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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마르크스주의자의 종교적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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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2 년 6 월 [통권 제110호]  /     /  작성일22-06-07 09:18  /   조회2,43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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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호 |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17 | 핫토리 시소 服部之総 1901~1956

 

마르크스주의자, 엄마뉴시대설

 

핫토리 시소服部之総(1901~1956, 이하 핫토리)는 1901년 시마네현島根県에 위치한 쇼렌지正蓮寺에서 태어났다. 1925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마르크스주의 강좌』, 『일본 자

본주의 발달사 강좌』 등을 집필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라는 일본 내의 새로운 학문을 개척했다. 핫토리 시소에 대한 기억은 마르크스주의자, 일명 엄마뉴시대설嚴マニュ時代說로 유명하며, 불교학자로서의 인상은 강하지 않다. 여기에는 핫토리가 불교학자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엄마뉴시대설에 대한 세간의 기억이 더욱 선명하다는 의미이다.

 

엄마뉴시대설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매뉴팩쳐manufacture 시대’를 줄인 말이다. 매뉴팩쳐는 산업혁명 직전 단계로 기계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근로자가 분업을 통해 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단순 협업과 공업화의 중간에 있는 작업 형태이다. 핫토리는 에도막부 말기의 일본이 엄밀한 의미에서 매뉴팩쳐 시대라고 규정했다. 

 

사진 1. 핫토리 시소服部之総. 

 

핫토리의 주장에 따르면, 19세기의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이 서구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지만, 일본만은 메이지유신으로 민족적 독립을 달성할 수 있었다. 에도막부 말기, 개항 전의 일본 경제의 발달 단계는 인도나 중국보다 앞서 있으며, 일본의 산업자본주의는 메이지유신 전에 이미 산업혁명 전 단계까지 자생적으로 성장했다는 설이다. 이 점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매뉴팩쳐 시대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일본이 민족적 독립을 가능케 했다는 핫토리의 견해는 일본의 내적 조건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으로 메이지유신 연구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하지만 핫토리의 견해는 실증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고, 1930년경 당시로서도 다소 거친 가설이었다. 핫토리의 가설은 이후 ‘엄밀한 의미에서의 매뉴팩쳐 시대’라는 용어를 통한 단계 규정이 타당한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핫토리의 착안이 기본적으로 타당하다는 동조 등 여러 논의들을 불러왔다. 여하튼 ‘엄마뉴시대설’은 핫토리를 세상에 각인시키는 일대 사건이었다.

 

강좌파 활동과 종교 이해

 

정토진종 혼간지파本願寺派의 집안에서 태어난 핫토리가 가업을 이어 종교가로서의 길을 걷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데에는, 제국대학 문과대 시절 활동한 강좌파講座派의 영향이 크다. 강좌파는 일본 자본주의 논쟁에서 노농파와 맞섰던 마르크스주의자 일파로 이와나미 서점에서 1930년대 초에 출간한 『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강좌』의 집필 세력이 중심이 되었기에 명명되었다. 주축 인물로는 핫토리를 비롯해 노로 에이타로野呂栄太郎, 히라노 요시타로平野義太郎, 야마다 모리타로山田盛太郎 등이 있다. 

 

사진 2. 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강좌(1932). 

 

강좌파는 일본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질은 반봉건적 지주제도라고 파악하고, 특히 절대주의적 천황제와 반봉건적 토지소유제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들의 자본주의론은 일본 사회과학 전체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핫토리는 같은 강좌파 내의 주류인 야마다山田나 히라노平野와는 달리, 일본 내의 발전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천황제 언급에 대한 금기가 풀리자, 위와 아래 양쪽으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과 절대주의 천황제를 근대 천황제로 성질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좌파는 1936년, 「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강좌」 집필을 위해 참여한 연구자들 32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면서 해산되었다. 일명 ‘콤 아카데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근간은 모스크바에 설립된 공산주의 국제연합 코민테른Comintern의 문화지도부인 콤 아카데미를 모방한 조직을 일본에서 만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강좌파와 대립각을 세웠던 노동파도 검거되면서 일본 내에서 ‘일본 자본주의’ 논쟁도 중단되었다.

 

종교에 대한 핫토리의 시각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맥상통한다. 그 역시 종교에 대해 엄격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평가한 것에 대해 절대적 동조는 하지 않았다. 

 

사진 3. 법정대학. 핫토리가 1952년부터 교수로 재직함. 

 

“현존하는 계급관계를 철폐하고, 인류평등의 상태를 실현하려는 이상주의는 모든 종교에 내포되어 있다. 또 비슷한 이상이 마르크스주의에, 그리고 모든 사회주의에도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일성에도 포함되지 않은, 양측이 절대적으로 다른 점을 말하자면, 그것은 도달하는 방법일 것이다.” 『마르크시즘과 종교』 중 일부(1930년) 

 

핫토리는 종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종교가 인류를 해방시킬 당연한 절차로써 미래를 가정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종교와 마르크시즘은 이상을 실현할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가의 문제로 종교가 인류사에 행한 결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전제하에 그는 마르크시즘과 종교를 화합한 ‘공동전선共同戰線’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핫토리 시소-미키 키요시의 종교논쟁

 

핫토리의 종교론은 「유물사관과 현대의 의식」(1928)을 저술한 미키 키요시三木清와의 논쟁으로 주목을 끌었다(1930년). 미키 키요시가 철학적 입장에서 종교의 불멸성과 종교의 본질론을 주장하자, 핫토리는 같은 사회주의 진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키의 견해에 크게 반발했다. 연구자들은 이들의 논쟁을 ‘마르크스주의를 독자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역사성을 주장한 미키’와 ‘자·타칭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였던 핫토리’로 규정했다. 더해서 이들의 논쟁을 언급할 때 대다수가 미키 키요시의 문맥을 예로 들며, 핫토리에 대해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 점은 유물론연구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키 키요시와 핫토리의 논쟁에 대해 말하자면, 핫토리는 원래 사회학 연구자로 철학적 소양이 거의 없다. 나는 역사가로서의 핫토리를 높게 평가하지만, 이 논쟁에서의 핫토리는 전혀 평가할 수 없다. 너무 수준이 낮은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기타무라 미노루北村実, 『일본의 유물론연구 역사와 도쿄유물론 연구회』 중에서

 

다소 격렬했던 핫토리-미키의 논쟁은 의외의 지점에서 결말을 맞이한다. 1930년 5월, 일본공산당에 자금을 주었다는 이유로 미키가 체포되었다. 미키가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로 알려진 가와우치 타다히코川內唯彦가 「마르크스주의자는 종교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미키씨와 핫토리 씨의 논쟁에 대해」를 발표했다.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는 미키를 배제하고, 동시에 핫토리의 전술적 공동전선론을 ‘승려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학계 전체가 이들 두 사람을 배제시키자 핫토리는 미키와의 논쟁뿐 아니라 종교 전반에 대해 침묵을 선택했다. 

 

다시 불교로 회귀

 

핫토리의 침묵은 일본이 1945년 패전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었다. 패전 후, 핫토리는 자신의 시작점인 정토진종에 대한 발언을 하면서 침묵이 끝이 났다. 여기에는 학계로부터 사실상 퇴장 선고를 받은 미키 키요시가 「신란親鸞」(1945)을 발표한 게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핫토리의 복귀가 지극히 사사로운 이유이지만, 그는 자신이 버렸던 집안의 가업, 혹은 자신의 뿌리로 돌아와 그 유명한 「신란 노트」(1950)를 발표했다.  

 

사진 4. 신란 노트(1950). 

 

핫토리는 미키와의 이전 논쟁과는 달리, 미키의 신란론을 높게 평가했다. 여기에는 미키가 신란을 종래의 ‘호국사상가’로서의 시각을 탈피해 ‘인간’으로서의 신란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핫토리는 신란에게 입혀져 있던 신화성을 벗기고, 정토진종 교단과 분리시켜 인간으로서의 신란을 탐구했다. 

 

사진 5. 코묘지光明寺 총문 기둥에 걸린 가마쿠라 대학교 간판. 가마쿠라 대학교는 핫토리 시소가 사이구사 히로토三枝博音와 함께 가마쿠라시의 코묘지 경내에 창건(1946)한 대학교로 4년 반 만에 폐교되었다. 

 

핫토리의 신란론은 동시대의 연구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진종 오타니파大谷派 출신의 아카마츠 토시히데赤松俊秀는, “핫토리씨의 신란에 대한 해석은 적절치 못한 부분이 많다.”며 핫토리의 사료 해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반면, 후타바 켄코二葉憲香는 “아카마츠 씨가 지적한 신란의 종교적 입장을 인정함과 동시에, 핫토리 씨의 통찰 또한 평가받아야 한다. (생략) 핫토리 씨의 신란 연구, 혹은 불교사 연구는 획기적이다.”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핫토리의 신란 연구는 일부 무리한 해석과 마르크스적 결론 도출이라는 한계점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교단에 좌우되지 않는 자유로운 교단개혁론으로서의 신란론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핫토리 시소의 신란론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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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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