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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불교]
갈릴레이의 상대성이론과 속도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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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  2024 년 11 월 [통권 제139호]  /     /  작성일24-11-04 21:43  /   조회25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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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의 세계 ❶   

 

갈릴레이의 상대성이론

 

현대물리학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두 축은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앞으로 서너 번에 걸쳐 상대성이론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상대성이론이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Theory of Relativity)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에 대한 기초는 갈릴레이가 처음 도입하였으며, 이 개념은 뉴턴역학의 기본 구조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후에 논의하기에 앞서 오늘은 갈릴레이의 상대성이론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기차를 생각해 보자.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들고 있는 찻잔의 속도는 얼마인가? 기차 밖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기차와 함께 달려가는 찻잔의 속도가 시속 100km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는 이 찻잔이 정지해 있다. 정지해 있지 않고 찻잔이 시속 100km로 움직인다면 차를 마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를 마시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물건이 될 것이다. 이는 찻잔의 속도가 기차 밖에 있는 관측자에게는 시속 100km이고 기차 안의 관측자에게는 정지해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하나의 물체에 대해 서로 다르게 관측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는 주관과 객관 사이의 상대적 맥락으로 결정된다

 

이런 상황을 접하면서 우리에게 먼저 드는 생각은 그러면 둘 중의 어느 사람이 맞는가이다. 이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우리는 늘 하나의 대상에 대해 하나의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관측 대상의 속도는 누구에게나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가 대상 자체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둘 다 진실일 수는 없다. 어느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틀려야 한다. 이는 우리의 소박한 믿음이기도 하다. 이게 착각임을 알려주는 게 갈릴레이의 상대성이론이다. 

 

사진 1.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초상화.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관측 대상의 속도는 관측하는 사람과 관측 대상 사이에 어떤 상황이 형성되느냐 혹은 어떤 관계의 맥락이 설정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기차 밖에 있는 관측자가 기차 안의 찻잔을 보는 상황에서는 찻잔의 속도가 시속 100km다. 관측 대상과 관측자가 모두 기차 안에 있는 상황에서는 찻잔이 정지해 있다. 하나의 물체가 서로 다른 관측자들과 어떤 관계의 맥락을 형성하느냐에 따라 물체의 속도가 달라진다. 관측 대상의 속도는 관측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관측하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두 관측자가 서로 다른 얘기를 하더라도 어느 하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두 얘기가 모두 옳다. 대상의 속도는 대상과 관측자 사이에 어떤 상대적(relative) 맥락이 형성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이를 상대성이론(relativity)이라고 한다.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는 관측 대상 자체가 아니며 관측 이전에 정해진 게 아니다.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 관계의 상대적 맥락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상대성이론은 아주 보편적으로 성립한다

 

앞에서의 논의가 달리는 기차라는 특별한 상황에서만 성립하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는 달리는 기차와 물리적 상황이 같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초속 30km의 속력으로 공전한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5초면 갈 수 있는 엄청난 속력이다. 지구 밖에 있는 관측자가 보면 내 앞의 책상도 초속 30km라는 속도로 날아간다. 이 책상처럼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정지해 있다고 보이는 것은 내가 우주 공간을 그들과 함께 같은 속도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기차 안의 찻잔이 나와 함께 움직이므로 찻잔이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지구 위의 모든 것이 나와 같이 움직이므로 내 주위의 물건이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측자와 대상, 주관과 객관이 모두 움직이지만, 함께 움직이기만 하면 모두 정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정말 초속 30km로 날아가는가?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훨씬 더 복잡하다. 태양은 우리은하(Galaxy, 태양계가 속한 은하)의 중심부를 초속 230km의 속력으로 공전한다. 여기까지만 와도 우리는 벌써 내 앞의 물건의 속도를 무엇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는 초속 90km의 상대속도로 움직이고, 이 둘을 포함하여 우리 주변 은하의 무리도 다시 다른 은하의 무리에 대해 상대운동을 한다. 우주의 모든 천체는 어느 하나의 예외도 없이 복잡하게 움직인다. 기준점을 찾을 수 없는 이 움직임 속에서 어떤 물체가 정지해 있다거나 어떤 속도로 움직인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내가 보는 물체의 속도란 무엇인가?

 

모든 속도는 상대속도다

 

물리학에서 속도는 물체 자체의 속도가 아니다. 어떤 기준에 대한 물체의 속도이고 누가 보느냐에 따른 물체의 속도다. 우리가 속도라고 하는 것은 보통 지표면에 대한 속도다. 내 앞의 책상이 정지해 있다는 것도 지표면에 대해 정지해 있다는 것이고, 기차가 시속 100km로 달린다는 것도 지표면에 대한 속도다. 이를 물리학에서는 지표면에 대한 상대속도라고 한다.

 

지구 위에서는 지표면이라는 기준이 있지만, 지구를 벗어나면 모든 것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상항에서 이런 기준점이 있을 수 없다. 지구도 움직이고 태양을 포함한 태양계도 움직이며 태양계를 포함한 우리은하도 움직이므로 고정된 기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정된 기준점이 없으므로 절대(absolute)속도란 없으며 오직 상대(relative)속도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 주변의 모든 것은 정지해 있는 게 아니다. 나에 대한 상대속도가 0일 뿐이다. 정지해 있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움직이므로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대상 자체의 속도란 원래 없다. 대상의 속도는 연기에 의해 나타난다

 

이는 관측 대상의 속도가 그 자체의 속성에 의해 관측 이전에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관측 이전에 이미 정해진 대상의 속도가 나에게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물리학에서는 관측 대상과 관측자 사이의 상대속도만 있다고 한다. 관측 대상과 관측자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구조에 의해 대상의 속도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관측 대상과 관측자 사이에 설정된 연기緣起의 구조에 의해 관측 대상의 속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는 것은 대상 자체의 속도가 아니다.

 

상대속도 즉, 나와 대상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 낸 속도다. 내가 보는 것은 물체 자체의 속도가 아니라 나에게 나타나는 물체의 속도다. 대상 자체의 속도란 본래 없다는 것을 물리학에서는 절대(absolute)속도는 없다고 한다. 나에게 나타나는 속도만 있다는 것을 물리학에서는 상대(relative)속도만 있다고 한다. 이는 관측자와 대상, 나와 물체가 어떤 연기緣起의 맥락을 형성하고 있느냐에 의해 나타나는 속도다.

 

운동 궤적의 차원도 연기에 의해 달라진다

 

갈릴레이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배에 탄 사람이 위 방향으로 공을 던지는 상황을 상상했다. 배에 탄 사람은 공이 위 방향으로 올라갔다가 그대로 떨어져서 처음에 공을 던진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관측하게 된다. 이 사람에게 공은 수직 방향으로 1차원 왕복운동을 한다. 육지에서 배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일까? 배가 움직이고 있으므로 공을 던진 위치와 공이 떨어진 위치는 다르다. 공은 배의 진행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떨어진다. 이를 수학이나 물리학에서는 포물선운동이라고 한다. 육지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공이 2차원 포물선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얘기한 찻잔의 속도와 마찬가지로 공의 궤적은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공은 배 위의 관측자가 보는 것처럼 1차원 왕복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육지의 관측자가 보는 것처럼 2차원 포물선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관측 대상의 궤적은 대상 자체의 속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관측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관측 이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관측으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관측자와 관측 대상 사이에 설정되는 관계의 맥락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대상 자체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연기緣起의 맥락이 설정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운동 궤적의 차원도 연기에 의해 결정된다.

 

일수사견一水四見과 불구부정不垢不淨의 세간世間

 

일수사견一水四見 人見是水 餓鬼見水是火 天見是一瑠璃 魚見是屋宅(주1), 같은 물이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네 가지로 서로 다르게 본다고 한다. 사람은 마시는 물로 보며, 아귀는 피고름이라고 보고, 천인天人은 보배로 장식한 연못으로 보고, 물고기는 자신이 사는 집이라고 본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물이 과연 무엇이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앞에서와 같이 물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물은 보석도 아니고 마시는 물도 아니며 사는 집도 아니고 피고름도 아니다. 물은 무아無我여서 그 어느 것도 아니지만, 보석으로 나타나고 마시는 물로 나타나고 사는 집으로 나타나고 피고름으로 나타난다.

 

「반야심경」에서는 불구부정이라고 한다. 말똥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말똥을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말똥구리에게는 맛있는 음식이고 향기로운 집이다. 물을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듯이, 말똥은 더러운 것도 아니고 향기로운 것도 아니다. 그 어느 것도 아니어서 불구부정不垢不淨이지만, 연기緣起에 의해 누구에게는 더러운 것으로 나타나고 누구에게는 향기로운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연기에 의해 나타나는 세상을 본다.

 

물고기는 물 안에서 사는 게 아니라, 물을 자신이 사는 집이라고 생각하는 세간世間에서 산다. 우리는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 위에서 사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세간에서 산다. 물을 마시는 것으로 보고 뜰 앞의 나무가 서 있다고 보고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200만 년 전에 떠난 빛이 지금 여기 도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세간에서 산다. 

 

<각주>

(주1) 照遠撰, 『資行鈔』(大正藏 卷62), “且如水境何以人見是水 餓鬼見水是火 天見是一瑠璃 魚見是屋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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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고려대학교 과학기술대학 물리학과 교수. 연구 분야는 양자정보이론. (사)한국불교발전연구원장. <산하대지가 참 빛이다 (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양형진의 과학으로 세상보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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