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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불교의 유학화와 독창적 불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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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2 년 10 월 [통권 제114호]  /     /  작성일22-10-05 09:35  /   조회34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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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22 | 양수명梁漱溟 1893-1988 ①

 

양수명梁漱溟(1893〜1988)은 중국 근대 사상가로 웅십력과 함께 현대신유학 제1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며, 다른 현대신유가들이 그렇듯이 불교에 심취하였다가 유학으로 전환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사상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사상적 이력에서 나타나듯이 불교와 유학의 차이에 대해 섬세한 변별력을 가졌다. 

 

최후의 유학자이자 숨은 불교도

 

특히 그의 문화 철학은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주로 다루었고, 중국 문화이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5·4 신문화운동 기간 동안에는 문화보수주의자로 알려졌고, ‘최후의 유학자(the last Confucian)’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양수명은 웅십력과 마찬가지로 불교와의 깊은 연관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나갔다는 점에서 유학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 더욱이 양수명은 평생 자신이 불교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기에 그러하다. 예컨대 양수명 연구자인 프랑스 학자 티에리 메이노는 양수명을 ‘숨은 불교도(the hidden Buddhist)’라고 불렀는데,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사진 1. 노년의 양수명.

 

양수명의 불교 사상은 그가 유학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여전히 작동하였다. 『구원결의론究元決疑論』, 『인도철학개론』, 『유식술의』 같은 저작뿐 아니라 유학 전환 이후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동서문화와 그 철학東西文化及其哲學』에서도 주요한 이론 도구는 불교였다.

양수명은 호적이나 풍우란처럼 서양에서 학문 방법론을 습득한 것이 아니라 전통철학을 학문 대상으로 하고 거기에서 학문 방법론을 터득하였다. 근대 시기 도입된 서구의 학문과 불교학, 인도학을 독창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철학을 제시하였다.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그는 대승불교의 형이상학과 서양의 과학 지식, 그리고 베르그송 등의 서양철학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불교 철학 내지 현대신유학을 전개하였다.

 

양수명의 생애 4단계

 

이같은 양수명의 생애는 크게 4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 1917년 북경대 교수직을 맡기 이전까지의 시기로 이 때 양수명은 자신의 인생관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였고, 불교를 숭상하였다. 둘째, 1917년에서 1924년까지 북경대 교수직을 맡고 있었던 기간으로, 이 기간에 그는 불교와 유학, 그리고 동서문화를 비교 연구하였다. 자신의 대표작인 『동서문화와 그 철학』도 이 시기에 발표된 것이다. 셋째, 1925년에서 1940년까지로 학교 운영, 향촌 건설을 연구하고 민맹에 참가하는 등 사회적인 실천을 하였던 시기였다. 넷째, 건국 후에는 정치협상위원이 되었고 사상적으로 비판도 받았다.

 

사진 2. 젊은 시절의 양수명. 

 

양수명은 몽고족으로 광서성 계림桂林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환정煥鼎, 자는 수명漱溟과 초오肖吾이다. 그의 부친 양제는 청조 내각에서 천자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담당관인 시독을 지낸 적이 있는데, 그 자신은 신전통주의 진영의 중심 인물이었지만 흥미롭게도 자신의 아들인 양수명을 전통철학인 ‘사서오경’이 아닌 『지구운언地球韻言』으로 교육시켰다고 한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 아들 양수명에게 신교육을 시켰던 것일까? 이후 양수명은 7살 때 북경으로 보내져서 최초의 서양식 소학교에 들어갔다. 뒤에 북경 순천중학으로 전입하였는데, 그곳에는 장신부, 탕용동 등이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 그는 인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서양에는 공리주의, 최대 다수의 행복주의, 실용주의, 도구주의 등의 사상이 있었다. 그 학설을 자세히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사상으로 치면 내 생각은 우연히 서양의 공리파 사상과 맞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시기 그는 양계초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불교에 대한 이중적 입장

 

양수명은 1913년 스무 살 때 처음으로 불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독실하여 채식만 하였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뒤에 유학으로 사상적 전환을 이루고 난 뒤인 29살 때 결혼하였지만, 평생 채식만 하였고 불교에 대한 관심도 평생 지속하였다.

 

 

 

이 시기 불교를 연구한 중 가장 중요한 성과는 1916년 발표한 『구원결의론』이다. 이 글은 『동방잡지』에 연재되었고 이로 인하여 채원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글은 과거와 현재, 동과 서의 각 학파와 학설에 대한 비평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유독 불교를 숭상하였다. 그 스스로 “나는 20세 이후로 불교사상에 빠져서 누구도 말리지 못할 정도였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양수명은 이후 불교에서 유학으로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 스스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나는 이전에 모두가 불교 생활을 하는 데는 반대하였지만, 나 스스로는 불교 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불교 생활을 반대한 까닭은 동서문화 문제를 연구하면서 중국인을 위해 응당 내려야 될 결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불교 생활이 적합하며 이것만이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진 5. 양수명의 『人心과 人生』. 

 

그는 이러한 자세를 말년에 이르기까지 지속하는데, “불교 정신을 지니고 불교 생활을 수행하는 것이 내 마음의 소망이다. 나는 줄곧 불교 생활을 지켜왔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말년의 저작인 『인심과 인생』에서는 “종교의 진수는 오직 고대 인도에서 성숙했던 불교에서 볼 수 있다. 그 도는 장차 공산주의 사회 말기에 크게 성행할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젊은 시절 “불교의 태도는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내가 내심으로는 불교에 기울어져 있었지만 사회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풍조가 유행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였던 태도와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5·4 신문화운동 시기의 문화 보수주의

 

1917년에 양수명은 채원배의 초청에 응하여 북경대학 교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이는 7년간 지속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의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처음 대학에 도착했을 때 채선생에게 그들이 공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채선생은 우울한 목소리로 ‘우리는 공자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반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석가와 공자를 선양하는 일 이외에는 어떤 다른 일도 하지 않겠다! 나의 이같은 행위는 깊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고 말하였다.”  

 

사진 6. 북경대 교수 시절(1918년)의 양수명(앞줄 오른쪽 두 번째). 

 

양수명은 이 시기에 불교와 유학 등 동양 전통철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북경대학에서 처음에 인도철학을 강의하였고, 다음해에는 『인도철학개론』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계속 유학을 강의하였고, 특히 동서문화와 그 철학을 비교 연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북경대학에 간 지 2년 뒤 양수명은 북경대학보에 동양철학을 연구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게재하였지만, 거의 모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당시는 중국 전통철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시대의 유행으로 받아들여졌다. 5·4 신문화운동 시기였던 것이다. 

 

사진 7. 1949년 중경에서 해방군을 맞이하는 양수명(가운데). 

 

그 후 철학연구소에서 제1회 공자철학연구회를 열었고 양수명은 모임에서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1920년 그는 북경대학에서 동서문화와 그 철학을 강의하였고, 그 중 일부를 『소년중국』이라는 잡지에 실어 출간하였다. 1921년 산동성 교육청의 초청으로 제남 지방으로 가서 동서문화와 그 철학을 40일 동안 강의하였고, 이 강의원고를 산동성 및 북경, 상해 등지에서 출판하였다. 이것이 그의 대표작이자 중국 근현대철학의 명저인 『동서문화와 그 철학』이다. 

 

사진 8. 『동서문화와 그 철학』 표지. 

 

이 책은 1922년까지 4차례에 걸쳐 출판되었고, 그는 이 책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국가적인 명사가 되었고 외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하바드대학의 엘리토 교수는 “1921년에 양수명의 이론이 이와 같은 매력을 가졌던 것은 대도시 학술권 외에는 신문화운동의 영향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양수명은 당시 불교에서 유학으로 전환하였고 유학 중에서도 주자학이 아니라 육왕산, 양명학에 기울어져 ‘신육왕파’의 대표자로 일컬어졌는데, 이 『동서문화와 그 철학』은 그의 신육왕철학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당시 미친 영향은 신유학 때문이 아니라 문화철학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촌락 자치 실현을 위한 사회적 실천

 

1924년 양수명은 북경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학교 설립과 향촌사회 건설에 대한 연구와 실천을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광동지역에서 향촌 강습소를 개설하였고, 양중화 등이 주도하여 창설한 하남 지역의 촌치학원에서 교무주임을 맡으면서 『촌치월간』을 편집하는 책임을 맡았다. 

 

사진 9. 모택동과 환담하는 양수명(1938년). 

 

1931년 초 그는 산동으로 가서 산동향촌건설연구원을 창설하고 정식으로 향촌 건설에 대한 실험에 착수하였고, 거의 14개 현까지 확대하였다. 이 시기 양수명은 『중국민족자구운동의 최후 각오』, 『향촌건설이론』, 『향촌건설대의』 등의 저작을 발표하였다. 그는 중국의 역사 및 문화적 특수성 때문에 오직 향촌 건설만이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라고 주장하였다.

 

사진 10. 향촌운동을 함께 하던 동인들과 함께(1935년, 앞쪽 오른쪽 첫 번째). 

 

그는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서양 근대문명에 대해 비판하였고, 촌락 자치를 실현하는 것만이 자기 방식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의 새로운 사회 조직은 반드시 중국의 윤리와 도덕 정신에 기초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1980년대 중기 양수명은 90여 세의 고령임에도 다시 강단에 서서 중국 문화를 강연하고 『인심과 인생人心與人生』, 『동방학술개관』 등의 저작을 출판하였다. 그는 사회주의 정부로부터 자신의 과거 사상을 비판받고 이에 대한 검토를 요구받았다. 향촌 건설을 위한 말년의 노력은 그의 불교사상의 사회적 실천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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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석·박사 졸업.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초빙교수를 지냈다. 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조계종 불학연구소 전문연구원 역임. 『웅십력 철학사상 연구』, 『신유식론』,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등 다수의 저서 및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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