되어 있으니까. 내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가장 나쁜 책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선학대사전』이야. 화두를 해설하는 법이 어디 있어.”

 구택대학은 조동종曹洞宗 계통입니다. 조동종의 종조되는 동산양개洞山良介 화상이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스님의 불법과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를 위해 설파해 주지 않았음을 귀히 여긴다.

不重先師佛法道德, 只貴不爲我說破.”

 

화두의 생명이란 설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또 설명될 수도 없고, 설명하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죽어 버립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리 단청丹靑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가 눈을 떠서 실제로 보게 해줘야 합니다.

 

이처럼 조동종의 개조되는 동산 스님은 화두란 설명하면 다 죽는다고, 설명은 절대 안 한다고 평생 그렇게 말했는데, 후세에 그 종파의 승려들이 떼를 지어서 수십 년을 연구하여 화두를 설명한 책을 내놓았으니, 이것은 자기네 조동종이나 선종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조동종 양개화상에 대해서도 반역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동종은 종명宗名을 바꾸어야 될 것입니다. 반역종反逆宗이라고.

 

일본에 이런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일본 불교학자로 세계적 권위자인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라는 학자가 있는데, 언젠가 해인사에도 왔더라고 전해만 들었습니다. 그의 저서로 『동양인의 사유방법』이라는 책이 있는데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습니다. 그 책 속에 보면 선종의 화두인 ‘삼서근麻三斤’에 대해 “무엇이 부처님이냐고 물었는데 어째서 ‘삼서근’이라고 대답했느냐 하면, 자연현상은 모든 것이 절대이어서 부처님도 절대이고 삼서근도 절대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물은 데 대해 삼서근이라 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딱 잘라서 단안을 해버렸습니다. 큰일 아닙니까. 혼자만 망하든지 말든지 하지 온 불교를 망치려고 하니.

 

그러나 그의 스승인 우이 하쿠주宇井伯壽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선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다.” 이렇게 아주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학자적인 양심입니다. 자기는 안 깨쳤으니까, 자기는 문자승文字僧이니까 선에 대해 역사적 사실만 기록했지 선 법문, 선리禪理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도 하지 않고 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학자의 참 양심입니다. 그런데 나카무라는 화두에 대해 딱 단안을 내리고 있으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화두를 설명하려고 하면 불교는 영원히 망해 버리고 맙니다.


 여기에 덧붙여 화두의 하나인 ‘뜰 앞의 잣나무〔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에 대해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선종에서 유명한 책인 『벽암록碧巖錄』에 송頌을 붙인 운문종의 설두雪竇 스님이 공부하러 다닐 때 어느 절에서 한 도반과 ‘정전백수자’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문득 보니 심부름하는 행자行者가 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간 후에 불렀습니다.


 “이놈아, 스님네들 법담法談 하는데 왜 웃어?”

 “허허, 눈멀었습니다. 정전백수자는 그런 것이 아니니,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흰 토끼가 옛길에 몸을 눕히자 白兎橫身當古路,

눈 푸른 매가 언뜻 보고 토끼를 낚아 가네. 蒼鷹一見便生擒.

뒤쫓아 온 사냥개는 이를 모르고 後來獵犬無靈性,

공연히 나무만 안고 빙빙 도는 도다. 空向古椿下處尋.

 

‘뜰 앞의 잣나무’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지 ‘잣나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 눈 뜬 매는 토끼를 잡아가 버리고 멍텅구리 개는 ‘잣나무’라고 하니 나무만 안고 빙빙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전백수자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는 것이니 나무 밑에 가서 천년 만년 돌아봐야 그 뜻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금 전에 말했듯이 ‘화두는 암호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생각나는 대로 이리저리 해석할 수 없는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두에 대해 또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불감 근佛鑑懃 선사의 법문입니다.

 

“오색비단 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彩雲影裏神仙現,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手把紅羅扇遮面.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急須著眼看仙人,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莫看仙人手中扇.”

 

생각해 보십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었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을 가리는 부채를 봤다고 해서 신선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화두에 있어서는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수자’니 ‘삼서근’이니 ‘조주무자趙州無字’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 본 사람이 아닙니다.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 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화두는 암호입니다. 이 암호 내용은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느냐 하면 잠이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경지에서 깨쳐야만 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못 푼다는 것, 이같은 근본 자세가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견성인 것입니다. 동시에 ‘뜰 앞의 잣나무’라는 뜻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날 스님들은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임제종臨濟宗의 중흥조로 오조법연五祖法演, 원오극근圜悟克勤, 대혜종고大慧宗杲, 이 세 분 선사가 임제종을 크게 진흥시켜 천하에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대혜 스님이 공부한 것이 좋은 참고가 됩니다.

 

대혜 스님이 공부하다가 스무 살 남짓 됐을 때 깨쳤습니다. ‘한 소식’해 놓고 보니 석가보다 낫고 달마보다도 나아 천하에 자기가 제일인 것 같았습니다. ‘어디 한번 나서 보자, 어디 누가 있는가?’ 하고 큰스님들을 찾아가 보니 모두 별것 아닙니다. 자기가 보기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자기가 제일이라고 쫓아다니는 판입니다. 당시 임제종 황룡파黃龍派에 담당문준湛堂文準 선사가 계셨습니다. 대혜 스님이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병의 물을 쏟듯, 폭포수가 쏟아지듯 아는 체하는 말을 막 쏟아 부었습니다. 담당 스님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자네 좋은 것 얻었네. 그런데 그 좋은 보물 잠들어서도 있던가?” 

 자신만만하여 횡행천하橫行天下하여 석가보다도, 달마보다도 낫다 하던 그 공부가 잠들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스님, 다른 것은 전부 다 자신 있습니다. 그런데 잠들어서는 그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잠들어서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석가, 달마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것은 병이야 병, 고쳐야 돼.”

 

이렇게 자기 병통을 꽉 찌르니 항복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죽자고 공부하다가 나중에 담당스님이 병이 들어 열반하신 후에는 그 유언을 따라 원오극근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무슨 말을 걸어 보려고 하니 마치 절벽을 만난 듯 자기 공부는 거미줄 정도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원오 스님이 자기의 공부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기색이면 그를 땅 속에 파묻어 버리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찾아갔는데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하, 내가 천하가 넓고 큰 사람 있는 줄 몰랐구나.”

 크게 참회하고 말했습니다.

 “스님, 제가 공연히 병을 가지고 공부인 줄 잘못 알고 우쭐했습니다. 문준 선사의 법문을 듣고 공부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잠들면 공부가 안 되니 어찌 해야 됩니까?”

 “이놈아, 쓸데없는 망상하지 말고 공부 부지런히 해. 그 많은 망상 전체가 다 사라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공부에 가까이 가는 법이야.”

 

이렇게 꾸중을 듣고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원오 스님 법문 도중에 확철히 깨달았습니다. 기록을 보면 ‘신오神悟’라 하였습니다. 신비롭게 깨쳤다는 말입니다. 그때 보니 오매일여입니다. 비로소 꿈에도 경계가 일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원오 스님에게 갔습니다. 원오 스님은 말조차 들어보지 않고 쫓아냅니다. 말을 하려고 하면 “아니야 아니야〔不是不是〕.” 말을 하기도 전에 아니라고만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화두를 묻습니다.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유구무구有句無句 여등의수如藤倚樹〕’라는 화두를 묻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는 환하게 알 것 같아 대답을 했습니다.


 “이놈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것 아니야. 공부 더 부지런히 해!”


 대혜 스님이 그 말을 믿고 생명을 다 바쳐 더욱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참으로 확철히 깨쳤습니다. 이렇듯 대혜 스님은 원오 스님에게 와서야 잠들어도 공부가 되는 데까지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확철히 깨쳤습니다.

 

잠이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경계를 두고 원오 스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애석하다. 죽어버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겠구나〔可惜死了不得活〕.”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지고 잠이 들어서도 공부가 여여한 그때는 완전히 죽은 때입니다. 죽기는 죽었는데 거기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아나느냐? “화두를 참구 안 하는 이것이 큰 병이다〔不疑言句 是爲大病〕.”라 했습니다.

 

공부란 것이 잠이 깊어 들어서 일여한 거기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견성이 아니고 눈을 바로 뜬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만 그것이 바로 깨친 것이고, 화두를 바로 안 것이며, 동시에 마음의 눈을 바로 뜬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스님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나라 선문 중에 태고太古 스님이 계십니다.

 

태고 스님은 공부를 시작한 지 20여 년 만인 40여 세에 오매일여가 되고 그 후 확철히 깨쳤습니다. 깨치고 보니 당시 고려의 큰스님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인가印可해 줄 스님도 없고, 자기 공부를 알 스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임제정맥臨濟正脈을 바로 이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태고 스님 같은 분은 깨치고,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스님이 항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점점 오매일여한 때에 이르렀어도 漸到寤寐一如時

 다만 화두 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 只要話頭心不離.”

 

이 한마디에 스님의 공부가 들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여 오매일여한 경계, 잠이 아무리 들어도 일여하며 8지 이상 보살 경계, 거기에서도 화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몽중일여도 안된 거기에서 화두 다 알았다고 하고 내 말 한번 들어보라, 하는데 이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귀하고 좋은 약을 가지고 와서 “이 약만 먹으면 산다.” 하며 아무리 먹으라고 해도 안 먹고 죽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먹여서 살려 낼 재주 없습니다. 배가 고파 다 죽어가는 사람보고 만반진수滿盤珍羞를 차려 와서 “이것만 잡수시면 삽니다.” 해도 안 먹고 죽으니, 부처님도 어떻게 해볼 재주가 없습니다. 아난이 30여 년 부처님 모셨지만 아난이 자기 공부 안 하는 것은 부처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오늘 법문을 요약하면,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마음 심’자 한 자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만법을 다 알 수 있고, 삼세제불을 다 볼 수 있고, 일체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바로 자성을 보는 것이고 견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든지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바로 떠야 되는데 가장 빠른 길이 화두입니다.


이 화두란 것은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경계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거기에서 크게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무슨 경계가 나서 크게 깨친 것 같아도 실제 동정에 일여하지 못하고, 몽중에 일여하지 못하고, 숙면에 일여하지 못하면 화두를 바로 안 것도 아니고, 견성도 아니고, 마음의 눈을 뜬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근본 표준이 어디 있느냐 하면 “잠들어서도 일여一如 하느냐, 않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화두를 하여 잠이 푹 들어도 크게 살아나고 크게 깨쳐서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니, 실지로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생겨 부처님 혜명慧命을 바로 잇도록 노력합시다.                         


│1981년 음 6월15일, 방장 대중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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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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