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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봉은사의 가람배치와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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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12 월 [통권 제116호]  /     /  작성일22-12-05 13:47  /   조회1,99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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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26 | 봉은사 ② 

 

봉은사는 인간들이 벌이는 희한한 역사의 전개를 겪다가 결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 후 중수작업이 간간이 이루어지다가 1790년에 전국 사찰의 승풍과 규율을 감독하는 5규정소五糾正所(봉은사, 봉선사, 개운사, 중흥사, 용주사)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와 경기도의 사찰 일부를 관할하였고, 일제식민지시대에 전국의 불교 사찰이 31개의 본산으로 재편되었을 때 경성 일원을 관장하는 본산으로 역할을 하였다. 

 

사진 1. 봉은사 일주문.

권창륜과 오재봉의 봉은사 현판

 

1939년에 또 화재로 대웅전, 동서의 승당과 진여문, 만세루, 창고 등이 재로 변하였다. 1975년에 들어와 붓다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삼층석탑과 석등을 조성하였고, 그 이후 현재 있는 당우들이 차례로 새로 들어섰다.

 

봉은사 일대는 70년대 강남 개발 이전에는 주로 밭이 있었고 서울 사람들도 큰마음을 먹어야 놀러가던 곳이었다. 오늘날에는 봉은사는 서울의 가장 번화한 도심의 한가운데 있게 되어 선정릉의 공원과 함께 외국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봉은사 앞의 대로를 건너면 대형 호텔, 무역센터, 코엑스몰, 대형 빌딩 등이 밀집해 있는데, 이 구역도 옛날에는 봉은사의 땅이었다.  

 

사진 2. 권창륜 서 봉은사 현판.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531번지 대로변에는 양쪽에 코끼리 석상이 서 있는 사찰 입구가 있다. 고색창연하면서도 고졸한 일주문一柱門이 하나 서 있는데(사진 1), 깊은 산중에나 서 있을 법한 격조 높은 이 문은 원래 봉은사에 있었는데, 근래에 진여문 등을 짓는 와중에 경기도 용문산龍門山 사나사舍那寺와 양주 오봉산 석굴암으로 옮겨져 서 있다가 최근에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와 현재의 자리에 서 있다. 1880년대 지어진 것으로 판전板殿과 함께 화마의 손길에서 살아남은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일주문에는 서예가 초정草丁 권창륜權昌倫(1943〜) 선생이 쓴 ‘수도산봉은사修道山奉恩寺’라는 현판이 앞쪽에 걸려 있다(사진 2). 초정선생은 조선시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라는 대작을 저술한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 선생의 후예이다.

 

사진 3. 봉은사 진여문.

일주문을 지나면 4개의 높은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진여문眞如門이 웅장하게 서 있다. 천왕문天王門의 역할을 하는 문이다. 1982년에 세운 것인데 당시에는 현재의 일주문이 없어서 진여문이 일주문의 역할을 함께 하였다(사진 3). 진여문의 앞쪽에는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峯(1908〜1991)화상이 쓴 「봉은사奉恩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 글자 양쪽에는 세로로 ‘수도산修道山’, ‘수선종首禪宗’이라고 쓰여 있다(사진 4). 선종 사찰의 으뜸이라는 말이다. 뒤 쪽에는 석주昔珠(1909〜2004) 대화상이 쓴 「진여문眞如門」의 현판이 걸려 있다(사진 5).

 

사진 4. 오재봉 서 봉은사 현판. 

 

사진 5. 석주화상 서 진여문 현판.

 

키 높은 문짝에는 인도 재래신앙에서 유래한 신들인 신중상神衆像이 그려져 있고, 문 안쪽에는 양쪽으로 1746년에 조성한 목조 사천왕四天王 입상이 서 있다.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에 살면서 동서남북 사방에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데,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일컬으며 사대금강四大金剛이라고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Gandhara 미술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Hercules가 동쪽으로 와서 금강역사金剛力士라는 이름으로 그 모습을 바꾼다.

 

법왕루와 대웅전의 현판

 

진여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진 방향으로 천천히 올라가면 웅장한 법왕루法王樓가 나온다(사진 6).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법왕루에는 당대 서예의 제1인자이기도 했던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1871〜1936) 선생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사진 7).

 

사진 6. 봉은사 법왕루.

그는 일찍이 중국을 내왕하며 새로운 지식과 자료들을 접해 왔던 역관譯官 집안의 후예이면서 사자관寫字官으로 글씨를 잘 썼던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아 전통학문과 신학문을 두루 통섭하였다. 1887년 16세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하여 법률가가 되었으면서도 학예學藝에 관하여 방대한 지식과 실력을 겸비하고 금석문金石文에도 정통했을 뿐 아니라 예서隸書, 전서篆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전각篆刻 등 전 분야에서 당대 조선 서예의 최고봉으로 이름을 떨쳤다. 

사진 7. 김돈희 서 법왕루 현판.

법왕루의 뒤쪽 처마 밑에는 오세창 선생이 1943년에 전서로 쓴 ‘선종종찰 대도량禪宗宗刹大道場’ 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선종사찰 중에 최고 맏집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이 자리에는 천왕문이 있었고 사천왕상이 있었는데, 법왕루를 신축하면서 사천왕상은 현재의 진여문으로 옮겨졌다. 현재 가람의 배치를 보면 그간 봉은사가 여러 차례 소실 중건을 반복하였기에 좀 어지럽지만, 조선시대 봉은사를 세울 때에는 붓다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첫 문인 진여문, 중문인 천왕문, 마지막 문인 해탈문이 차례대로 서 있었다.

 

법왕루의 기둥 아래를 지나 계단으로 올라서면 붓다가 있는 대웅전의 공간에 이른다. 대웅전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대웅전大雄殿’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수륙재水陸齋를 올리던 중심사찰인 진관사津寬寺에 있는 원래의 현판을 모각하여 단 것이다(사진 8). 대웅전에는 승일勝一 화상 등 9명의 조각승들이 조성하여 봉안한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의 삼불좌상이 있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봉은사가 소실되어 쇄락한 상황에서 다시 불사를 일으켜 세우면서 조성된 것이다.

 

사진 8. 봉은사 대웅전.

대웅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선불당選佛堂이 있다. 선불당의 현판은 당대 명필인 농천農泉 이병희李丙熙 선생이 썼다(사진 9). 조선서화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행서와 초서를 잘 썼으며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1896〜1989) 선생의 형이다. 강릉 선교장船橋莊의 6대째 주인 이근우李根宇(1877〜1938) 선생과는 사돈관계에 있다. 앞마당에는 동서 양쪽에 석등이 서 있는 가운데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1975년에 조성된 것인데 당시 범어사 석암화상이 보관해 오던 진신사리 4과 중 1과를 이 안에 봉안하였다.

 

사진 9. 농천 이병희 서 선불당 현판. 

 

사진 10. 지운영 서 영산전 현판.

대웅전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영산전靈山殿이 나온다. 석가모니불과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이외에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영산전의 현판은 백련白蓮 지운영池運永(=池雲英, 1852〜1935) 선생이 예서로 썼다. 힘이 있고 구성도 좋다(사진 10). 지운영 선생은 추사선생의 제자인 여항문인 강위姜瑋(1820〜1884)를 맹주로 하여 결성한 육교시사六橋詩社의 중요 멤버로 활동하였는데, 서화와 사진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에는 김옥균金玉均(1851〜1894) 선생을 암살하려고 일본에 건너가기도 했으나 미수에 그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귀국 후 유배를 갔다. 그 후에는 서화에 몰두하였다.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처음 실시하고 국어학자이면서도 근대 의학의 도입에 앞장섰던 지석영池錫永(1855〜1935) 선생은 그의 동생이다. 다들 비장한 시대에 비장하게 살다 떠났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판전 현판

 

대웅전에서 판전 쪽으로 가다 보면 10년 동안 불사를 한 23m에 달하는 거대한 미륵대불이 서 있다. 추사선생의 시에 “아미타불을 천 번 염송하는 사이에 미륵전에 하늘이 밝아 오네[阿彌陀佛一千聲 慈氏閣中天始明]”라는 구절을 근거로 봉은사를 미륵도량이라고 보고, 이미 사라진 미륵전彌勒殿을 되살려 근래에 미륵대불을 세우고 1942년에 세운 법왕루를 옮겨 미륵전으로 삼았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이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있다(사진 11). 법왕루의 현판은 신축한 새 법왕루에 걸려 있고, 원래의 법왕루였던 건물은 미륵전으로 이름이 바뀐 셈이다(사진 12).

 

사진 11. 봉은사 미륵대불.

대웅전에서 앞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가면 봉은사 사역 내에 있는 당우 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인 판전이 서 있다. 이 판전은 이름 그대로 불경을 새긴 경판을 보관하는 전각이다(사진 13). 1856년에 화은호경華隱護敬 화상이 지은 「경기좌도광주수도산봉은사화엄판전신건기京畿左道廣州修道山奉恩寺華嚴板殿新建記」에 의하면, 1794년 백암栢庵대사가 화엄대경華嚴大經을 바다에 표류한 배에서 얻어 낙안 징광사澄光寺에서 간행했으나 화재로 판본이 타버리고, 1834년 설파雪坡 장로가 함양 영각사靈覺寺에서 다시 판각하여 속간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자획이 마모되어 인출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1855년에 남호영기南湖永奇(1820〜1872) 대율사가 봉은사에서 여러 고승들과 논의한 끝에 『화엄경』을 판각하기로 하고 1년 만에 경판을 새기고 이를 보관하는 판전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서산대사 이후로 조선 불교는 임제종臨濟宗을 정통으로 하고 『화엄경』을 중심으로 공부해 왔는데, 그 흐름에서 『화엄경』 판각 간행불사가 이루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 12. 봉은사 미륵전.

판전에는 불교에도 깊은 조예를 가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선생이 쓴 ‘판전板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852년 오랜 유배에서 풀려나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말년을 보내던 추사선생은 71세이던 1856년에는 봉은사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때 영기화상의 부탁을 받고 병중에서 이 글씨를 썼고, 그해 10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의 현판은 보존을 위하여 따로 보관하고 있고 현재는 모각한 것이 걸려 있다. 병고와 나이의 탓도 있었겠지만 글씨에서 기교가 배제되고 서법에서 말하는 골기骨氣를 강하게 하여 해서楷書로 썼다(사진 14). 이 현판 글씨를 추사선생이 이세離世하기 3일 전에 썼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이를 증명할 그 당시의 기록은 없고, 이기복李起馥이 1935년에 쓴 「단상산고湍上散稿」에 이 글씨를 쓰고 3일 후에 별세했다고 전한다.

 

판전 현판을 통해 읽는 추사선생의 고단한 삶

 

그건 그렇고, 나는 이 글씨를 볼 때마다 지독한 인간들이 뛰어난 인재를 결국 말려 죽였구나 하는 분노를 가누기 어렵다. 안동(=장동)김씨 세력이 경주김씨 세력을 제압하기 위하여 경주김씨의 불세출의 다크호스를 아예 죽여버리자고 작당한 모함에 걸려 추사선생은 55세에 유배의 길에 올라 67세에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진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병든 노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김노경金魯敬(1766〜1837) 선생의 신원伸寃을 구하는 격쟁擊錚을 벌이다가 세상을 하직하였다. 적들은 기뻐했으리라. 그때까지도 장동김씨 세력은 김좌근金左根(1797〜1869) 등을 중심으로 김조순金祖淳(1765〜1832) 가문이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부패권력으로 국정을 농단하며 기고만장하게 살았다. 그렇지만 사회 기반이 붕괴되고 1862년에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번져나가고 나라는 기울어져 결국 조선이 멸망하는 길로 빠지면서 그들의 권력놀음도 끝나게 된다. 나라가 망하고 없는데 권력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백성들만 또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사진 13. 봉은사 판전.

‘국가권력의 사유화’, 즉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가의 공권력을 이를 행사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행위는 헌법에서 절대적으로 금지되는 것이다. 헌법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런데 국가권력의 사유화의 문제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붓다의 가르침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욕망의 주체인 인간이 욕심을 끊어 버리고 서로 다투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헌법학이 붓다의 가르침에 의존하는 것은 그 사명을 포기하는 것 같다. 이 문제는 철저히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방책을 찾아야 한다.

 

판전의 불사에는 철종哲宗(1849〜1863)과 철인왕후哲仁王后(1837〜1878),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1789〜1857), 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1809〜1890)등 왕실과 신료들, 상궁들, 많은 비구, 비구니 스님들도 적극 참여하여 재원 조성에 힘을 보탰다. 판전 공사의 도편수都片手는 유명한 침계민열枕溪敏悅 화상이 맡았고, 부편수 이하 장인들은 민간인들이었다. 승려가 불화佛畫, 불구佛具, 불우佛宇 등에서 장인의 특기를 가지는 것을 고려시대 이래 수행의 하나로 여겨 왔는데, 민열화상이 그 시대에 도편수로 국내 여러 사찰의 전각들을 지으며 활약한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사진 14. 김정희 서 판전 현판. 

 

당시에 판각한 경은 방대한 『화엄경』 전부가 아니라 『대방광불화엄경소초大方廣佛華嚴經疏抄』,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소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疏』,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심경心經』,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佛說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經』,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등이었다. 조선시대 목판 1장을 만드는 비용이 오늘날 금액으로 400만 원 정도였으니 이런 정도의 판각 불사도 엄청난 비용이 드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인출하여 공부하면 안 되었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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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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