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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한국 2 | 한국의 전승불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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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섭  /  2020 년 2 월 [통권 제8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8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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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섭 동국대 교수

 

불학과 불교학 

 

대개 우리는 ‘진리에 눈을 뜬 이’를 ‘붓다’라고 부른다. 동시에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닌 참다운 이치를 ‘진리’라고 한다. 붓다는 ‘십이연기’를 통해 진리에 눈을 뜬 뒤 ‘사성제’를 가르쳤다.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중도와 연기를 깨친 붓다의 첫 가르침이다. 사성제와 십이연기로부터 전개된 불교는 ‘중도 연기’의 기호로 집중되고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불교사상사에서는 ‘붓다에 대한 연구’를 ‘불학’Buddhology이라 하고,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탐구’를 ‘불교학’ 즉 ‘불교연구’Buddhist Studies라고 한다. 따라서 ‘불교’가 붓다의 가르침인 불교이듯이, 불교학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학문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현대의 불교학자들은 붓다가 서구에서 발견되었고, 서구인들에 의해 근대불교학이 발명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서구라파 사람들의 관점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붓다는 이미 고대로부터 성인으로서 존재해 왔고, 그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는 불학으로서 자리해 왔다. 공맹순公孟筍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인 유학과 노장신한老莊申韓 및 황제黃帝와 열자 등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인 도(선)학에 상응해 말이다. 이 때문에 서구에서 발견되고 유럽인들에 의해 발명된 ‘근대’ 불교학 이전에 동아시아에서는 오랫동안 ‘전승’ 불학이 자리해 오고 있었다. 그것도 유학과 도학과 함께 국학의 범주 속에서 말이다. 이것을 과학적 분석적 합리적 방법을 지닌 서구 학문의 잣대 유무로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불교학만 얘기한다면 우리의 전통학을 방기하는 것이다. 전통은 사전에서는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과거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바람직한 사상이나 관습, 행동 따위가 계통을 이루어 현재까지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통학이란 ‘어떤 공동체에서 오랫동안 전해져오는 사상과 관습 및 행동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전통의 정의에서 ‘바람직하다’는 것은 ‘기준’ 혹은 ‘모범’ 또는 ‘본보기’로 삼아왔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는 고유한 ‘표준’이라고 할 수 있다. 불도유 또는 불선유 삼교의 하나인 불학은 도학과 유학과 함께 국학의 본보기로서 이 땅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이렇게 불학은 계학 정 학 혜학의 삼학의 지평 위에서 불보 법보 승보의 삼보와 경장 율장 논장의 삼장의 학문적 체계를 내면화해 왔다. 

 

고구려의 승랑과 의연과 보덕, 백제의 겸익과 현광과 혜균, 신라의 원측과 원효와 의상 등의 학문적 체계는 삼학과 삼보와 삼장의 체계를 통섭하고 있다. 이후 고려의 균여와 지눌과 일연, 조선의 보우와 휴정과 경허 등도 이러한 체계를 계승해 왔다. 이들은 학문의 내용인 ‘무엇’What보다는 학문의 방법인 ‘왜’Why에 대해 폭넓게 배우고[博學], 자세히 물으며[審問], 신중히 생각하고[愼思], 더 밝게 분변하며[明辯], 독실히 행하는[篤行] 길을 배우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근대’ 이전에 이 땅에 불교학이 없었다고 얘기를 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불학’은 있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아니될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이라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지닌 과학적 사유의 틀이 이 땅에 없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종교로서의 불교를 ‘반反과학’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서구학자들과 ‘과학’의 독선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격의불교 - 주체적 학문 방법 

 

이러한 불교와 불학은 중국의 전한시대 말엽과 후한시대를 지나 남북조 시대에 북쪽과 남쪽의 육로와 해로를 거쳐 중국과 한국에 전해졌다. 당시 고대에는 고구려와 백제, 가야와 신라에 전래되고 수용되어 공인되고 유통되었다. 중국에 전래된 ‘불경 한역’의 과정에서 이뤄진 ‘격의’格義와 종파 형성의 과정에서 수립된 ‘교판’敎判은 불교 연구의 주요 방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격의’는 인도 서역 문명의 외적 사태를 중국 동아시아 문명의 내적 주체로 해석해낸 것이었다. 이것은 불경 한역의 ‘연구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격의는 본의기로 진입하기 위한 과도기의 불교 이해이지만 전통학의 계승 아래에서 수입학의 과정을 거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주체적 학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불교의 주요 개념인 ‘공’空을 ‘무’無로, ‘열반’涅槃을 무위無爲로, ‘진여’眞如를 ‘본무’本無 등으로 옮겼다. 비실체성을 상징하는 ‘공’을 존재론적인 부재를 의미하는 ‘무’로 옮긴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또 일체의 번뇌를 끊은 상태를 가리키는 ‘열반’을 아무런 인위와 작위가 없는 상태인 ‘무위’로 옮긴 것도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나아가 우리의 개념적 분별의 개입이 이뤄지기 전의 ‘진여’를 본래부터 없는 것을 의미하는 ‘본무’로 옮긴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격의는 새로운 외적 사태인 불교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장과 주역의 개념을 원용한 주체적 학문 방법이었다. 

 

이것은 조선 말 대한 초에 이 땅에 들어온 서구의 주식이자 그리스어 혹은 라틴어에 어원을 둔 포르투갈 말인 ‘빵’Panis을 조선인들이 즐겨 먹던 ‘떡’으로 옮기는 작업과 같았다. 즉 키가 크고 눈이 푸른 서양인들이 즐겨먹던 조선에 없던 ‘빵’을 다중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조선대한인들은 스스로 즐겨먹던 ‘개떡’을 원용하여 이해시켜 나갔다. 그런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빵’이라는 말이 지닌 영토가 확장되어 나갔다. 이제는 더이상 ‘떡’으로 옮길 필요가 없이 곧바로 ‘빵’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격의’의 불교는 상당히 긴 터널을 지나 본래의 의미를 전하는 ‘본의’本義의 불교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제는 ‘공’을 ‘공’으로, ‘열반’을 ‘열반’으로, ‘진여’를 ‘진여’로 옮겨도 그 의미가 전달되는 시대가 되었다. 비로소 진정한 뜻 내지 근본의 뜻이 전달되는 본의本義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그런데 격의는 중국 불교 전래 초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격의는 전통학을 계승하면서도 수입학의 출현을 맞이할 수 있는 주체적 학문방법이기 때문이다. 격의가 인도유러피안 언어인 산스크리트를 한문으로 옮기는 필수적 과정이었다면, 오늘날의 격의는 영어 등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필수적 과정으로 집중되고 있다. 영어 알파벳 ‘Radio’는 외래어 표기인 ‘라디오’로 옮길 때 비로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우리말 ‘라디오’로 자리잡는다. 마찬가지로 팔리어 ‘sati’를 ‘사띠’로, 산스크리트 ‘smrti’를 ‘스므르띠’로 옮기는 ‘음역’音譯 혹은 ‘음사’音寫 과정과 함께 ‘새김’ 또는 ‘깨어있음’ 혹은 ‘마음챙김’ 등의 번역 과정을 함께 해야 우리말 ‘보캐브러리’(語彙, 用語)를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격의’는 과거의 학문 방법으로서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불학 혹은 불교학의 주체적 학문 방법으로서 활용해야만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말로 철학하기’와 ‘우리말로 불학하기’가 가능할 것이다. 

 

교상판석 - 능동적 학문 방법

 

교상판석敎相判釋 즉 교판敎判은 붓다의 입멸 이후 인도에서 약 일천여 년에 걸쳐 중국에 전해져 한역된 수많은 불전들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효율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만들어낸 불교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교판은 불설의 핵심을 알기 위해 불전에 대한 시간五時적 · 방법化儀적 · 내용化法적 검토 위에서 이루어진 경전해석학이자 학문방법론이었다. 

 

붓다가 설한 많은 경전들이 중국에 이르러 번역이 되자 불학자들은 어느 것이 ‘최고最高의 불설’이자 ‘최후最後의 불설’인지를 따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붓다의 교설이 설해진 시기와 내용과 방법을 묻기 시작했다. 본디 교판은 수당 이전 시대까지는 한역불전에 대한 공정한 이해를 도모하려는 경전해석학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수당 이후 시대에 교판은 자종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즉 각 종파들은 자신들이 의지하는 소의경론을 ‘최고의 가르침’ 혹은 ‘최후의 가르침’으로 설정하였다. 이들은 자종自宗의 소의경론所依經論을 높이고 타종他宗의 소의경론을 평가절하 하였다. 이에 천태지의(538-597)는 양자강 남쪽에 전래된 교상敎相을 분류하고 해석하여 ‘남삼북칠’南三北七의 교판으로 정리해 냈다. 그 결과 이들 교판에 의거하여 종파가 형성되었다. 

 

지의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에 『화엄경』을 설했다고 보았다. 그는 붓다가 초7일은 선정에 들었다가 2*7일에 『화엄경』을 설하여 3*7일까지 설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백 명의 비구들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가르침이라 자리를 떠나 다시 12년 동안 녹야원에서 『아함경』을 설했다고 하였다. 이어 8년 동안 대승 경전인 『방등경』을 설하였고, 다시 21년 동안 『반야경』을 설했으며, 마지막 8년을 『법화경』을 설한 뒤에 1일1야 동안 『열반경』을 설했다고 하였다. 그런 뒤에 5시의 하위에 다시 화법사교인 장 · 통 · 별 · 원교과 화의사교인 돈 · 점 · 비밀 · 부정교의 8교를 시설하였다. 이것이 북방불기에 근거한 49년 전법설이다. 반면 1956년 네팔의 카드만두에서 세계불교도우의회WFB가 남북방 불기를 통합해 1956년을 2500년으로 확정한 것에 의해 이제 45년 전법설이 통설이 되었다.

 

이어 법상종을 창종한 현장과 규기는 유식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에 의거하여 제1시에는 유교인 『아함경』을, 제2시에는 공교인 『반야경』을, 제3시는 중도교인 『해심밀경』을 설하였다고 보았다. 한편 화엄종을 집대성한 법장은 소승교(1-6교), 대승시교(제7교), 대승종교(제8교), 대승돈교(제9교), 대승원교(제10교)로 교판을 수립하였다. 5교 10종판을 수립한 법장은 이후 『화엄경탐현기』를 지으면서 다시 4교판으로 수정하였다. 그는 소승교(『아함경』)는 수상법집종隨相法執宗으로, 대승시교(『반야경』 · 『해심밀경』)는 둘로 나누어 하나는 반야 중관의 교학을 공시교空始敎인 진공무상종眞空無相宗으로, 다른 하나는 유가 유식의 교학을 상시교相始敎인 유식법상종唯識法相宗으로 시설하고, 대승종교(『여래장경』)를 대승돈교(『능가경』 · 『유마경』)와 대승원교(『법화경』 · 『화엄경』)를 포괄하는 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으로 재편하였다. 이러한 법장의 변화는 그의 사상적 변화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지만 화엄학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함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수당 이후의 교판은 신라의 원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종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경주 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 경북 경주시 인왕동 산 56번지. 신라시대 보물 제198호. 2019년 11월 11일 박우현 거사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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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와 같은 대학원 석 · 박사과정 졸업,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불학과 불교학』, 『한국불학사』, 『한국사상사』, 『한국불교사궁구』, 『원효, 한국사상의 새벽』, 『삼국유사 인문학 유행』 등 논저 다수가 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한국불교사학회 회장 겸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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