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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천불천탑의 도량 천불산 운주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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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10:56  /   조회1,85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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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운주사에는 석물들이 골짜기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며 줄지어 서 있는데, 이들의 배치는 쌍탑 1금당이나 1탑 1금당과 같은 전통적 가람의 배치양식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이러한 석물들이 같은 시대에 세워진 것인지 다른 시기에 따로 따로 세워진 것인지 그것도 알기 어렵다. 

 

다양한 형태의 석탑과 석불

 

이 골짜기로 난 길을 걸어가면 양쪽에 있는 산등성이에도 간간히 탑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산등성이에는 균형이 잡히지 않은 키 큰 석불도 있고 오층석탑도 서 있다(사진 1). 채석장을 지나면 탑신에 X자를 새긴 칠층석탑이 이른바 ‘칠성바위’ 옆에 서 있다. 이를 놓고 북두칠성과 닮아 천문과 연관이 있다든가 칠성신앙과 연관이 있다는 등 해석이 구구하다(사진 2). 어쩌면 둥근 탑을 쌓으려고 다듬어 놓은 석물을 나중에 누군가 이렇게 배치하였을지도 모른다. 동그랗게 다듬은 석물들은 절의 다른 곳에도 흩어져 있다. 나머지는 누군가 사용하려고 주워 갔을지도 모른다(사진 3). 

 

사진 1. 산등성이의 오층석탑과 칠층석탑. 

 

흥미로운 것은 여기저기 서 있는 석불도 그 모습이 다종다양하고 크기도 모두 다르다. 어떤 것은 서 있고 어떤 것은 앉아 있다. 얼굴만 있는 것도 있고 가슴까지 땅에 묻힌 것도 있다. 여러 기가 모여 있기도 한데, 석불들이 이렇게 놓여 있는 것은 아마도 원래부터 이렇게 조성되었다기보다 나중에 사역권 내에 흩어져 있는 석불들을 수습하여 모아 놓는 과정에서 장소적 이동이 있었다고 보인다(사진 4). 석불의 얼굴 모습은 능숙한 석공이 공들여 조각한 원만한 모습이 아니라 어딘가 모자라는 못생긴 얼굴들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보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을 한다. 도술을 부려서? 하룻밤에 급히 만들어서? 무식한 천민들이 만들어서? 그러나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사진 5). 

 

사진 2. 산등성이의 석불. 

 

불상들을 보면 석굴암 불상과 같이 전체가 입체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뒷면이 평평한 얇은 석판에 새긴 것들이다. 석불을 만든 돌은 이 산에서 채취한 것인데, 채석장의 바위들을 얇은 석판의 형태로 켜 낼 수 있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산등성이에는 거대한 불상을 만들려고 새겨놓은 다음 이를 켜 낼 수 없어 그대로 남아 있는 이른바 ‘와불臥佛’이 있다. 이 거대한 불상을 새긴 것은 와불이 아니고 거대한 불상을 새기다가 암벽에서 떼어내지 못하여 그대로 둔 것이다(사진 6).

 

손의 모양으로 보아 각각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이다. 이 석불을 뜯어내어 운주사에 새워 놓았다면 아마도 운주사의 중심이 되는 석불이 되었을 것 같다. 그 모습이 땅에 누워 있기에 이를 두고 이 부처가 일어나는 날이면 천지가 개벽한다느니 하는 온갖 잡설이 생겨났다. 근처 산비탈에는 부처를 새기려고 바위를 잘라 뜯어낸 흔적도 분명하게 남아 있고, 바위를 뜯어내려고 구멍을 뚫어 놓은 자국도 남아 있다. 

 

사진 3. 칠성바위. 

 

운주사에 있는 다종다양한 모습의 불상과 석탑들의 양식으로 보아 12~13세기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 근거로는 고려시대의 불상에는 이곳의 불상들과 비슷한 지방화된 양식들이 많이 등장하고, 탑의 양식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방형탑, 육각탑, 팔각탑, 모전계열 석탑 또는 원형탑들이 건립된 것을 든다. 이렇게 되면, 신라의 운주화상이니, 거북이 바위를 날랐느니, 도선국사니 풍수니 천지개벽이니, 장길산이니 하는 속설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운주사를 찾아가면 이상하게 생긴 석탑과 석불들이 이상하게 서 있고, 누가 이런 것들을 만들고 무엇 때문에 이런 골짜기에 세웠는지도 알 수 없기에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온갖 이야기들과 과잉해석이 난무한다. 근래 학계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차분히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다행이다. 많은 이야기 중 다시 불교로 돌아와 생각해 보면, 미륵신앙과의 연관성이 주목된다. 미륵전을 세워 놓은 것도 이런 연고인 듯하다. 

 

운주사와 미륵신앙

 

미륵彌勒은 Maitreya를 번역한 한자말인데, 이는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파생된 말이다. 실크로드의 문명이동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고대 이란에서 신앙의 대상이었던 태양신 미트라Mithra와 어떤 연관성도 있어 보인다. 미륵이라는 말이 자비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여 중국에서는 미륵보살을 자씨보살慈氏菩薩로도 번역했다. 

 

사진 4. 원형의 석물. 

 

미륵은 『장아함경長阿含經』, 『중아함경中阿含經』, 『현우경賢愚經』 등 불교의 초기 경전들에서 등장하고, 『화염경華嚴經』에서는 선재동자善財童者(Sudhana Kumāra)가 찾아가는 선지식이 미륵보살로 나오고, 『법화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의 중요한 존재이고, 도솔천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천불千佛이 맡는데, 이른바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 즉 『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등에 오면, 계속 다듬어져 그 구도를 완성하게 된다.

 

이에 의하면, 붓다 즉 싯다르타의 제자 중에 미륵보살이 있었는데, 그는 인도 바라나시국의 브라만 출신으로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싯다르타는 이 미륵보살에게 미래에 성불하여 이 세상의 제1인자가 될 것이라고 수기授記하였다. 미륵보살은 지극히 수행한 끝에 도솔천에 올라가 하늘에 사는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였고, 싯다르타가 입적한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다음 인간의 수명이 8만 세가 될 때 이 세상에 미래불未來佛로 다시 내려와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지상에 용화세계를 건설하고 중생을 구제한다.

 

3회의 용화설법[龍華三會]으로 272억 인간을 구제한다. 미륵이 지상에 나타날 때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다스리고 있을 때이다(하생신앙下生信仰). 중생은 이러한 가르침을 믿고 미륵불을 염불하고 여러 계율을 지키고 지극히 수행을 하면 죽은 다음에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면 이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 그와 함께 염부제閻浮提로 내려와 미륵불이 베푸는 용화삼회龍華三會의 법회를 통하여 아라한과를 얻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온갖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게 된다(상생신앙上生信仰). 하생신앙이 먼저 형성되고 상생신앙이 보다 후대에 형성되었다고 본다.

 

사진 5. 원형의 이형탑. 

 

미륵불을 믿고 실천하면 구원의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은 인도에서 생겨난 신앙이었다.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와 성불하는 때가 싯다르타 입적 후 56억7천만 년이라고 하지만 실로 합리적으로 계산이 되지 않는 것임은 분명하다. 기록에 따라서는 3천 년, 5억 76만 년, 56억만 년이라고 한 경우도 있다. 그냥 먼 후일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 동안에 인간이 지구상에서 소멸되면 확인할 길도 없다.

 

한반도에는 전진前秦(351~394)의 전성기 때의 군주 부견符堅(재위:357~385)이 고구려에 미륵불상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진에는 미륵신앙이 번창했다. 5호胡 16국國시대에 이민족인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갈羯, 강羌의 다섯 종족 가운데 중원을 차지하고 황하 북쪽을 통일한 저족이 세운 나라가 전진이다. 전진에게 망한 갈족이 세운 후조後趙(319~351)도 쿠차龜玆국 출신 고승 불도징佛圖澄(232~348)을 낙양洛陽으로 모셔 국정 자문을 받은 나라였다.

 

이 시절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역西域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활발하게 전래되고 동진東晉(317~419)의 도안道安(312~385)과 혜원慧遠(334~416)과 같은 천하의 뛰어난 고승들이 불경을 번역하며 맹활약을 펼치고 있던 때였다. 부견은 도안을 초빙하여 수도 장안長安을 불교 중심지로 만들었다. 역시 동진에서는 왕희지王羲之(303~361)와 왕휘지王徽之(338~386), 왕헌지王獻之(348~388) 등 그 아들들이 글씨로 이름을 날리고, 도연명陶淵明(365~427)과 사령운謝靈運(385~433)이 시문詩文으로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쳤다.

 

인디아 즉 천축국 재상의 손자로 쿠차국에서 태어난 위대한 성자 구마라십鳩摩羅什(Kumārajīva, 334~413)이 서역의 여러 나라를 다니다가 그를 고대하던 부견이 동진 정벌의 실패로 죽은 후 후진後秦(384~417)의 수도가 된 장안 소요원逍遙園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불경을 번역하며 대승불교의 새 시대를 펼친 때도 이 시절이다.

 

서역은 감숙성甘肅省에서 파미르고원(총령葱嶺) 사이 천산산맥天山山脈과 곤륜산맥崑崙山脈 아래로 난 남북실크로드 상에 있었던 카슈가르(Kashgar, 소늑疏勒), 악수(Aksu, 고묵姑墨), 쿠차, 투르판(Turpan, 吐魯番, 고창高昌, 온숙溫宿), 하미伊吾, 누란樓蘭(鄯善), 돈황敦煌, 미란米蘭, 체르첸(Cherchen, 차말且末), 니야(Niya, 尼雅, 정절精絶), 호탄(Khotän, 우전于闐, 和田), 야르칸드(Yarkant, Yerkent, 사차莎車) 등 오아시스 국가들이 있는 광대한 지역을 말한다.

 

삼국의 미륵신앙

 

백제에는 최대의 왕실 원찰인 미륵사彌勒寺와 미륵광불사彌勒廣佛寺 등이 세워지고 미륵신앙이 광범하게 번져나갔으며, 신라에서는 불교의 미륵신앙이 화랑花郞이나 향가鄕歌 등에까지 깊이 침투하고 확산되었다. 미륵사상에 대한 교학적 체계는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서 다듬어진다. 원효元曉(617~686)대사는 『미륵상생경』에 대한 종요宗要와 소疏를 짓고, 당나라 현장법사玄獎法師(602?~664)의 제자로 중국에서 명성을 날린 원측圓測(613~696)화상은 『미륵상생경약찬彌勒上生經略贊』을 지었으며, 의상대사의 10대 제자로 많은 불경의 주석을 남긴 의적義寂(681~?)화상은 「미륵상생경요간彌勒上生經料簡」을 저술하였다.

 

현장 – 원측의 법상종法相宗의 법맥을 이어 방대한 저술을 남긴 태현太賢(?~?)화상은 미륵삼부경에 대한 『고적기古迹記』 각 1권씩을 저술하였고, 원효대사, 태현화상과 함께 방대한 저술을 남긴 경흥憬興(?~?)화상은 『미륵상생경소彌勒上生經疏』, 『미륵하생경소彌勒下生經疏』, 『미륵경수의술문彌勒經遂義述文』, 『미륵경술찬彌勒經述贊』 등을 저술하였다. 경덕왕 때의 진표眞表(?~?)율사는 망신참亡身懺과 점찰법占察法을 통하여 독특한 미륵신앙을 확립시킨 대종주大宗主였다. 그는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연결하고 참회와 깨달음을 통하여 새로운 정토를 여는 근본도량으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교학불교에서는 미륵정토인 도솔천에 상생上生하기를 기원하는 상생신앙이 주로 논구되고 전파된 것 같다. 물론 이때는 아직 이 땅에 선종이 들어오기 전이다. 그 이후 고려시대에는 선종, 법상종, 화엄종의 활성화로 이런 미륵신앙은 도태되었지만, 민간신앙으로 침윤되어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지명, 산 이름, 절 이름 등에서 미륵, 용화龍華, 도솔兜率과 같은 말이 널리 사용된 것은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메시아주의 사고와 역사적 변용

 

그런데 이런 메시아주의Messiahism의 사고틀은 종교성을 강화하여 주기도 하지만 세속에서는 혹세무민하는 수단으로 쉽게 동원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종교이건 사상이건 민간신앙이건 구세주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서는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메시아라는 말은 유대교Judaism의 구세주인 ‘메시아Messiah’에서 온 것이지만, 기독교Christianity의 ‘재림예수(Second Coming Jesus)’, 불교의 미륵 등 모두 ‘구세주 사고’의 틀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복을 바라는 인간에게는 이러한 요소가 없다면 철학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종교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의 역사에서 동서의 교류선인 고대 실크로드에서는 인도에서 생겨난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와 페르시아에서 생겨난 조로아스트교, 마니교, 그리고 서방에서 생겨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백가쟁명으로 동서로 횡행했다. 때로는 서로를 배척하는 치열한 경쟁도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각 종교들과 지역 신앙들은 서로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1세기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우의적인 경전을 가지고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평정을 얻어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피타고라스Pythagoras(BC 570~BC 495 추정)를 신봉하는 테라페우타이(Therapeutai, Therapeutae)라는 불교와 유사한 유대종파도 있었다. 

 

사진 6. 산등성이의 미분리 석불. 

 

아무튼 역사에서는 기존 종교를 뒤엎으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하거나 재림예수라고 칭하기도 했고, 세속 정치에서 등장한 독재자들은 구세주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했으며, 온갖 사교邪敎들에서도 교주를 구세주로 옹립하기도 했다. 찬란하던 통일신라가 무너져 가던 시대에 등장한 세달사世達寺 승려 출신의 경주 사람 궁예弓裔(?~918)나 신라 변방의 비장裨將 출신인 견훤甄萱(867~936)도 모두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규합하였는데, 그 시절에는 지방에 선종이 확산되어 가던 때임에도 민중들에게는 미륵의 목소리가 더 컸던 것 같다. 

 

하기야 『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Milinda왕문경, Milinda-paṅha)」에 나오는 서북인도에 있었던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Bactria(BC 246~BC 138)의 왕 메난드로스Menadros(BC 160~BC 140 추정) 1세, 즉 알렉산더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36~BC 323)의 동방원정 때 그 휘하에서 활약한 장군의 후예인 그리스인 밀린다왕도 자신을 구세주라고 했으니, 미륵신앙을 믿은 것인지 고대 여러 종교에서 받아들여지던 구세주사상을 받아들인 것인지는 연구해 볼 일이다.

 

발굴조사로 밝혀진 사실들

 

1984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운주사에 대한 발굴조사에 따라, 운주사의 원래 금당 터가 드러났고, 1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무리굽 청자조각과 순청자 접시조각, 금동여래입상 등이 출토되어 운주사 창건 시기가 고려 초기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 중기의 상감청자 파편들과 14~15세기의 청자 파편들이 다량 출토되면서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운주사가 번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7. 운주사 마애불. 

 

‘운주사雲住寺 환은천조丸恩天造, 홍치 8년弘治八年’이라고 적힌 암막새 기와가 출토되어 절 이름이 運舟寺가 아니라 雲住寺라는 것도 밝혀졌다. 따라서 이곳이 배 모양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날조된 잡설임이 드러났다. 유물에 의하여 조선시대 연산군 1년(1495)에 중창된 적이 있음도 밝혀졌다. 1632년에 간행된 『능주목지綾州牧誌』에는 “운주사는 오늘날 폐사가 되었다(雲住寺今廢).”라는 기록으로 보아 중창된 절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1800년대 초에 와서 설담자우雪潭自優(1769~1831) 화상이 관아의 허락을 받아 인근의 승려들을 모아 파묻힌 석불과 기울어진 석탑들을 바로 세우고 약사전을 중건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의 대웅전 뒤로 돌아가면 높은 암벽에는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얼굴 모습이 비교적 제대로 새겨져 있고 불꽃무늬 광배도 있어 불상으로서의 격식도 갖추고 있는데, 옛날에는 골짜기를 따라 들어오면 높은 바위 절벽에 새겨진 이 마애불을 마주했으리라(사진 7). 이곳을 지나 산길로 더 위로 올라가면 봉발형다층석탑도 있고, 원형 옥개석을 쌓은 원형이형 석탑도 있다(사진 8). 

 

사진 8. 봉발형 다층석탑. 

 

천불천탑이라고 불릴 정도이었으면 골짜기 깊이 들어와 마주친 큰 바위 절벽에 마애불을 새기고 그 주변으로 석불과 석탑을 많이 만들어 세웠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생각을 해보며 산등성이 위로 올라가면 아래로 운주사의 전체 모습이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떡 하니 앉아 있다. 사람이 앉았던 것 같은 파인 부분도 있다. 사람들은 천불천탑을 세울 때 감독한 사람이 앉았던 자리라고 하기도 하고, 스님들이 앉아 수행한 자리라고 하기도 하지만 역시 말을 가져다 붙인 것이리라.

 

더운 여름철 저녁 무렵에 여기에 앉아 보면 시야가 일망무제로 탁 트여 눈이 시원하고, 진짜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와 어두워져도 내려가는 것을 잊게 된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 석탑과 석불이 이렇게 밀집되어 조성된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모양이나 배치도 각양각색이다. 무슨 일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부처님의 진리를 터득하려고? 아니면 구세주인 미륵이 지상에 내려와 구원해 주기를 발원하여? 아니면 각자 성불한 자기 얼굴을 새겨 진짜 성불成佛하기를 기원해서?…(사진 9). 

 

사진 9. 바위 위에서 보이는 운주사 풍광. 

 

그런데 미륵불의 하생과 구원, 도솔천에의 왕생 등과 같은 미륵신앙이 불교의 진리일까? 미륵신앙의 사고는 인도에서 출현하여 중국, 티베트, 한국, 일본 등에 널리 퍼져 유행하기도 했다. 메시아주의의 사고틀을 가지는 한 이런 신앙은 종교는 달라도 다양한 모습으로 있었을 수 있다. 화를 피하고 복을 구하는 ‘믿음’의 도그마 체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메시아주의의 프레임이 있어야 종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힘든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구세주가 나타나 살아 있는 동안 우리를 구하고 더 나아가 천상의 이상세계에 태어나게 해주는 은총을 받을 수 있어야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또 희망을 믿고 따르리라. 그래서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길인 실크로드의 중요한 석굴에는 대부분 석가모니불과 미륵불을 중심불로 모셨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법화신앙이 불교가 중국화되기 전의 참모습이었는가?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한 생각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불교일까 하는 의문이다. 모든 욕망을 끊고 출가한 수행자가 미륵의 하생과 상생을 설파하려고 출가했다는 말인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바라나시Varanasi 인근의 사르나트Sarnath 동산 녹야원鹿野苑 초전법륜初轉法輪의 자리에서 설한 것은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이고, 팔정도의 수행을 통하면 고에서 벗어나 니르바나(nirvana, 열반涅槃)의 세계에 다다르게 된다는 간단한 명료한 가르침인데….

온갖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데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내 머리를 내리쳤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또 여기에 왔는가!’ 꼬리를 약간 보이던 소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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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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