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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는 지금]
일본 정토진종의 미국 토착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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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근  /  2023 년 5 월 [통권 제121호]  /     /  작성일23-05-05 12:18  /   조회1,14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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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는 지금 5 |미국 ⑤

 

미국불교사에 아시아 국가 불교인들의 첫 등장은 골드러시 시기인 1850년대 캘리포니아로 들어온 중국인들이었다. 하지만 1882년 중국인 이민을 금지하는 법으로 큰 타격을 받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소멸한다. 그 후에 1893년 시카고 종교회의 때부터 일본 불교계의 사람들과 스리랑카 다르마 팔마가 미국불교사에 등장한다. 이때부터 미국불교사에는 일본불교계 스님들이 많이 등장한다. 

 

미국에서 일본불교의 시작

 

시카고 종교회의 이후에 스즈키 다이세츠를 비롯하여 주로 일본 임제종 계열의 불교인들이 미국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1800년대 말부터 일본인들은 하와이에 노동자로 많이 들어왔다.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는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등 이민 온 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일본 불교계가 수십 년 동안 일본 이민 1세와 그의 자녀들인 2세를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사진 1. 일본 정토진종에 관한 1899년의 신문기사.

 

당시 하와이 백인 사회에서는 불교를 이단시하였고, 일본 기독교인들이 들어와서 역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불교 포교를 방해하였다. 당시 하와이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현재의 미국 상황과 달랐다. 미국 본토 백인 주류 사회에서 1960년대부터 불교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여 50여 년 동안 태풍처럼 계속 불었던 시기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 토착화를 위한 일본 정토진종의 포교정책은 인도불교가 중국이나 티베트에 가서 현지 토착 종교를 수용하여 정착하는 것처럼 기독교를 포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시기 도진호스님이 1930년 조선스님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 방문한 것은 정토진종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미주한국불교의 미래를 모색하는 세미나

 

일본불교는 하와이에 이민 온 일본인들의 요구로 1898년 정토진종이 가장 먼저 포교활동에 나섰다. 뒤이어 조동종, 진언종, 일련종 등 일본의 주요 종단이 1904년까지 하와이에 포교당을 세웠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하와이 이민자 수와 관련이 있다. 정토진종의 미국 진출은 한국 불교계의 미국 진출 보다는 66년이나 빠르기 때문에 정토진종을 잘 연구하면 미주한국불교계의 미국 정착에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사진 2. 미주한국불교의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세미나 포스터.

 

이런 이유로 내가 발행인으로 있는 『미주현대불교』에서는 2013년 뉴욕 불광선원에서 ‘미동부해외특별교구’와 공동으로 ‘미주한국불교의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세미나’를 주최하였다. 이 행사에서 특별히 미국의 일본 정토진종과 일본 조동종을 집중 분석하였다. 그 모임의 발표자로 2017년에 입적했지만 당시에 하와이주립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성원스님이 ‘정토진종 하와이 교구’에 대해, 미주현대불교 편집위원 송광섭 박사가 ‘일본 정토진종의 미국 포교과정 연구’를 통해 정토진종이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토착화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발표하였다. 또 조동종 스님인 던컨 윌리엄스 USC 교수도 참석하여 ‘일본 조동종의 정착과정과 현황’에 대해 강의하였다.

 

 사진 3. 세미나에서 강연하는 성원스님.

사진 4. 세미나에서 강연하는 던컨 월리엄 USC 교수(가운데)와 통역을 맡은 혜민스님(우측).

 

미국의 일본 정토진종은 하와이에서 시작했고, 중요한 일들이 하와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하와이 정토진종의 포교활동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하와이 정토진종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은 성원스님의 논문을 인용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일본인들의 미국 이주 시작

 

일본인 노동자들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미국뿐만 아니라 남미 등으로 이민을 갔다. 일본 정부의 감독과 관리 속에서,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이민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이민을 왔고, 하와이 전역의 섬들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이민을 온 후 하와이 일본사회의 토대를 구축하였고, 하와이 일본인들은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하와이 지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일본계 후손들은 현재 하와이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의 간략한 하와이 이민사는 아래와 같다. 

 

사진 5. 하와이 항구.

 

1868년 5월 153명의 일본 노동자들이 처음 공식적으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노동자였고, 대부분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신자들이었다. 최초의 일본 이민자들이 온 이후 16년이 경과된 이후 1885년 일본인들은 대규모로, 그리고 정부 주도로 하와이 이민을 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주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였다.

 

참고로 한국인들은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 항구에서 하와이를 향해 출발하여 1903년 1월 13일, 조선인 102명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 이후 일본 이민자들은 엄청나게 늘어났고, 본격적인 하와이 이민이 개시된 5년 후인 1890년에는 12,610명의 일본인이 이미 하와이에 정주하였다. 당시 하와이 전체 인구의 14%를 일본인들이 차지할 정도였다.

 

사진 6. 하와이 시가지 풍경.

 

중국인들도 당시에는 상당수 있었다. 20년이 지난 후 1910년에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일본인 인구는 79,675명으로 하와이 전체 인구의 41.5%로 늘어났다. 나아가 1920년에는 109,274명으로 하와이 총 인구의 42.7%를 차지하였다. 미국의 이민 제한 정책 때문에 1907~1924년에 걸친 일본인 증가는 주로 일본인 2세들의 출생 때문이었다. 5세에서 14세 어린이들이 급증함에 따라 2세 교육문제는 일본인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이슈가 되었다. 정토진종 서본원사파는 1930년에는 하와이 전역에 30여 개의 불교청년회를 결성하였고, 이마무라 스님은 증가하는 청소년을 위해 하와이 전역에 여러 곳의 불교학교를 개설하였다. 

 

사진 7. 정토진종 팔리 사원(pali temple historical).

 

이렇게 하와이에서 일본인들이 증가함에 따라 1898년 정토진종 본원사파를 시작으로 정토종, 진언종, 조동종, 일련종, 정토진종 동본원사파로 대변되는 일본 6개 종단은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 하와이에 자리를 잡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독교계 선교사들도 이민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하와이에 왔다. 일본 기독교인들은 미국 기독교계와 함께 정토진종을 비롯한 일본 불교인들의 하와이 정착을 많이 방해하였다. 이 시기는 시야를 넓혀 보면 하와이가 미국 영토로 편입되었고, 조선에 미국 선교사들도 오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한국인들도 하와이로 이민을 오기 시작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지금은 미국인들이 선과 명상을 선호하고, 또 일본인들의 미국 이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본 조동종이 미국불교의 선두자리에 있다. 하지만 초창기 수십 년 동안은 일본의 주요 종단이 다 들어와서 포교활동을 했고, 하와이에서 정토진종 서본원사파의 교세는 압도적이었다. 이것은 2대 교구장 에묘 이마무라 스님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 정토진종을 정착시킨 에묘 이마무라

 

에묘 이마무라 스님은 맨 먼저 사탕수수 분원을 개원하여 젊은 일본 노동자들을 포교하였다. 그리고 1900년 불교청년회를 창립하고, 불교청년회는 백인 미국인들의 도움으로 야학을 개설하여 젊은 일본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야학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진 8. 하와이에 정토진종을 정착시킨 이마무라 스님.

 

이마무라 스님은 1899년에서 1904년까지 5년 동안 총 15개의 포교당을 하와이 전역에 개설하였다. 이마무라 스님은 1899년 하와이로 왔는데, 하와이 교구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그는 하와이 전역에 70개 포교당을 설립했다. 그는 포교당은 하와이 일본 사회와 지역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일본인 노동자들을 위해 영어학교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일본어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또 영어법회를 개설하였다.

 

이마무라 스님은 일본인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다. 그가 하와이로 왔을 때, 하와이는 기독교인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하와이에서 과두정치를 실행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외래종교인 불교를 적으로 간주하여 매우 차별하였다. 일본불교 신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한 이후 하와이 지역 신문들은 그들을 우상 숭배자들로 간주하였다. 불교 신자들은 하와이 지역 은행으로부터 대부를 받을 수 없었다. 일본 총영사관은 일본 기독교 선교사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포교사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하와이 일본불교는 1904년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오아후섬에 위치하고 있는 와이파후 사탕수수 농장 파업이 1904년 일어났고, 그 파업의 영향으로 사탕수수 산업의 안정성이 큰 위협을 받았다. 농장주들은 하와이 주재 일본 총영사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총영사는 일본인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농장으로 복귀시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마무라 스님은 파업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일본 노동자들을 불교의 가르침으로 설득하였다.

 

그의 개입으로 파업 문제는 평화롭게 해결되었다. 그의 행동에 감명을 받고 농장주들은 일본 노동자들을 평화롭게 다룰 수단으로 불교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장 경영자들은 불교에 적극 협조적으로 변했다. 그 결과 일본불교의 새로운 역사가 하와이에서 열렸다. 1910년에서 1920년까지 10년 동안 약 56개의 새로운 일본불교 포교당들이 주로 농장에 건립되었다.

 

사진 9. 하와이 농장과 일본인 노동자들.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를 미국에 정착시키기 위해 이마무라 스님은 미국화 작업을 하였다. 기독교로부터 ‘교회’라는 단어를 받아들였고, 법회를 기독교식으로 변화시켰다. 스님들은 기독교식으로 설법을 하고, 법회에서 찬송가 형식으로 찬불가를 하였고, 결혼식도 기독교식을 따랐다. 당시 하와이 사회가 불교에 비우호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화를 진행하였다.

 

이 영향으로 지금도 미국 정토진종의 법회는 개신교 형식으로 하고 있다. 교회에서 하는 순서대로 하는 예배 형식인데 다만 그 내용이 불교이다. 설교는 스님이 설법으로, 찬송가는 찬불가로 대체하여 한다. 이마무라 스님은 법당의 내부 장식을 서구화 또는 기독교화 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법당 안에 다다미 대신에 248개의 의자를, 그리고 교회식 목조 좌석들을 배열하여 약 1,000명의 불자들이 동시에 법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법당에 일본 전통 불단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법회를 위한 설교단을 설치하였다. 이마무라 스님은 하와이 불교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졌고, 정토진종을 미국화 시키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일본의 문화와 불교를 잘 보존하면서 미국 사회에 필요한 일본문화와 불교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미국 문화, 종교, 사회 양식을 적극 받아들여 미국 스타일의 불교로 정토진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하와이 백인사회의 일본불교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전혀 새로운 일본불교 모습을 두 가지 측면에서 창조할 필요성을 느꼈다. 첫째, 정토진종은 하와이의 기독교와 백인사회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마무라 스님은 기독교의 슬로건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랑과 용서”와 비슷한 슬로건인 “부처님의 영원한 빛과 사랑”을 정토진종의 슬로건으로 채택하였다. 둘째, 불교와 정토진종이 하와이 종교계의 주요 종교로 자리잡는 것이다. 이마무라 스님의 이러한 작업은 미국에서 불교 변형의 한 예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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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근
미주현대불교 편집인 및 발행인. 전북 김제가 고향으로 전북대학교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9년 뉴욕에서 월간 잡지 『미주현대불교』를 창간하여 운영하고 있다. 2010년부터 사단법인 ‘korean Cultural Heritage Foundation’을 설립하여 한국전통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남북불교교류 활동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북한사찰순례단을 조직하여 2005 년부터 4차례에 걸쳐 단체로 북한사찰순례를 하면서 북한불교를 소개하고 있다. 현재는 미국 정부의 북한 여행 금지로 인해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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