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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구함이 있으면 모두 괴로움이니 아무 일 없음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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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3 년 5 월 [통권 제121호]  /     /  작성일23-05-05 13:39  /   조회3,08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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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29 |임제종 ④

 

임제종을 건립한 의현義玄은 무위진인無位眞人과 무의진인無依眞人을 불성으로 설정하고, 그를 체득하는 첩경으로 인혹人惑을 받지 않음을 제시하였으며, 그 인혹을 받지 않는 출발점으로 스스로 믿음[自信]을 강조하였다. 궁극적인 선리禪理를 자신의 밖에서 찾지 말 것을 제창하고 있고, 무수무증無修無證과 가불매조呵佛罵祖의 선풍을 드러내고 있음을 논했다.

 

사진 1. 임제의현 선사가 입적한 대명부 흥화사興化寺 전경.

 

이러한 선사상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한데, 첫째는 기본적으로 『육조단경』과 마조馬祖-황벽黃檗으로 계승되는 남종선南宗禪의 사상적 흐름에 대한 파악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둘째는 회창법난 이후 전체적인 중국불교의 흐름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를 모두 논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고, 이미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하였으므로 생략하겠지만, 의현이 불법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임제어록』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참다운 부처, 참다운 법, 참다운 도

 

『임제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실려 있다.

 

묻기를, “무엇이 참다운 부처[眞佛], 참다운 법[眞法], 참다운 도[眞道]입니까? 선사께서 열어 보여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부처는 마음이 청청한 것이고, 법은 마음이 광명한 것이며, 도는 곳곳에서 장애가 없는 깨끗한 빛[淨光]이다. 세 가지는 하나로 ‘즉卽’하지만, 모두 빈 이름이요, 실유實有가 없는 것이다. 참답고 바르게 도를 배우는 사람과 같이 염념念念에 마음이 끊어짐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주1)

 

여기에서 의현의 설명은 아주 명료하다. ‘부처’는 바로 마음의 청정으로, ‘법’은 마음의 광명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도’는 모든 행주좌와에 걸림이 없는 맑은 광명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렇게 부처와 법, 도가 명칭이 세 가지이지만, 모두 ‘즉卽’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설하고 있으며, 그것은 모두 참답게 존재하지 않는 빈 이름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임제어록』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참다운 부처는 형이 없음[眞佛無形]이고, 참다운 도는 체가 없음[眞道無體]이며, 참다운 법은 상이 없음[眞法無相]이다. 이 세 가지 법은 섞여서 융합하여 한 곳에서 화합한다. 분변分辨하면 이미 얻지 못하는 것이니, 이를 분주한 업식중생業識衆生이라고 부른다.”(주2)

 

여기에서 사용하는 ‘진불무형眞佛無形’, ‘진도무체眞道無體’, ‘진법무상眞法無相’은 후대에 상당히 많이 인용되는 구절로 임제종의 핵심적인 선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앞의 인용문과 같이 여기에서도 부처와 도, 법 세 가지가 융합하여 한 곳에서 화합한다고 하는데, 그 한 곳은 바로 의현이 앞에서 설한 ‘무위진인’, ‘무의도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를 하나씩 나누어 분별하여 논한다면, 이를 바로 중생이라고 칭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생은 부처·도·법에 대하여 끊임없이 분별하여 구하고자 분주하게 애쓰고 있지만 이미 분별하는 순간 어그러져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도·법’이 ‘무형·무체·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육조단경』에서 핵심적인 선사상으로 제시하는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의 ‘삼무三無’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임제어록』은 『육조단경』과는 그 표현이 상당히 달라져 있다. 조사선의 사상적 변화를 ‘향상일로向上一路’라고 표현하는 바와 같이 완전히 그 격格을 벗어나고 있다.

이는 『임제어록』의 다음과 같은 문구로부터 엿볼 수 있다.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제법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으며, 또한 성性을 생生할 수도 없다. 단지 또한 빈 이름이요, 이름 또한 비어 있다. 네가 단지 그 한가로운 이름이 실實이 된다고 여김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주3)

 

주지하다시피 『육조단경』에서는 명확하게 “일체법은 모두 ‘자성’에 있다.”(주4), “‘자성’ 가운데 만법이 모두 현현한다.”(주5)라는 구절로부터 “삼신불三身佛은 ‘자성’으로부터 생한다.”(주6)라고 ‘자성’의 본체를 인정하고 있다. 나아가 “도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보리를 돈오하게 하고, 자신의 본성으로 하여금 돈오하게 한다.”(주7)라고 하여 자신의 본성, 즉 ‘자성’에 대한 돈오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문구에서는 명확하게 그러한 ‘자성’을 부정하는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육조단경』에서 설하는 ‘자성’도 비록 ‘자성’이라고 언표言表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논하자면, ‘자성’이라고 규정할 만한 것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무자성無自性’의 ‘자성’이며, 그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무념[無念之念]·무상[無相之相]·무주[無住之住]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비록 표면적인 논술의 형식은 완전히 다르지만 그 사상적 함의는 사실상 같다고 볼 수 있다.

 

한가로운 명구와 분주한 업식중생

 

흥미로운 사실은 『임제어록』에서 일체제법의 시설이나 선지식의 가르침 등은 “고인의 한가로운 명구”, “한가로운 이름” 등으로, 그를 대하는 학인들에게는 “분주한 업식중생” 등과 같이 ‘한가로움’과 ‘분주함’으로 대비시켜서 표현하는 점이다.

 

사진 2. 흥화사 선연각禪緣閣.

 

이를 상세히 논증하자면 상당히 복잡하지만, 결국은 ‘돈오’를 바탕으로 하는 무수무증無修無證과 관련된 사상에 따른 표현이라 하겠다. ‘돈오’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공부나 수행의 쌓임인 적학積學과 적수積修를 인정하지 않는데, 공부나 수행은 하면 할수록 새롭게 도달해야만 경계境界가 끊임없이 현현하여 절대로 궁극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석존釋尊의 가르침이나 돈오의 경지에 오른 조사들의 가르침을 ‘한가로운 명구’라고 표현하지만, 학인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고자 분주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은 곤궁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법이 아무리 뛰어나도 모두 ‘인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와도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표현의 차별은 새로운 사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하다. 특히 『임제어록』에서 앞의 구절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설령 있다고 해도 모두 현변現變에 의지하는 경계이다. 있다고 하는 것은 보리의 경계에 의지함[菩提依], 열반의 경계에 의지함[涅槃依], 해탈의 경계에 의지함[解脫依], 삼신의 경계에 의지함[三身依], 경지의 경계에 의지함[境智依], 보살의 경계에 의지함[菩薩依], 부처의 경계에 의지함[佛依]일 뿐이다.”(주8)

 

여기에서 말하는 ‘현변’은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중본기경中本起經』 등의 「현변품現變品」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본래 깨달은 존재인 석존釋尊도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무량한 겁劫을 거치며 이른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에 따라 사바娑婆라는 현겁現劫에 출세出世한 바와 같이 변화하여 현현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변’에는 반드시 의지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반야般若의 입장에서는 연기緣起, 즉 의지하여 발생한 것은 바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자성’이 비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이를 ‘연기성공緣起性空’이라고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의현은 어떠한 법이 시설施設된다면, 위의 인용문과 같이 반야의 보리菩提나 열반涅槃, 심지어 불경계佛境界조차도 모두 의지하여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자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제창하는 것이다.

 

일체법에는 일심一心도 없다

 

이렇게 불교에서 추구하는 모든 계위階位의 경계가 의지하여 ‘현변’한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너희들은 의지하여 현변現變한 국토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삼승三乘 십이분교十二分敎마저도 모두가 더러운 것을 닦아낸 휴지다. 부처는 환화신幻化身이며, 조사祖師는 늙은 비구이다. 너희들은 또 어머니가 낳은 것이 아닌가? 너희들이 만약 부처를 구한다면 바로 부처라는 마구니[佛魔]에게 포섭당하고, 너희들이 만약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구니[祖魔]에게 묶이게 된다. 너희들이 만약 구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괴로움이니, 아무런 일이 없음[無事]보다 못할 것이다.”(주9)

 

여기에서는 삼승과 십이분교의 가르침, 조사의 가르침조차도 모두 부정하고 있다. 심지어 불마佛魔, 조마祖魔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불조를 폄하하고, 그를 애써 구하는 것은 괴로움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래무사本來無事’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부처를 구하는 중생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너희들이 부처가 되기를 바란다면, 만물을 따르지 말라. 마음이 생하면 여러 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여러 가지 법도 멸한다. 일심一心이 생하지 않으면 만법은 허물이 없으며, 세간과 출세간에 부처도 없고 법도 없으며, 또한 나타나지 않고, 또한 잃을 수도 없는 것이다. 설사 (부처와 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명칭과 말과 문장일 뿐이다. 어린아이를 이끌기 위한 것이고, 병에 따른 약을 시설施設하여 드러난 명구名句일 뿐이다.”(주10)

 

여기에서는 심지어 ‘일심一心’까지도 부정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육조단경』에서는 이른바 ‘명심견성明心見性’으로 중국불교 사상사에 ‘마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불성론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시 말하여 ‘불타佛陀’에 대한 신앙을 ‘마음’에 대한 신앙으로 전환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나아가 남악계의 마조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제창하고 있으며, 의현의 스승인 황벽도 “마음에 즉함이 부처에 즉함[卽心卽佛]이다. 위로는 제불에 이르기까지, 아래로는 꿈틀대는 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어 같은 일심체一心體이다. 따라서 달마대사가 서천으로부터 온 것은 오직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여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바로 지적한 것이다.”(주11)라고 명확하게 ‘일심’을 긍정하고 있다.

 

더욱이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하는 “마음이 생하면 여러 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여러 가지 법도 멸함”이라는 구절은 다양하게 언급되는 구절이지만 선종에서는 『경덕전등록』의 「혜능전」에 실려 있으며,(주12) 돈황본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종보본 『법보단경』에 실려 있고,13) 특히 황벽의 『완릉록宛陵錄』에 실린 구절이다.(주14)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는 스승도 언급하는 ‘심생종종법생心生種種法生’ 등의 문구를 인용하면서도 명확하게 그러한 ‘일심’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임제어록』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심법心法은 무형無形이어서 시방十方으로 관통하니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들으며,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담론談論하며, 손으로는 잡고, 다리로는 움직여 달린다. 본래 이것이 하나의 깨끗한 밝음[精明]이지만 나뉘어 여섯의 화합和合이 되었다. 일심一心은 이미 없으니 처하는 곳에 따라 해탈하라.”(주15)

 

이로부터 의현은 명확하게 ‘심’의 본체적 작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앞에서 첫 번째로 인용한 구절인 “부처는 마음이 청청한 것이고, 법은 마음이 광명한 것이며, 도는 곳곳에서 장애가 없이 깨끗한 빛인 것이다.”라는 말은 심의 본체를 인정한 구절이고, 또한 바로 위의 인용문에서 “심법은 무형이어서 시방으로 관통함”, “본래 이것이 하나의 깨끗한 밝음”이라는 표현들은 명확하게 ‘일심’을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의현은 인용문 끝에 ‘일심’을 명확하게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의현은 ‘일심’을 부정하는가? 이는 앞에서 언급한 ‘인혹’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불佛·조祖의 가르침을 모두 ‘인혹’으로 치부하는 견해에서 갑자기 ‘일심’이나 ‘일심법’을 인정함은 자가당착의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측면으로 본다면, 『육조단경』 출현 이후 남종선이 유행하면서 ‘일심’과 ‘자성’에 대한 ‘돈오’ 등에 지나치게 훈습薰習되어 참다운 체득 없이 앵무새처럼 되뇌는 학인들에 대한 경책警責과 함께 체오體悟를 강조하기 위하여 ‘일심’을 부정한 것이 아닐까 한다. 더욱이 『임제어록』에서는 단 한 차례도 ‘돈오’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돈오를 배제한다면 『임제어록』에서 설하는 내용은 거의 해명할 수가 없을 정도라 하겠다.

 

곧바로 지금일 뿐, 다시 다른 시절은 없다

 

『임제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저 원圓·돈頓 보살은 법계法界에 들어가 몸을 나타내어 정토淨土를 향하면서 범부凡夫를 싫어하고 성인聖人을 좋아한다. 이러한 무리는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잊지 못하는데,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분별의)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종禪宗의 견해는 전혀 그렇지 않아서 곧바로 지금일 뿐으로 다시 다른 시절時節은 없다. 산승이 설하는 바는 모두 한 시기에 병에 따라 약을 쓰는 치료일 뿐으로 실법實法은 전혀 없다. 만약 이처럼 볼 수 있다면 참다운 출가出家이다”. (주16)

 

사진 3. 흥화사 약사전藥師殿.

 

이로부터 의현의 명확한 입장과 견해를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종파의 교학敎學이나 이른바 여래선如來禪에서는 명확하게 ‘심성본정心性本淨, 객진소염客塵所染’을 제창한다.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과 불성佛性 등은 본래 청정하지만, 객진의 번뇌가 오염시켜 중생으로 떨어져 다양한 망념 등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객진소염’의 부분을 철저하게 분별하여 벗어나 ‘성인’의 경지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바로 ‘지금 이 자리[當下]’를 추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명확하게 『육조단경』에서 논증된 ‘본래현성本來現成’과 ‘당하즉시當下卽是’를 선종의 핵심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 전체적인 의현의 선사상은 바로 철저한 조사선의 입장에서 설해졌음은 너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사선의 선리禪理를 학인들에게 어떻게 깨우치게 할 것인가? 의현의 말대로 하자면, ‘인혹’을 어떻게 받지 않게 할 것인가? 이러한 제접법을 다양하게 제시하여 학인들을 접인接引하고 있으니, 그 가운데 대표적인 제접법을 이어서 고찰하고자 한다.

 

<각주>

(주1)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501c), “問: 如何是眞佛眞法眞道? 乞師開示. 師云: 佛者, 心淸淨是, 法者, 心光明是, 道者, 處處無碍淨光是. 三卽一, 皆是空名, 而無寔有. 如眞正作道人, 念念心不間斷.”

(주2) 앞의 책, “眞佛無形,眞道無體,眞法無相, 三法混融和合一處. 辨旣不得, 喚作忙忙業識衆生.”

(주3) 앞의 책(大正藏47, 499c), “世,出世諸法,皆無自性, 亦無生性. 但有空名, 名字亦空. 爾秖麽認他閑名爲實, 大錯了也.”

(주4)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9a) “一切法盡在自性.”

(주5) 앞의 책, “自性中, 萬法皆現.”

(주6) 앞의 책, “三身佛從自性上生.”

(주7) 앞의 책(大正藏48, 340c), “令學道者頓悟菩提, 令自本性頓悟.”

(주8)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499c), “設有, 皆是依變之境. 有箇菩提依, 涅槃依, 解脫依, 三身依, 境智依, 菩薩依, 佛依.”

(주9) 앞의 책, “爾向依變國土中覓什麽物? 乃至三乘十二分敎, 皆是拭不淨故紙. 佛是幻化身, 祖是老比丘, 爾還是娘生已否? 爾若求佛, 卽被佛魔攝; 爾若求祖, 卽被祖魔縛; 爾若有求皆苦, 不如無事.”

(주10) 앞의 책(大正藏47, 502b), “爾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咎, 世與出世, 無佛, 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施設藥病, 表顯名句.”

(주11) [唐]裴休集, 『黃檗斷際禪師宛陵錄』(大正藏48, 386b), “卽心是佛. 上至諸佛, 下至蠢動含靈, 皆有佛性, 同一心體. 所以達摩從西天來, 唯傳一心法, 直指一切衆生本來是佛.”

(주12) [宋]道原纂, 『景德傳燈錄』卷5(大正藏51, 236a), “汝等諸人自心是佛, 更莫狐疑. 外無一物而能建立, 皆是本心生萬種法. 故經云: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주13)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39a), “汝等諸人自心是佛, 更莫狐疑. 外無一物而能建立, 皆是本心生萬種法. 故經云: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주14) [唐]裴休集, 『黃檗斷際禪師宛陵錄』(大正藏48, 386b), “所以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故知一切諸法皆由心造.”

(주15) [唐]慧然集,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大正藏47, 497c), “心法無形, 貫通十方, 在眼曰見, 在耳曰聞, 

在鼻曰香, 在口談論, 在手執捉, 在足運奔. 本是一精明, 分爲六和合. 一心旣無, 隨處解脫.”

(주16) 앞의 책(大正藏47, 498b), “如圓頓菩薩入法界現身, 向淨土中厭凡忻聖. 如此之流取捨未忘, 染淨心在. 如禪宗見解, 又且不然, 直是現今更無時節. 山僧說處皆是一期藥病相治, 總無實法. 若如是見得, 是眞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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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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