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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불성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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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2 년 6 월 [통권 제110호]  /     /  작성일22-06-07 11:31  /   조회3,25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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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영험한 기도도량에서 관음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기도를 드리고 있는 옆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 기도객은 뜻밖에도 관세음보살이었다. 그 사람이 물었다. “관세음보살님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어째서 자신에게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나는 이제껏 스스로에게 기도하여 관세음이 되었습니다. 밖의 관세음은 내 안의 관세음의 그림자입니다. 내 안의 관세음으로 기도의 방향을 돌릴 때 진짜 기도가 일어납니다.”  

 

일천제에게도 불성이 있다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참선도 마찬가지다. 바른 참선은 내 안의 부처를 믿고 내 안의 부처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 내 안의 부처를 불성이라고 한다. 또 한결같은 진실[眞如], 만법의 본성[法性], 만법의 몸[法身], 부처의 마음[佛心], 부처의 땅[佛地]이라고도 부른다.

 

불성은 모든 존재의 본성이다. 극악한 죄인이나 위대한 부처님이나 모두 이것을 갖추고 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동물은 물론 지옥의 존재들까지 모두 평등하게 불성을 갖추고 있다. 불성은 왕후장상이라 해서 더 고귀해지지도 않고 갑남을녀라 해서 더 비천해지지도 않는다. 부처가 된다고 해서 늘어나지도 않고 어두운 무명 속에 침몰해 있다고 해서 줄어들지도 않는다. 대승불교는 이로 인해 위대해졌고 선불교는 이로 인해 영감으로 충만한 깨달음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말한다.

 

“요즈음 하나님 믿는 분들이 많은데, 대부분 그분은 죄 많고 가련한 우리 중생들과는 달리 모든 것을 초월해 저 멀리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가치를 바로 죄인인 우리가 전혀 부족함 없이 완전히 구비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개개인 속에 다 하나님이 있어서 하나님 아닌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불교의 주장이다. 이는 다른 종교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불교의 우수성이다.”

 

각자가 갖춘 불성을 하나님에 비유하고 있다. 개개인에게 하나님이 내재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라는 파격의 설법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불교다. 중국 불교사에 불성론의 전파 및 확립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전한다. 불성론은 대승의 『대열반경』에서 완성된다. 그런데 이 경전에는 일천제一闡提의 불성 유무를 두고 흥미로운 맥락적 단층이 존재한다.

 

사진 1. 축도생의 불성 설법에 고개를 끄덕인 점두석點頭石. 

 

원래 일천제는 대승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죄를 저질러 성불의 씨앗을 끊어버린 존재이다. 그래서 『대열반경』의 전반부에서는 일천제에게 불성이 없어서 성불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그 후반부에 이르면 문맥이 일변한다. 일천제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층은 아마 전반부와 후반부의 성립 시기가 달랐거나, 그 논의를 더 극적인 것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중국에 『대열반경』이 들어올 때 그 전반부가 먼저 전파된다. 당연히 경전의 전파 초기에는 일천제에게 불성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당시 축도생竺道生이라는 스님이 일천제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돌출의견을 내놓는다. 일천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한 것은 대승을 비방하고 부정하는 사람을 꾸짖기 위한 것이지 실제로 불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불교계에서 그를 이단으로 판정하고 배척했음은 물론이다. 축도생은 이에 불복하여 한 야산에서 돌들을 모아 놓고 일천제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설법을 한다. 그 때 설법을 듣고 있던 돌들이 “일천제도 똑같이 불성을 갖추었다.”는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지금도 소주蘇州 호구虎丘의 백련지白蓮池에는 도생의 설법에 고개를 끄덕인 돌이 남아 있다. 

 

믿음은 불성을 발현하는 힘 

 

이러한 극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불성론은 이후 선종에 적극 수용되어 가장 중요한 축을 형성하게 된다. 당장 선종의 표어인 견성見性이라는 말 자체가 불성[性]을 본다[見]는 뜻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선종은 불성을 천착하는 교파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내 안의 불성을 바로 볼 수 있는가? 좌선을 하면 되는가? 면벽을 하면 되는가? 좌선에도 여러 길이 있다. 만약 고요히 앉기만을 능사로 삼는다면 그것은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고자 하는 일과 같다. 벽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참선을 한다고 해도 바른 출발과 바른 노정이 중요하다. 성철스님은 그것이 불성에 대한 바른 믿음과 바른 실천에 있다고 보았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을 바로 믿고 바로 보고 철저하게 깨달으면 그가 곧 부처님이다.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결코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없다. 바로 믿고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

 

성철스님이 설한 바와 같이 견성은 자신이 곧 부처라는 것을 바로 믿는 것에서 출발한다. 바로 믿는다는 것은 바르게[正] 믿는다는 뜻인 동시에 그 즉시[卽]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그대가 바로 부처’라는 말을 듣고 바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불자佛子라고 자칭한다. 불자는 부처의 ‘씨앗[子]’이라는 뜻이고 부처의 아들[子]이라는 뜻이다. 부처의 씨앗이 부처라는 열매를 맺는 것은 필연이다. 왕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처럼 부처의 아들은 부처가 된다. 더구나 우리들 아기 부처는 이미 있는 이대로 부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작 불자인 우리는 이 말을 바로 믿지 않는다. 스스로를 열등한 중생으로 규정하고 나의 밖에 저 위대한 부처를 설정한다. 위음왕불의 시대, 더할 수 없이 좋은 자질을 가졌던 사람들조차도 “당신은 보살도를 실천하여 부처가 될 것입니다.”라는 상불경常不輕 보살의 예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보살의 예언을 듣고 그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졌다. 보살은 이를 피해 달아나면서도 “나의 눈에 당신은 가벼운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부처가 될 것입니다.”라는 찬탄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존재를 부처의 아들로 보아 찬탄을 거듭한 것이다. 이 공덕으로 상불경보살은 후세에 석가모니불이 된다. 모든 존재가 품고 있는 불성에 대한 믿음이 보살을 성불로 이끈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불성론의 실천을 이끄는 에너지가 된다. 참으로 ‘믿음이야말로 진리의 근원이고 성불의 어머니[信爲道源功德母]’인 것이다. 다만 불성에 대한 믿음은 타 종교에서 요구하는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과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바르게 보는 안목을 전제로 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이 ‘바로 믿기’와 ‘바로 보기’를 함께 제시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불성론은 선종의 입장에서 보면 영감의 원천이다. 자신이 부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기만 하면 되는 일이므로 돈오돈수다. 부처의 씨앗을 잘 가꾸는 인연만 지으면 되는 것이므로 낙관으로 일관한다. 아기 부처로서 부처를 실천하는 일이므로 확신으로 충만하다.

 

이처럼 불성론은 성불에 대한 낙관과 확신의 근거가 된다. 『선문정로』에서 이것을 그 첫 번째 법문인 견성즉불론의 바로 뒤에 배치한 이유이기도 하다. 성철스님은 첫 번째 견성즉불의 법문에서 어떠한 경계 체험이라 해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지나치게 엄숙한 감이 없지 않다. 자칫하면 이로 인해 수행에 대한 용기가 꺾일 수도 있다. 이에 강력한 부정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 뒤를 이은 중생불성론의 설법에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추고 있으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불성을 “바로 믿고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으로서의 부처와 결과로서의 부처

 

다만 우리는 성철스님이 불성을 강조하면서도 ‘열심히’라는 말을 삽입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방임으로 빠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성철스님의 법문에서는 이미 부처이므로 그것에 맡겨두고 자유롭게 살아가면 된다는 식의 주장은 일절 배제된다. 바른 믿음은 오직 ‘열심히’ 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성철선에 있어서 불성에 대한 믿음은 ‘열심히’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성철스님이 불성을 설하면서도 가능성으로서의 부처보다는 결과로서의 부처를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씨앗이 심겨 있음을 아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그 씨앗이 잘 성숙하도록 열심히 잡초를 매고 물을 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종국에 결실을 거두게 된다. ‘열심히’ 하는 수행이 있어야 실질적 깨달음이 있게 된다는 실참실오의 주장인 것이다. 

 

사진 2. 불성의 경전 40권본 『대반열반경』. 

 

불이不二의 이치로 볼 때 원인과 결과가 둘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인은 원인이고 결과는 결과다. 모든 존재가 부처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원리는 최고 중의 최고이지만 그것을 말로만 해서는 그림의 떡에 불과해서 배를 부르게 하지 못한다. 더구나 가능성으로서의 부처를 자꾸 말하다 보면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한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아가 설법을 들은 미혹한 청법자들이 미친 마음을 낼 수도 있다. 자칫하면 최고의 설법인 불성론이 모두를 해치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이미 갖춘 불성을 드러내는 일이므로 이 ‘열심히’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완전히 준비된 씨앗의 싹을 틔우고 성장시키는 일이다. 이 여정에서 불성은 주인공[正因]이고 수행은 도우미[緣因]다. 좋은 농사꾼은 씨앗이 스스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적절한 도움을 준다. 씨앗이 필요로 하는 딱 그만큼 물을 주고 딱 그만큼 김을 맨다. 미리 싹을 뽑아 올리는 식의 조장助長이 없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하는 것이 미덕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얼음을 문대어 불을 피우겠다는 우격다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불성의 원리를 알아 그것을 잊지 않고 그것에 맡기는[隨順]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수행에서 말하는 ‘열심히’는 불성을 잘 따르고 잘 맡기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잘 맡기고 잘 따르는 실질적 수행이 있을 때 불성이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씨앗이 열매를 통해 그 가치가 완성되듯 원인으로서의 불성은 부처라는 결과로 그 의미가 완성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철스님은 불성이 성숙하여 부처로 나타나는 지점을 거듭 보여준다. 그리하여 ‘불성=12인연=제1의공=중도=부처=열반…’의 등식을 완성한다. 불성이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을 표현하는 모든 단어들과 동의어의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하나의 진리가 모든 경우에 관철될 때 비로소 그것을 진리라 할 수 있다는 성철스님의 ‘철徹’적 안목이 확인되는 지점이다. 이것은 『백일법문』에서 불교의 모든 교리를 중도로 꿰어 하나의 도리로 설명했던 일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중생불성론은 한국불교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필요한 설법이다. 한국불교의 주류는 기복불교였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부처와 보살은 복을 내려주는 존재로 신앙되고 수행자는 그 초월성으로 주목받는다. 기도 성취로 소문이 나야 절에 사람이 몰리고 점술과 예언이 신통해야 도인으로 인정받는다. 대승불교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상황이다. 성철스님의 중생불성론은 이러한 병폐에 대한 처방전이 되기에 충분하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을 믿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불교의 전부라는 것! 이것은 대승불교를 대중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원칙의 확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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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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