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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조사선과 여래선을 최초로 구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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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2 년 12 월 [통권 제116호]  /     /  작성일22-12-05 14:16  /   조회75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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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24 | 위앙종 선사상 3 

 

조사선의 ‘오가’ 가운데 최초로 성립한 위앙종은 여러 측면에서 주의할 사상적 내용이 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의 분별로부터 논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조사선의 명칭은 바로 위앙종으로부터 출현했기 때문이다. 후대에 조사선의 종전宗典으로 받들어지는 『육조단경』에서도 “온 바가 없으니 또한 가는 바도 없으며,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으니, 이를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 한다.”(주1)라고 하여 최고의 선을 ‘여래청정선’으로 명명하고 있다. 엄밀하게 논하자면, 앞에서 인용한 『단경』의 구절은 바로 송대에 이루어진 종보본宗寶本의 구절이고, 돈황본敦煌本에서는 ‘여래선’이라는 명칭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조계대사별전曹溪大師別傳』에서 “온 바가 없음을 생生이라 하고, 또한 가는 바가 없음을 멸滅이라고 한다. 생멸生滅이 없음이니 그러므로 ‘여래청정선’이라 한다.”(주2)라는 구절이 있고, 종보본에서는 이를 삽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능가경』의 사종선

 

이러한 명칭의 근원은 바로 남조 송대에서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사권본 『능가경』 권2에서 다음과 같이 선을 분류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사종선이 있다. 무엇이 사종선인가?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 관찰의선觀察義禪, 반연여선攀緣如禪, 여래선如來禪을 말한다. 

무엇이 ‘우부소행선’인가? 성문과 연각과 외도 수행자가 인무아성人無我性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관하여 골쇄관骨鎖觀, 무상無常, 고苦, 부정상不淨相으로 계착計著함을 으뜸으로 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相과 다르지 않게 관하는 것은 앞뒤로 돌아나가는 상想을 제거하여 멸하지 못하니, 이를 ‘우부소행선’이라 한다.

 

무엇을 ‘관찰의선’이라고 하는가? 인무아人無我의 자상自相·공상共相과 외도가 설하는 자성自性·타성他性·구성俱性이 없음을 알고 나서 법무아法無我와 그 지상地相의 의義를 관찰하여 점차로 증진하는 것이니, 이를 ‘관찰의선’이라 한다.

 

무엇을 ‘반연여선’이라고 하는가? 망상妄想인 이무아二無我가 망상인 줄 알고 여실如實함에 처處하면 망상이 생生하지 않음이니, 이를 ‘반연여선’이라고 한다.

무엇을 ‘여래선’이라고 하는가?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 자각성지상自覺聖智相을 행하여 삼종락三種樂에 머물고 중생의 부사의한 일을 이루어 마치는 것이니, 이를 ‘여래선’이라 한다.”(주3)

 

사진 1. 『능가경楞伽經』.
 

이러한 선의 분류는 중국선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이 가운데 최고의 선은 당연히 ‘여래선’이고, 이는 불교에서 최고의 단계로 설정하는 구경각의 경지에 해당하는 ‘여래지’에 득입할 수 있는 선법이라고 한다. 또한 『능가경』에서는 ‘여래선’을 ‘여래청정선’이라고도 칭한다.(주4) 

 

『단경』과 마조, 황벽의 여래청정선

 

그런데 『단경』에서 추구하는 바를 한마디로 한다면, 바로 “견성을 얻어 바로 성불하여 마침[得見性, 直了成佛]”(주5), “견성하여 불도를 이룸[見性成佛道]”(주6)이라 하겠다. 따라서 『단경』에서는 궁극적인 불도의 목적을 ‘성불’로 설정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여래선’을 최고의 경지로 설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단경』의 사상을 통관하면 결코 『능가경』의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힘들며, 또 교학에서 설하는 ‘여래지’를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단경』의 사상을 계승한 마조도일도 또한 다음과 같이 ‘여래청정선’을 제창한다.

 

“미혹함은 바로 자가본심自家本心에 미혹한 것이고, 깨달음은 바로 자가본성自家本性을 깨닫는 것이다. 한 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서 다시 미혹하지 않는다. 마치 태양이 떠올랐을 때 어둠과 합하지 않는 것과 같이 지혜의 태양이 떠오르면 번뇌의 어둠을 갖추지 않는다. 마음과 경계를 요달하여 망상이 발생하지 않으니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본래 있음이 지금 있으니, 수도와 좌선을 빌리지 않으며 닦지도 좌선하지도 않음이 바로 ‘여래청정선’이다.”(주7)

 

마조의 이러한 ‘여래청정선’에 대한 개념도 앞에서 인용한 『능가경』의 ‘여래청정선’과는 차별이 존재한다. 마조가 설하는 ‘여래청정선’은 무수무증無修無證의 취지가 가득한데, 이는 마조의 ‘도불용수道不用修’와 관련되어 이해해야 할 것이고, 그 바탕에 ‘돈오’가 개입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마조의 재전再傳 제자인 황벽희운은 또한 다음과 같이 논한다.

 

“도를 배우는 자는 먼저 잡학雜學과 제연諸緣을 모두 물리치고, 구하지 않음[不求]을 결정하고, 집착하지 않음[不著]을 결정해야 한다. 매우 깊은 법을 듣는 것은 흡사 맑은 바람이 스치는 것과 같아 언뜻 지나쳐 다시 찾을 수 없으니, ‘여래선’에 깊고 깊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상禪想이 발생함을 떠나야 한다. 위로부터 ‘조사’는 오직 일심一心을 전했으니 다시 다른 법이 없다. 마음을 가리켜 부처라 하고, 등等·묘妙 이각二覺의 경계를 돈초頓超하니, 결코 제이념第二念에 흘러들지 않는 것은 나의 종문宗門에 들어서는 시작이다.”(주8)

 

사진 2.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황벽도 비록 ‘여래선’의 명칭을 사용하지만, 그 사상적 내용도 역시 상당히 달라져 있다. 황벽이 말하는 ‘여래선’은 바로 ‘무념법문無念法門’을 가리키고 있다. ‘무념’을 ‘일념一念’, 즉 ‘일심一心’으로 삼고, ‘일념’에 돈오하여 초월[頓超]한다면 결코 ‘제이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며, ‘여래선’을 “위로부터 ‘조사’는 오직 ‘일심’을 전했으니 다시 다른 법이 없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단경』과 마조의 사상과 일치하는 점이고, 나아가 이러한 취지에서는 ‘조사선’의 명칭이 나올 법한데 황벽은 끝내 ‘조사선’의 명칭은 쓰지 않고 있다.

 

조사선과 여래선의 분변

 

그런데 드디어 위앙종에서 ‘조사선’의 명칭이 출현하게 된다. 그것은 앙산혜적과 향엄지한의 대화로부터 나타나는데, 앞에서 인용한 바가 있지만 설명을 위하여 간략하게 다시 인용하고자 한다.

 

향엄은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다. 작년 가난은 송곳 세울 땅이 없었으나, 금년 가난은 송곳조차 없구나.”라고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앙산은 “사제가 여래선은 알았으나 조사선은 꿈에서도 보지 못했구나.”라고 말하였다. 향엄은 다시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어, 눈을 깜빡여 그대를 보네. 만약 이 뜻을 모른다면, 사미를 부르지 말라.”라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앙산은 바로 위산에게 “지한 사제가 조사선을 깨달아서 또한 기쁩니다.”라고 보고하여 말하였다.(주9)

 

여기에서 향엄의 첫 번째 게송의 ‘가난’과 ‘송곳’은 ‘닦음[修]’을 의미하고, ‘땅[地]’은 바로 ‘증득[證]’을 뜻한다. 그러므로 작년에는 더는 증득할 경지가 없었는데 지금엔 ‘닦음’도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니, 마조나 영우의 ‘무수무증無修無證’을 흉내 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엄밀하게 본다면, 여전히 수증에 천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까닭에 앙산은 ‘여래선’을 알았지만 ‘조사선’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했다고 질타한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게송에서 “하나의 기틀[一機]”은 바로 ‘돈오’와 관련된 표현이다. ‘돈오’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구절은 바로 “이치[理]와 지혜[智]가 함께 희석됨”(주10), 즉 능能[나, 根, 혹은 주관]과 소所[남, 境, 혹은 객관]가 불이不二의 상태에 도달하여 극조極照하는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바로 “하나의 기틀”로 표현한 것이고, 나아가 아무리 ‘능소’가 ‘불이’의 상태에 있어도 ‘능’의 활동은 여전함으로 “눈을 깜빡여 그대를 보네.”라고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명확하게 ‘돈오’의 경지를 설파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까닭에 앙산은 향엄이 ‘조사선’을 깨달았다고 인정한 것이다. 여기에서 ‘여래선’과 ‘조사선’의 구별이 바로 ‘돈오’에 있음을 여실하게 알 수 있다.

한편 위앙종의 종조인 위산영우와 앙산혜적의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조사선’의 빌미를 찾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위산영우) 선사가 앙산에게 물었다. “『열반경』 40권 가운데 불설이 얼마나 있고, 마설이 얼마나 있는가?” 앙산이 답하였다. “모두 ‘마설’입니다.”(주11)

 

중국불교에서 『열반경』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경전이고, 나아가 조사선에서 가장 핵심으로 삼는 도생道生이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을 제창하는데 근거로 삼았던 중요한 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위의 대화에서 앙산은 이 『열반경』에서 설하는 내용을 모두 ‘마설’로 치부하고 있다. 사실상 불교에서 ‘열반’은 바로 ‘성불’과 거의 대등한 궁극적 가치로 추구된다. 그렇다면 앙산이 이처럼 ‘마설’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미 ‘성불’이나 ‘열반’을 궁극적 가치로 보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앞에서 『단경』에서 추구하는 바가 ‘성불’이며, 그러한 까닭에 ‘여래선’을 최고의 경지로 설정했다고 했는데, 위앙종에 와서는 궁극적 가치가 변화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바로 ‘불경계佛境界’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돈오’를 통한 ‘당하즉시當下卽是’, ‘본래현성本來現成’으로 전환되었음을 여실하게 추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여래선’과 ‘조사선’의 구별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명확해진다. 예컨대 석상초원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중들이여, 알겠는가? “한 번 부딪혀 알음알이를 잊어버리고 다시 수지修持함을 빌리지 않아 제방의 도를 통달한 사람들은 모두 상상기上上機를 말하네.”라고 말한 것을 보지 못했는가? 향엄은 이렇게 깨달았으니 분명 ‘여래선’을 얻었을 뿐 ‘조사선’은 꿈에서조차 보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하니, ‘조사선’은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 

 

 

사진 3. 석상초원石霜楚圓 선사.

 

만약 말을 쫓아가면 곧 뒷사람들을 속이는 것이고, 바로 몽둥이[棒]로 맞고 인정한다면 옛 성인을 저버리는 것이다. 만법은 본래 한가로운데 오직 사람[人]이 분주할 뿐이다.(주12)

여기에서 석상은 앞에서 언급한 ‘향엄격죽香嚴擊竹’ 이후의 게송(주13)을 축약해서 언급하고, 그 역시 ‘여래선’을 얻은 것이라고 지적하고, ‘조사선’은 결코 언어 등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증자오自證自悟’, 즉 ‘돈오’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월법장의 격내와 격외

 

후기 선종에서는 이러한 ‘여래선’과 ‘조사선’의 분변分辨은 지나치게 많이 나타나고 있어 모두 논할 수는 없지만, 명대에 활동한 한월법장(1573~1635)은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참선에서는 먼저 ‘조사선’과 ‘여래선’의 결택을 귀하게 여긴다. ‘조사선’은 십법계의 밖을 뚫으며 여래의 법수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격외格外’라고 말한다. ‘여래선’은 구종의 법계를 초월하여 십법계의 꼭대기로 떨어져 오히려 격내格內이다. ‘격내’와 ‘격외’의 구분을 알고자 하면, 모름지기 하나하나의 사물에 있어서 십법계의 각종 견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며 곧바로 최상의 꼭대기에 오르니, 이것이 바로 여래지如來地의 계위이다. 조사선은 다시 부처의 정수리에서 나와 ‘격’을 벗어나며, 또한 조사와 외도의 두 종류를 뛰어넘는다. 이와 같다면 진정한 ‘조사’이다.”(주14)

 

사진 4. 한월법장漢月法藏 선사

 

이러한 법장의 논술은 상당히 중요한 점이 엿보인다. 우선, 여래선을 ‘격내’, 조사선을 ‘격외’로 구분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이는 법장이 최초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이전의 논의를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여래선을 통하여 조사선에 득입한다는 뉘앙스가 배여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하여 여래선에서 도달한 ‘여래지’, 즉 ‘부처의 정수리[佛頂]’를 다시 벗어나야만 비로소 ‘격내’를 벗어날 수 있으며, 나아가 다시 ‘조사’조차도 뛰어넘어야 참다운 ‘조사선’이라는 취지이다. 사실상 법장이 활동한 명대는 이미 조사선이 상당히 쇠락했던 시기이고, 오히려 양명학에 조사선을 빼앗겨 버렸다고도 평가할 수 있는 시절이다. 법장이 위와 같이 정리한 것은 복잡한 시대적 상황이 개입된 점이 있어 그와 관련된 논술은 명대로 미루기로 하겠지만, 조사선의 본질을 명확하게 파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가’ 가운데 최초로 성립한 위앙종에서 조사선과 여래선의 구별을 진행하면서 점차 ‘조사선’에 대한 개념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에 따라 조사선과 여래선의 분별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에 이어서 위앙종의 종풍宗風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각주>

(주1) 宗寶本, 『法寶壇經』(『大正藏』48, p.359下), “無所從來, 亦無所去, 無生無滅, 是如來淸淨禪.”

(주2) 『曹溪大師別傳』(卍續藏86, 51c), “無所從來曰生, 亦無所去曰滅. 若無生滅, 而是如來淸淨禪.”

(주3) [劉宋] 求那跋陀羅譯, 『楞伽阿跋多羅寶經』 卷2(大正藏16, 492a), “有四種禪. 云何爲四? 謂愚夫所行禪, 觀察義禪, 攀緣如禪, 如來禪. 云何愚夫所行禪? 謂聲聞, 緣覺, 外道修行者, 觀人無我性, 自相共相骨鎖, 無常, 苦, 不淨相, 計著爲首. 如是相不異觀, 前後轉進, 想不除滅, 是名愚夫所行禪. 云何觀察義禪? 謂人無我自相共相, 外道自他俱無性已. 觀法無我彼地相義, 漸次增進, 是名觀察義禪. 云何攀緣如禪? 謂妄想二無我妄想, 如實處不生妄想, 是名攀緣如禪. 云何如來禪? 謂入如來地, 行自覺聖智相三種樂住, 成辦衆生不思議事, 是名如來禪.”

(주4) 앞의 책. “凡夫所行禪, 觀察相義禪, 攀緣如實禪, 如來淸淨禪.”

(주5)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7a).

(주6) 앞의 책(大正藏48, 340a).

(주7) 『江西馬祖道一禪師語錄』(卍續藏69, 3b), “悟卽悟自家本性. 一悟永悟, 不復更迷. 如日出時不合於暗, 智慧日出, 不與煩惱暗俱. 了心及境界, 妄想卽不生, 妄想旣不生, 卽是無生法忍. 本有今有, 不假脩道坐禪, 不脩不坐, 卽是如來淸淨禪.”

(주8) 『黃蘗斷際禪師宛陵錄』, [宋]頥藏主集, 『古尊宿語錄』 卷3(卍續藏68, 19c), “夫學道者, 先修屛却雜學諸緣, 決定不求, 決定不著, 聞甚深法, 恰似淸風屆耳, 瞥然而過, 更不追尋, 是爲甚深入如來禪, 離生禪想. 從上祖師唯傳一心, 更無二法, 指心是佛, 頓超等妙二覺之表, 決定不流至第二念, 始似入我宗門.”

(주9) [明]語風圓信, 郭凝之編, 『袁州仰山慧寂禪師語錄』(大正藏47, 580b-c), “香嚴又成頌曰: 去年貧末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貧, 猶有卓錐之地; 今年貧, 誰也無. 仰山云: 如來禪許師弟會, 祖師禪未夢見在. 香嚴復有頌曰: 我有一機, 瞬目視伊. 若人不會, 別喚沙彌. 仰山乃報師云: 且喜閑師弟會祖師禪也.”

(주10) [唐]慧達, 『肇論疏』(卍續藏54, 55b), “‘頓’이라 하는 것은 이치를 나눌 수 없음[理不可分]을 밝힌 것이고, ‘悟’는 지극히 비춤[極照]을 말한다. 不二의 깨달음으로 나눌 수 없는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치[理]와 지혜[智]가 함께 희석됨을 ‘頓悟’라고 한다.[夫稱頓者, 明理不可分, 悟語極照. 以不二之悟符不分之理. 理智兼釋, 謂之頓悟.]”

(주11) [明]語風圓信·郭凝之編集, 『潭州潙山靈祐禪師語錄』(大正藏47, 578b), “師問仰山: 涅槃經四十卷, 多少是佛說, 多少是魔說? 仰山云: 總是魔說.”

(주12) 明]居頂輯, 『續傳燈錄』 卷3(大正藏51, 483c), “大衆, 還會麽? 不見道: 一擊忘所知, 更不假修持, 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 香嚴恁麽悟去, 分明悟得如來禪, 祖師禪未夢見在. 且道, 祖師禪有甚長處? 若向言中取, 則誤賺後人, 直饒棒下承當, 辜負先聖. 萬法本閑, 唯人自鬧.”

(주13) [宋]道原纂, 『景德傳燈錄』 卷9(大正藏51, 284a), “한 번 부딪침에 알음알이를 잊어버리고, 다시 修持함을 빌리지 않네. 움직임에 옛사람의 길을 내세우며, 근심스러운 根機에 떨어지지 않도다. 곳곳에 종적은 없으나, 聲色은 밖으로 威儀를 갖추고 있네. 제방의 道에 통달한 사람들은 모두 上上機를 말하는구나.[一擊忘所知, 更不假修治, 動容揚古路, 不墮悄然機. 處處無踪迹, 聲色外威, 儀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

(주14) [明]法藏說, 弘儲編, 『三峰藏和尙語錄』 卷6(嘉興藏34, 154c), “參禪貴先決擇祖師禪如來禪. 祖師禪者, 透十法界之外, 不墮如來之數, 故曰: 出格. 如來禪者, 超于九種法界, 墮在十法界之頂, 猶是格內. 欲知格內格外之分, 須在一事一物上分淸, 十法界諸種之見, 直到極頂, 方是如來地位, 祖師禪, 又從佛頂上透出, 出格之外, 又越兩種祖師外道. 若是眞正祖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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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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