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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禪, 禪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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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11:02  /   조회2,48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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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산에 가느냐고요? 산에 가면 기분이 좋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휴대폰, 컴퓨터, 텔레비전 등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느라 눈과 귀가 쉬지 못하고 늘 긴장 상태에 있습니다. 혹은 자신에게 너무 푹 빠져 자잘한 걱정거리에 매여 삽니다. 산행은 긴장된 눈과 귀를 쉬게 하고, 답답한 자기 자신을 떠나는 것이며, 자신보다 훨씬 큰 대자연과 연결되는 풍요로운 경험이기도 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산행을 하면 전에는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도 가보게 됩니다. 모처럼 멀리 운문댐에 있는 공암孔巖 풍벽楓壁으로 갑니다. 공암리 마을을 지나 약 2km 산길을 올라가면 30m 높이의 풍벽이 있습니다. 공암 풍벽은 구멍 뚫린 바위가 있는 단풍이 아름다운 절벽이란 뜻입니다(사진 1).

 

푸른 하늘, 흰 구름, 드넓은 초원

 

공암리 마을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광활한 초원이 나타납니다. 이곳은 원래 운문댐에 속하는 곳으로 물이 가득 차 있는 호수였습니다. 가뭄으로 물이 말라버리자 호수 밑바닥은 잡초의 발아로 대초원으로 변했습니다.

 


사진 1. 운문댐 호수와 공암孔巖 풍벽楓壁. 

 

지금까지 몇 차례의 빙하기 시절,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전멸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6~8억 년 전에 나타난 빙하기에도 지구상의 생명이 또 한 번 거의 전멸했습니다. 거대한 환경 변화에도 바다 밑이나 땅속 깊은 곳에서 생명은 살아남았습니다. 큰 기후 변화와 혹독한 환경이 놀라울 정도로 생명을 진화시켰습니다. 생명의 역사에는 진실이 있고, 진실 속에는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정말이지 생명은 역경 속에서, 아니 역경을 통해서 진화를 이룩합니다(사진 2).

 

산기슭에는 물이 찼을 때의 수면이 숲 아래에 선을 그은 듯 나타나 있습니다. 이 시원스런 초원은 많은 것을 말해 주지만 우리는 겨우 몇 가지만 알아듣습니다. 꿈처럼 펼쳐지는 푸른 하늘, 흰 구름, 드넓은 초원, 이 풍경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꽉 채워집니다. 

 

사진 2. 가뭄으로 말라버린 호수 바닥에 나타난 드넓은 초원. 

 

공암 풍벽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나무 데크와 야자 매트가 깔려 걷기 좋습니다.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어 잠시 앉아 쉬기도 하면서 쉬엄쉬엄 올라 갑니다. 길은 거의 절벽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좁고 위험합니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을 암벽길도 몇 군데나 있습니다(사진 3).바위 사이로 혹은 양쪽 모두 낭떠러지가 보이는 좁은 길이 이어집니다. 밧줄도 쳐져 있고, 야자 매트도 깔려 있어 걷기에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풍벽을 따라 걷노라면 경치가 좋은 곳에는 조망 데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대초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사라지고 미소가 떠오릅니다(사진 4).

 

호수 밑바닥 땅속에 숨어 있던 잡초가 죽지 않고 살아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잡초의 씨앗은 물밑 땅속에서 수십 년 동안 싹 틔울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늘의 선물처럼 나타난 이 아름다운 풍경에 깊은 행복감을 느낍니다. 초원은 인류가 가진 보편적 무의식의 근원이며 치유의 원형 풍경입니다. 초원 사이로 한줄기 시냇물이 흘러갑니다. 한 번만 보면 평생 잊을 수 없는 풍경, 말 없는 풍경입니다(사진 5). 

 

사진 3. 암벽길. 

 

저 아래 초원에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것,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다는 것이 저 초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사람 하나 없는 이 공허한 적막에 우리는 몸과 마음을 모두 잊어버립니다. 이런 풍경 속에서 티끌세상을 초월하여 심리적 평형을 되찾고, 자기 자신마저 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적막한 풍경은 풍경 자체가 바로 설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풍경 앞에 서면 등줄기가 쫙 펴지는 느낌이 듭니다.

 

헛똑똑이

 

저 초원은 호수의 밑바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호수가 진짜 모습이고 초원은 일시적인 현상일까요? 아니면 초원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이고 호수가 일시적인 현상인 걸까요? 눈앞의 현실만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시야가 넓어지기 위해서는 더 큰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본래면목이라고 하지만 불가佛家에서는 훨씬 더 깊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통상적인 언어에 역사적 일화를 더해 의미에 깊이와 향기를 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이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경덕전등록』(1004년), 『오등회원』(1252년) 등에서 이 일화를 언급하고 있지만 가장 오래되고 원형에 가까운 기록은 『조당집』(952년)에 실려 있습니다. 

 

사진 4. 조망 데크에서 초원을 바라보면 긴장이 사라지면서 미소가 떠오른다. 

 

향엄香嚴(?~898)은 위산潙山(771∼853)의 법을 이은 제자인데, 키가 7척이나 되고,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능해서 학문으로 당할 이가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 위산이 물으면 대답하기를 마치 병의 물을 쏟듯 했으나 위산은 그의 학문이 건성일 뿐이요 근원을 깊이 통달한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의 말재주를 쉽사리 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위산

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껏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눈과 귀로 남에게서 듣고 보았거나 경권經卷이나 책자에서 본 것뿐이다. 나는 그것을 묻지 않겠다. 그대는 처음 부모의 태胎에서 갓 나와 아무것도 아직 알지 못했을 때의 본분本分의 일을 한마디 일러보라. 내가 그대의 공부를 가늠하려 하노라.”(주1)

 

이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자 의미가 깊은 한 편의 시詩입니다. 사람이 공부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헛똑똑이가 되고 맙니다. 위산은 그것을 경계하고 향엄에게 남의 말이 아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한 말을 해보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막 태어나 아무것도 모를 때의 네 본래면목은 무엇인가를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아무것도 모를 때 당신은 누구일까요? 

 

아무것도 모르면 언어도 없고 생각도 없어서 정체성은 물론 자아自我도 없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다면 과연 당신은 누구일까요? 아무 생각도 없다면 우리는 에고가 없는 세계에 있게 됩니다. 에고가 없으면 쇼펜하우어가 말한 ‘자신을 망각한, 고뇌가 없는 관조’를 할 수 있습니다.(주2) 에고가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더 가벼운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순수경험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는 것이 대단히 많았지만 헛똑똑이에 불과했던 향엄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오래 생각하다가 다시 이러쿵저러쿵 몇 마디 했으나 모두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도를 일러 주실 것을 청하니, 위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르쳐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대가 스스로가 알아내야 그대의 안목이다.”(주3)

 

항상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라

 

어떤 지식이든지 책에서 배우는 것을 학득學得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생각해서 깨닫는 것을 체득體得 혹은 자득自得이라고 합니다. 위산은 향엄에게 불교의 공부는 책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향엄이 방으로 들어가 모든 서적을 두루 뒤졌으나 한마디도 대답에 알맞은 말이 없었습니다. 향엄은 비로소 자신의 공부가 헛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책을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사진 5. 푸른 하늘, 흰 구름, 드넓은 초원. 

 

향엄은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며 위산에게 하직을 고하고 산문山門을 떠났습니다. 향엄산으로 들어가 충忠 국사國師의 유적遺跡에서 몸과 마음을 쉬었습니다. 풀을 뽑으며 번민을 덜고 있다가 어느 날 기와 쪽을 던진 끝에 크게 깨닫고 웃으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습니다. 

 

한 번 던지매 알던 것 잊으니

다시 더 닦을 것 없구나

이르는 곳마다 자취가 없으니

소리도 없고 모습도 없는 위의威儀로다 

세상의 도를 아는 이라면

모두가 나를 일러 상상기上上機라 부르겠지(주4)

 

향엄은 마침내 본래면목을 깨달은 것입니다. 향엄이 깨달은 본래면목은 독립된 자아도 없고 욕심도 없는 무아無我와 무욕無慾의 세계입니다. 무아와 무욕의 세계에 들어가면 사람은 평온해집니다. 그리고 저절로 나오는 웃음이 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은 자유롭습니다. 

클릭만 하면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더 똑똑해지는 것 같지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줄 모르는 헛똑똑이가 되어 가는 것 같아서 쓰디쓴 뒷맛이 느껴집니다.

 

만개하는 꽃처럼 

 

올라오는 길에서는 그냥 스쳐지났던 길도 내려갈 때 보면 모습이 달라집니다. 바위에 달라붙은 이끼의 섬세한 초록색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내려오는 길, 어디선가 꽃향기가 날아옵니다. 음, 이건 칡꽃 향기로군요. 나는 향기로 칡꽃의 존재를 미리 알아차리고 두리번거린 끝에 칡꽃을 찾아냅니다. 총상꽃차례로 밑에서부터 자주색 꽃이 피어나는 중입니다. 총상總狀이란 포도송이 모양을 말합니다. 한번 피어나기 시작하면 흐드러지게 만개하는 꽃처럼 우리도 자기 존재를 활짝 드러내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각주>

(주1) 『祖堂集』 卷第十九, “汝從前所有學,解以眼耳。於他人見聞及經卷冊子上,記得來者,吾不問汝。汝初從父母胞胎中出,未識東西時本分事,汝試道一句來,吾要記汝.”

(주2)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 “자신을 망각한, 고뇌가 없는 관조로부터 우리는 멀어도 너무 멀어져 있다.”

(주3) 『祖堂集』 卷第十九, “吾道不當 汝自道得 是汝眼目.”

(주4) 『祖堂集』 卷第十九, “一挃忘所知 更不自修持 處處無蹤迹 聲色外威儀 十方達道者 咸言上上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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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1976년 시). 전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대학교 사범대 겸임교수, 전 영신중학교 교장.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저서로 『보물찾기』(시와시학사, 2000), 『납작바위』(시와반시사, 2012), 『글쓰기 노트』(집현전, 2018) 등이 있다.
jtsu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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