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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한국 선의 바른 길을 밝힌 『선문정로』의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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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2 년 3 월 [통권 제107호]  /     /  작성일22-03-04 11:43  /   조회4,04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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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정독 선문정로』를 발행하며 

 

1999년 11월, 부산 옥천사 백졸스님의 부모님께서는 성철스님과의 지중한 인연에 감사하며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부산에 크게 펼쳐 달라”는 당부와 함께 평생 운영해 오신 천초탕千草湯 건물과 토지를 백련불교문화재단에 기증하셨습니다. 【사진 1】 재단은 몇 년의 세월이 지난 2005년 5월에 옛 천초탕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고심정사古心精舍을 창건하였습니다. 그해 8월엔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으로부터 불교대학 설립 인가를 받고 9월에 개학을 하였습니다. 

 

사진 1. 백련불교문화재단에 천초탕 건물과 토지를 희사하신 신도 현광玄光 이용수李龍壽와 대법선大法船 최봉순崔鳳順 부부. 사진 : 불교신문 

 

그런데 고심정사 불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소납의 가슴속엔 “절을 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부산에 좀 더 불교적으로 기여하는 절이 되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나?” 하는 화두가 하나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백련암의 오랜 신도의 아드님인 동의대 불어불문학과 장성욱 교수와 의논을 했습니다.

 

“지중한 인연으로 부산 중앙동 한복판에 성철 종정 예하의 사상을 펼칠 수 있는 포교당을 마련하였습니다. 부산의 불심佛心이 전국 최고이며 여러 대학에 불교관련 교수님이 많이 계신다고 들었는데 이런 부산에 불교학회가 하나도 없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고심정사 창건과 아울러 부산에 불교학회를 설립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으니 교수님이 앞장서 불교학자들을 만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진 2. 고심정사에서 열린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에서 발언하고 계신 원택스님. 

 

그리하여 2006년 6월에 고심정사에서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가 창립총회를 갖고 부산대학교 김용환 교수, 동아대학교 강동균 교수를 공동회장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최초로 불교학회를 설립하는 데 고심정사 주지로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3년이 지나자 학회가 크게 발전하여 본부를 다른 장소로 옮기게 되었고, 2012년부터는 매년 4회 학회지를 발간하는 우수한 학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사진 2】

 

그러던 어느 날 책상 위에 놓인 동아시아불교학회지(2013년, 제15집)를 펼쳐 보다가 「선문정로 문장 인용의 특징에 관한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어느 교수님이 이런 글을 쓰셨나?” 하고 보니, 고심정사 불교대학 초기부터 강의를 해 오신 동의대 중국어학과 강경구 교수님이셨습니다. 어찌나 반갑고 고마운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습니다. 『선문정로』 출간을 전후로 한 시기의 불교학 분위기를 되짚어보면, 대체로 한강 이북에 있는 대학교의 불교학자들은 750년 역사에 젖어 보조국사의 돈오점수 사상에 흠뻑 빠져 있어서 성철 방장 큰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에 대해서는 아예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습니다. 

 

그동안 보조국사의 돈오점수론에 대한 연구 논문은 쌓여 가도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론을 이론적으로 외호外護하는 학자들의 연구 논문은 만나기가 어려웠는데, 성철 종정 예하께서 열반에 드신 지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 강경구 교수의 논문을 만나니 그 기쁨과 반가움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어서 같은 제목의 논문이 일련번호를 더하며 제21집(Ⅱ, 2015년), 제23집(Ⅲ, 2015년), 제25집(Ⅳ, 2016년)에 연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연재가 끊어져 아 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소납이 강경구 교수의 논문들을 접하였을 때, ‘언젠가 한강 이남에서 보조국사의 돈오점수 사상에 물듦이 없는 불교학자가 출현하여 성철 방장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을 연구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라는 뜻을 가슴 한구석에 품었던 사실이 떠올랐고, 또 그것이 동인動因이 되어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의 설립에 성심誠心를 다한 지난 세월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제야 제 오래된 바람이 이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진 3】 

 

사진 3.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5년 추계학술대회.  

 

세월이 흘러 2021년 4월 24일 성철사상연구원 주최로 열린 학술연찬회에서 강경구 교수는 「성철선의 이해와 실천을 위한 시론」이라는 제목으로 기조 발제를 해 주셨습니다. 강 교수는 발표를 마치고 떠나시면서 “스님! 이제 『선문정로』 연구를 다 마쳐 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이 기다리셨지요. 곧 소식을 드리겠습니다.”라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6월 중순쯤 장경각으로 원고를 보냈다는 연락을 주시며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출판해 주시고 아니면 그냥 돌려보내셔도 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며칠이 지나 A4용지 500여 쪽에 이르는 묵직한 원고 책이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지난날 보조국사의 돈오점수를 주장하며 분기탱천하여 성철스님의 돈오돈수 논지를 거세게 몰아붙이던 보조국사 1세대 학자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일반 단행본으로 펴내면 1천여 쪽이 넘을 거라는 말도 무색하게 일주일여 만에 독파하고 나니, 10여 년 동안 『선문정로』를 연구해 오신 강경구 교수의 신심과 노력에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단순한 호기심과 연구만으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작업이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오로지 성철스님 이론을 믿고 따라가 보자는 굳건한 신심과 저자 자신의 실경계 체험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는 대단한 작업이었습니다. 성철스님에 대한 긍정이나 비판 등의 발언은 뒤로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짚어나가는 성실함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습니다. “아! 이제야 큰스님께서 부처님께 밥값하셨다고 자처하신 『선문정로』에 도달할 수 있는 단단한 돌다리가 놓여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난날 성철 종정 예하께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한 시봉侍奉이 아쉽고 아쉬웠습니다. 성철스님의 상좌로서 50여 년을 살아온 덕에 조계종 최고 법계인 대종사 품서도 받고 머잖아 이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져 열반 30주년 즈음에 큰스님께 봉정할 날을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진 4】 

 

사진 4. 고심정사 접견실에서 담소 중인 원택스님, 왼쪽부터 김명우 교수, 강경구 교수.  

 

그런데 가슴속에 한 가지 의문점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습니다. ‘큰스님께서는 1967년에 백일법문을 통해 선과 교를 아울러 설파하셨는데, 어째서 십여 년이 훨씬 지나 『선문정로』를 출간하셨을까?’ 하는 망상이 머릿속을 꽉 채웠습니다. 화두에 몰두하듯이 며칠 동안 의문에 의문을 달다 보니 서서히 그 안개가 걷히는 듯하였습니다.

 

1967년 7월 23일, 해인사에서는 종단의 중대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청담 종정 예하의 소집으로 70여 명의 스님들이 모인 ‘종단 중진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 성철스님도 참가하였습니다(당시 56세). 성철스님은 도반이신 자운 큰스님의 요청으로 1966년 가을에 문경 김용사 조실로 계시다가 백련암으로 옮기신 지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중진회의는 25일 정오까지 이어져 자연스럽게 제16회 임시중앙종회 본 회의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해인사에 방장 체제의 해인총림 설치가 결의되었고, 해인총림 초대 방장에 성철스님이 추대되었습니다. 11월 16일(음 10월 15일)에 해인총림이 설치되었고, 첫 번째 동안거를 맞이하여 선원에 60명, 강원에 70여 명 그리고 큰 절의 각 소임 등 약 160여 명이 동안거에 들어갔습니다.

 

성철스님께서는 동안거 결제법문을 하고 음력 10월 말일에 상당법문을 하신 후에 12월 4일부터 이듬해 2월 18일까지 1백여 일 가깝게 ‘특별법문 청법 대법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른바 세간에 유명하게 언급되는 ‘백일법문’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불교학계에서도 드물게 불교의 선禪과 교敎를 중도中道로 회통하여 설파하셨고, 아인슈타인의 E=MC2의 상대성이론으로 불교의 불생불멸을 설명하셨으며, 선수행의 실천론으로선 돈오돈수를 설파하셨습니다.

 

백일법문 이후에 성철스님의 명성과 설법 내용은 곧장 자자하게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인쇄물이라고 해야 철필 등사기로 제작한 법문 자료집이 다였고, 법문 녹음조차 금하셨기에 천제스님이 법상 밑에 녹음기를 감추고 몰래 녹음한 테이프가 있긴 해도 제대로 유포된 적이 없어서 명성과는 달리 세월이 흐르면서 그 내용은 서서히 잊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납이 1972년에 출가하여 행자 생활을 하고 사미계를 받고 큰스님을 모실 때도 백일법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듣질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1976년 7월 15일에 『한국불교의 법맥』이 출간되었습니다. 【사진 5】 땅바닥에 떨어진 신문 조각에조차 눈길을 두지 못하게 하셨던 큰스님께서 책을 내시다니, 저는 의아해서 사형인 원명스님에게 여쭈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글을 쓰십니까?”

“해인총림 방장이 되신 그해 동안거 때 100일 가까이 대중법문을 하셨는데, 그때 원고를 손수 다 쓰셨고, 요즈음 결제 때 하시는 상당법문도 손수 다 쓰고 계십니다.”

“백일 동안 하신 법문을 책으로 출판하였습니까?”

“아니요. 얼마 전에 카세트테이프를 정리하긴 했는데 책으로 나온 것은 없습니다.”

 

백일법문을 하신 지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아무도 관심을 두는 이가 없고, 도리어 교가 쪽에서는 내용이 너무 어렵다고 하고, 선가 쪽에서는 그렇게 방대하게 설파하는 걸 보니 “성철스님은 선승이 아니라 학승”이라는 비판까지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선방의 대명사는 할[喝]과 몽둥이[棒]인데 즉설주왈로 수좌들을 가르치지 않고 방대하게 교리나 설한다 하면서 오히려 ‘반수좌’라는 말까지 듣게 되셨다고 합니다. 

 

사진 5. 『한국불교의 법맥』 초판본, 1990년 2쇄 본, 1993년 3쇄 본.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큰스님의 세수도 일흔에 가까워지니 조계종 현실에 무엇인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을 굳히신 듯합니다. 당시 종단과 학계는 정화불사를 성취한 후 보조국사를 조계종 종조로 모셔야 한다는 문제로 들썩이고 있었는데, 해인총림 방장으로서 백일법문과 같은 법문은 다시 할 수 없다고 판단하신 듯합니다. 그래서 1976년 7월 『한국불교의 법맥』을 저술하여 태고보우국사를 조계종 종조로 모셔야 한다는 취지로 발표하셨습니다. 그리고 1967년 12월 백일법문을 설법한 지 15년의 세월이 지나서 선종 부분만 선택하여 다시 정리하기로 작정하신 듯합니다. 【사진 5】

 

『백일법문』에서는 하권 ‘제2장 4절 오매일여’를 다루는 끝부분에서 『종경록宗鏡錄』에 대한 내용을 간략히 딱 두 구절만 인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선문정로』는 제1장 ‘견성성불’에서부터 영명연수의 『종경록』 제1장 ‘표종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철 방장스님은 지난 세월에 걸쳐 『종경록』을 저본으로 하여 선과 교를 다시 살펴보시고 선의 수행과 실천에 있어서 『백일법문』의 선 강의와는 차원이 다른 격조 높은 저술, 즉 선의 고전이 탄생하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원고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 법정스님에게 윤문의 도움을 받으며 편집과 교정 작업을 하는 중에 전두환 군부 독재의 10·27 법란이 일어나 조계종은 미증유의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혼란스러운 종단 사태 가운데서 1981년 1월 15일에 성철 방장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장에 추대되셨고, 『선문정로』는 그해 12월에 출판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철스님은 『선문정로』를 집필하시면서 무려 88종에 달하는 경론과 어록을 참고하시고, 그중에서 326개에 달하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스님께서 『선문정로』를 집필하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셨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선문정로』의 출간은 침몰해 가던 조계종이라는 난파선을 구해낸 크고 큰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선문정로』는 깨달음[實悟]과 수행[實參]에 관한 문제를 여러 경전과 어록에서 발췌하고 정리하여 고구정녕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불조佛祖와 달마정전達摩正傳의 정통은 돈오점수가 아닌 돈오돈수라는 내용으로 수미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750여 년 동안 돈오점수를 선종의 전통 수행으로 여기고 보조국사를 숭모해 온 불교 문중과 불교학계의 충격과 분노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보조지눌 국사는 황제께서 인정하신 고승인데 가야산 깊은 산중에 있는 해인사 방장스님이 보조국사의 사상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종정이 되었다고 맥락 없이 보조국사를 힐난한다.”라고 하면서 보조지눌을 숭모하는 분들은 분을 풀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선문정로』가 출간되고 간헐적으로 돈점논쟁 학술회의가 있어 오다가 10여 년이 지난 뒤인 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주최로 송광사에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뒤이어 1993년 10월 백련불교문화재단 주최로 해인사에서 국제학술회의가 열리면서 국내외에서 3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후 10여 년간의 돈점논쟁은 불교학계의 큰 이슈가 되어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성철스님께서 1993년 11월 4일에 홀연히 입적하시고 보조국사의 사상을 연구하던 1세대 학자분들도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면서 돈점논쟁을 주제로 하는 학술회의도 점점 사그러들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만큼 불교학계에 토론 열기가 활발하던 때도 없었던 듯합니다. 그 후에 어쩌다 당시에 힘차게 논쟁에 참여하셨던 학자분들을 만나게 되면 반가운 눈빛으로 “그때는 성철스님 덕분에 돈점논쟁으로 활기가 넘쳤죠. 어쩌면 그때 학자 몫을 다한 듯싶어서 오히려 그립기도 합니다.”라는 말씀을 넌지시 하시곤 했습니다. 【사진 6】 

 

사진 6. 『정독 선문정로』 초판본을 받아 증정용 책에 사인하고 계신 원택스님.  

 

만약 성철스님께서 『선문정로』를 세상에 내놓지 않고 열반에 드셨더라면 어쩌면 불교학계도 돈점논쟁의 뜨거운 주제와 활기찬 연구가 없었을 것이고, 10·27법난의 수렁 속에서 2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조계종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일흔이라는 나이를 눈앞에 두고 2, 3년 동안 장경각을 들락 날락하시면서 연구하고 정리하여 조계종의 종지를 확실히 밝힌 『선문정로』라는 귀한 책을 선물로 주고 가신 큰스님의 공덕은 참으로 크고도 크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한강에서 멀찍한 부산 동의대학교에 계신 강경구 교수가 10여 년에 걸쳐 『선문정로』를 연구하여 현대어역과 해설을 한 『정독 선문정로』(신국판 양장본, 1,016쪽)를 장경각에서 출판하게 되니, 저희 문도와 신도들은 『선문정로』에 환하게 등불을 밝혀주신 강 교수님의 신념과 정성에 무한한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부처님과 성철스님께 『정독 선문정로』를 법공양 올리면서 그동안 우리 곁에 오셨던 부처님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만나도 만나지 못한 곰 새끼의 세월을 참회하며, 이 책을 돌다리 삼아 성철스님께서 고구정녕하게 설파하신 참된 깨달음의 길로 우리 모두 함께 나아가기를 발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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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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