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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1969년 봉암사 제2결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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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2 년 7 월 [통권 제111호]  /     /  작성일22-07-05 11:14  /   조회2,68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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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암당 고우스님의 수행 이야기⑨ 

 

고우스님, 법진스님, 법화스님, 법연스님, 무비스님, 영명스님, 정광스님 등 30대 전후의 10여 수좌들이 문경 운달산 김용사 상선원에 모였다. 이 분들은 유구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전통을 잇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1947년의 결사結社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희양산 봉암사로 들어가 살기로 뜻을 모았다. 

 

김용사에서 봉암사 정화 준비와 주지 문제

 

그러나 수좌 대중이 봉암사로 들어가려면 관할 교구본사 주지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당시 봉암사는 관할 교구본사가 김천 황악산 직지사였다. 직지사는 일제강점기 사찰령 아래에서는 해인사 말사였다. 그러다 광복 후 조계종단에서 비구 수좌들이 승단 정화운동을 할 때 경북 북서부를 관할하던 문경 김용사가 대처승 인물이 많이 나고 세력이 워낙 강하여 바로 정화할 수 없었다. 이에 비구승들이 많았던 직지사를 본사로 하고 김용사를 말사로 편입해 버렸다. 그렇게 하여 문경 봉암사도 자연 직지사의 말사로 편제되었던 것이다. 

 

사진 1. 봉암사의 교구본사인 황악산 직지사 전경. 

 

봉암사의 교구본사 직지사는 1958년에 녹원(1928~2017) 스님이 주지를 맡아 1969년 봉암사 제2결사 당시에도 주지를 맡고 있었다.(녹원스님은 4년 임기의 교구본사 직지사 주지를 7차례 역임하였다). 녹원스님은 당시 봉암사 주지에 진홍스님을 임명하였는데, 진홍스님은 김천 관음사 주지를 겸하고 있어 주로 관음사에 있었다. 비록 주지가 봉암사가 아닌 김천 관음사에 있었지만, 봉암사의 도량 수호와 문화재, 재산 관리는 주지 책임이었다. 

 

직지사 주지 녹원스님과 담판

 

1969년 가을 김용사 수좌들은 봉암사 일로 김천 직지사로 가서 주지 녹원스님을 만났다. 녹원스님은 직지사 조실을 지낸 탄옹스님의 상좌로 교학과 선, 그리고 율행을 겸하면서 주지 소임까지 잘 하는 보기 드문 수행자였다. 본사가 직지사였던 고우스님보다 세납이 아홉 살이나 더 많은 선배였다. 고우스님을 비롯하여 법화, 천장, 법진 등 여러 젊은 수좌들이 찾아가니 녹원스님은 놀라면서도 당당하게 맞이하였다. 

 

사진 2. 봉암사를 수좌 도량으로 배려해 준 직지사 녹원스님. 

 

수좌들은 녹원스님에게 봉암사는 구산선문의 선찰 전통을 잇고 있고, 1947년 결사 정신을 되살려 참선 도량으로 하면 좋겠으니 수좌들이 맡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녹원스님은 수좌들이 바랑지고 운수납자로 제방 선원을 다니며 정진하는데 어떻게 도량을 맡아 운영할 수 있겠느냐며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렇게 하여 첫 만남에서 수좌들의 뜻은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김용사로 돌아온 수좌들은 다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직지사 녹원스님의 마음을 돌려 믿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희양산 산림의 남벌 문제 

 

그런데 봉암사 백운암에서 정진하던 법진스님과 봉암사를 자주 출입하던 법화스님이 가은읍의 신심 있는 불자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내용인즉슨 지금 봉암사에는 주지가 절에 없는데 큰 산판이 벌어져 절 형편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주지가 산판 업자들과 큰 계약을 맺어 봉암사 입구에서 오봉정(봉암사 법당에서 계곡을 따라 10여 리 더 들어가면 있는 큰 화전민 마을)까지 500정보나 되는 막대한 산림을 베어내고 새로 유실수를 심는 대대적인 수종 개량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말이 수종개량이지 희양산 일대의 850만 평이나 되는 토지에 울창한 소나무를 베어내어 팔고는 낙엽송이나 잣나무 같은 유실수를 심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문경시청 공무원들도 관련이 되어 있었다. 당시 정부는 전쟁 이후 황폐화된 산에 식목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는데 백두대간의 중심에 위치한 희양산 일대의 울창한 소나무를 

베어내고 생산성 있는 나무를 심는 사업이었다. 소나무는 지금이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로 시내 가로수로 심을 정도로 각광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쓸모가 없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망국지목亡國之木’으로까지 홀대 받았다. 

 

사진 3. 희양산 봉암사의 울창한 산림. 

 

하지만 그것은 구실이고 실제로는 그렇게 베어낸 봉암사 소나무들은 가까운 가은 은성탄광을 비롯한 탄광의 굉목으로 팔려 나갔다. 봉암사가 있는 문경은 남한 최초로 석탄 탄광이 개발된 곳으로 당시에는 60여 개의 탄광이 있었으니 굉목 등 목재 수요는 상당하였다. 그러니 봉암사 소나무들은 적지 않은 돈이 되었고, 또 오봉정 일대 화전민들은 봉암사 참나무들을 베어 숯을 구워 팔았기 때문에 그것도 돈이 되었다.

이렇게 천년고찰 봉암사 산림이 무참히 베어져 나가는 상황에도 주지는 절에 없었으니 가은 신도들의 원성이 쌓여만 갔고, 김용사 수좌들도 이 문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수좌들의 원력과 녹원스님의 결단

 

봉암사를 참선 도량으로 만들자는 결의를 한 수좌들은 다시 직지사 주지스님을 만나러 갈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명분은 충분했다. 구산선문의 전통을 잇고 정화결사 정신을 되살려 참선 도량으로 하자는 것과 삼보 정재인 봉암사 산림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이 뜻을 실현하기 위해 절대 물러서지 말고 한 사람도 이탈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수좌들은 이 원력을 성취하기 위해서 뜻을 같이 하는 수좌들을 더 모아야 했다. 그래서 지금 전국선원수좌회의 모태가 되는 선림회禪林會의 총무를 맡고 있던 능혜스님을 오시게 하여 취지를 설명하니 흔쾌히 동참하였다.

 

봉암사의 수좌도량 복원문제는 선림회 총무 능혜스님의 참여로 차원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고우, 법진, 법화, 법연 등 20~30대 젊은 수좌들의 뜻이었지만 선림회는 제방 수좌들의 권익을 대표하는 단체였다. 1967년 동화사 선원에서 창립된 선림회는 종단의 정화와 개혁 그리고 선풍 진작을 위한 수좌단체였으니 해인총림 지정과 송광사의 정화 등에도 역할을 하여 당시로선 위상이 상당하였다.

 

젊은 수좌들의 기백과 선림회의 가세로 큰 힘을 얻은 봉암사 정화 결사 수좌들은 다시 직지사로 주지스님을 만나러 갔다. 녹원스님은 선림회 능혜스님까지 나타나자 전과 달리 긴장하면서도 꼿꼿하였다. 고우스님을 비롯한 수좌들은 이전의 주장에 이어서 지금 봉암사 산판 문제를 거론했다. 천년고찰이자 구산선문의 유구한 선찰 봉암사에 주지가 부재하고, 산판으로 아름드리 재목이 잘려나가는 등 날로 피폐해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수좌들에게 봉암사를 맡겨 삼보정재를 지키고 선찰로 거듭나게 해달라고 정중히 다시 요청하였다. 

 

사진 4. 선풍 진작을 위해 애쓴 선림회 능혜스님.

 

수좌들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본사 주지 녹원스님이 고심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이내 녹원스님이 뭔가를 결심한 듯 차분하게 말하였다. 젊은 수좌들의 뜻이 좋으니 당신도 수용하겠다면서 다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지금 봉암사 산판은 정부가 추진하는 산림 수종개량 10개년 계획의 1차 5년 계약인데, 이 5년 계약은 그대로 유지하는 조건으로 수좌들이 추천하는 주지를 임명하겠다는 것이었다. 수좌들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하여 봉암사는 젊은 수좌들의 원력과 직지사 주지 녹원스님의 결단으로 마침내 참선 도량으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1969년 가을 봉암사에 들어가다

 

김용사에 모여 봉암사에 대한 정화결사의 원력을 세웠던 10여 수좌들은 드디어 1969년 가을 추석을 지나 봉암사에 들어갔다. 당시 봉암사에는 한 곳에 모여 좌선할 수 있는 선방도 없었다. 전쟁 직후인 1956년에 봉암사 결사 참여자 중 막내격인 도우스님(도선사 청담스님 상좌)이 주지를 맡아 산판山坂을 해서 60평짜리 큰방을 크게 지었는데, 다 지어갈 무렵 목수의 실수로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그 뒤 만성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큰법당을 짓다가 중단되어 봉암사는 대중이 한 곳에 모여 정진할 만한 공간도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10여 수좌들은 여러 전각에 흩어져 각자 정진할 수밖에 없었다.

 

양식도 문제였다. 그때 봉암사에 함께 들어간 무비스님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대중이 많았으나 봉암사 살림은 어려웠다. 절 땅에서 나오는 옥수수, 조, 콩 몇 말이 다였다. 그래서 양식이 떨어질 때면 돌아가면서 탁발을 나갔다. 또 어딜 갔다가 차비를 얻으면 그것을 혼자 쓰지 않고 공양비로 내놓았다. 어느 날 자전거에 옥수수 한 포대를 싣고 가은 장날 나가서 뻥튀기를 해서 싣고 오는데 어찌나 뿌듯하던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사진 5. 봉암사 제2결사의 고우스님과 함께 한 필자.

 

당시 봉암사 제2결사 도반들은 참선 수도라는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는 뜻이 같으니 자연 공부하려는 열정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20~30대의 젊음이 용기를 북돋웠고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사상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사사로운 문중門中을 떠나 부처님 가르침대로 원융圓融 살림을 하며 정진하고 살자!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

하늘을 찌르는 듯 솟아오른 희양산의 기세처럼 출가 수행자들에게 이 말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말이 어디에 있으랴! 33세의 고우스님을 비롯한 수좌들은 이런 정신으로 희양산 봉암사에서 자리 잡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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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20여 년간 종무원 생활을 하다가 고우 스님을 만나 성철스님 『백일법문』을 통독하고 불교의 핵심인 중도에 눈을 뜬 뒤 화두를 체험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불교인재원에서 생활참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유튜브 생활참선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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