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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아날로그 스님의 변명과 두 상좌의 석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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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2 년 2 월 [통권 제106호]  /     /  작성일22-02-04 11:37  /   조회4,25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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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납小納이 고등학교 1학년 때 4·19 혁명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인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경제개발’과 ‘산업화’라는 명분하에 1963년부터 시작하여 3선개헌과 10월유신 등으로 정권을 연장하며 18년 5개월 동안 대한민국을 쥐락 펴락했습니다. 그래서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의 역사는 인권탄압과 지역 차별정치가 만연한 군사 독재시대로서, 당시의 통치자들은 전형적인 암흑세력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제20대 대통령 선거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여당의 대통령 후보자가 “어느 나라나 역사적 인물의 공과는 있게 마련이다.”라고 하며, 그 시대의 지도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민족을 위해 잘한 정책이 있다면 우리 시대에도 본받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는 모습을 목도하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요즈음입니다.

 

소납은 1972년 1월 중순에 해인사 백련암 성철 대종사 문하로 출가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연령이나 학벌에 제한 없이 출가가 자유롭게 허용되던 시절이었지만 서른을 앞둔 나이에 한 출가는 상당히 늦은 출가, 즉 늦깎이 중에서도 늦깎이에 속했습니다. 게다가 종립대학교를 졸업하거나 강원이나 선방의 경험 없이 바로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큰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사회로 말하면 혹독한 도제의 길을 걸은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출가 이후 이때껏 백련암을 떠나지 않고 50 성상星霜을 한곳에 머물며 수행을 해 왔다 하지만 시절의 변화를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은 절집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소납이 출가할 때만 해도 출가자들이 많아서 지금처럼 행자가 귀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새벽예불 때 본 행자가 아침 공양시간에 안 보이면 처음에는 무척 놀라고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며 찾았습니다. 하지만 내일이면 또 누군가가 출가하러 절 마당에 들어섰기 때문에 사람이 오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절 집안은 10여 년 전부터 출가자의 인적이 뜸해진 듯합니다. 특히 2, 30대 출가자는 눈을 씻고 보려야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귀하디귀한 존재가 백련암으로 출가를 하러 온 것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젊은 행자라서 매우 반갑기도 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사미생활을 잘 마쳐서 비구계를 수지하여 스님의 길을 가게 지도해야 할지 예전 같지 않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집에서는 웬만해서는 출가 이전의 행적을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행자에게 학번을 물으니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으로서 직장생활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계종 비구계 수계제도를 살펴보았더니, 예전과는 달리 제도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사회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할 경우,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3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하고 불교대학원에 입학하여 2년 만에 석사학위 논문을 받으면 승려 기본교육 4년을 채운 것으로 인정하여 비구계를 품수할 수 있도록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행자 생활을 잘 마친 그 행자에게 ‘일림’이라는 법명을 주며 그런 수순을 밟아 기본교육을 채우고 비구계를 받도록 길안내를 했습니다. 일림 상좌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학부 2년을 수월하게 보내고 바로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하고 한 학기 지나서는 논문 제목을 정하고 지도교수를 정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며 궁시렁대기 시작하였습니다.

 

실은 소납이 사제나 상좌나 조카 스님들이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밟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소납은 백련암에서 소임을 살면서 틈이 생길 때마다 큰스님에게 들키지 않게 골방에 홀로 앉아서 ‘백일법문’ 녹음테이프를 들었습니다.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낀 채로 하도 오래 듣다 보니 귀에 물집이 생길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반복해서 듣고 또 들어서 스님의 법문내용을 풀고 정리하여 만든 법어집이 바로 상하로 출간된 『백일법문』입니다.

 

나아가 한문으로 된 어려운 조사들의 선어록을 한글로 번역하게 하여 선림고경총서를 발행하고, 성철사상연구원에서 연간 한두 번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며 여러 편의 논문을 읽고, 장경각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이리저리 다양한 글을 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학위를 받은 분들의 문장이 확실히 매끈하고 조리가 정연하다는 인상을 받아 왔습니다.

 

전공 분야의 공부를 깊이 있게 하면서 늘 글을 읽고 쓰다 보니 글을 다루는 솜씨도 남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지난 호에 말씀드린 『정독精讀 선문정로』를 저술하신 강경구 교수님의 문장만 보더라도 저자가 하고자 하는 논조를 이해하기 쉽고 편안한 단어들로 구성한 매끈한 문장으로 독자들의 독서를 참 편하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성철스님이 옛 문헌을 편의적으로 생략하거나 재구성하여 인용하였다는 점을 살펴보겠다. 성철스님은 자신의 수행과 깨달음이 옛 불조들과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는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문장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활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현대 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의 왜곡에 속하지만 옛 한자문화권에서는 흔히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다. 예컨대 『시경』의 연애시에서 한두 구절을 단장취의하여 도덕률을 선양하는 문장에 활용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그것은 옛 성현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정신적 성취를 거둔 증거로 이해되기까지 하였다. 성철스님은 자신의 수행과 체험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옛 문장의 맥락에 묶이지 않고 그것을 가져다 활용하는 입장에 있었다. 흔히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핵심이 창작하지 않음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원래 ‘술述’은 옛사람의 말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심화된 재해석과 새로운 관점의 제시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성철스님의 문헌 인용은 그런 점에서 술이부작의 전통에 맞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다.”

                                                   - 『정독 선문정로』에서

 

소납은 이렇게 편안하게 잘 읽히는 글을 쓸 줄 아는 상좌나 사제나 조카 스님들이 나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도교수를 정하지 못해 조바심을 내더니 3학기를 지날 때쯤 해서 불교대학원장 황순일 교수를 지도교수로 정하고 논문 제목을 논의해 보기로 했다고 어느 날 보고를 하였습니다. 논문을 쓰면서도 어지간히 고생하는 눈치를 보여 “저러다가 논문이 통과되지 못하면 석사학위도 물 건너가고 올해 비구계 수계도 받지 못할 텐데, 그러면 저놈 얼굴을 어찌 보나?”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인년 새해를 맞이하고 며칠 뒤인 1월 5일, 볼일이 있어 장경각 사무실에 와 있는데 일림 상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스님, 석사논문을 올리러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12시쯤 또 다른 상좌인 일학이와 함께 찾아와서는 삼배를 올리고 둘이 각각 석사학위 논문을 바친다고 했습니다. 일학 상좌는 박문기 교수(종호스님)의 지도하에 「『육조단경』과 『명추회요』에서의 ‘念’ 의미 비교 연구」로, 일림 상좌는 황순일 교수의 지도하에 「백일법문에 나타난 퇴옹성철의 중도사상」으로 논문이 통과되어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사진 1. 학위논문을 들고 찾아 온 두 상좌 스님들과 조계사 마당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계신 원택스님(중앙)과 상좌 일학스님(원택스님 좌측)과 일림스님(우측). 

 

일림 상좌는 처음부터 이 길을 가기로 의논해서 오늘에 이르렀고, 일학 상좌는 2006년 11월 4일에 출가하여 2007년 9월에 수계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선학전공으로 입학하여 2014년 11월에 수료하고, 이런저런 소임을 맡아 바쁜 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논문을 써서 이번에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일학 상좌는 시절인연이 닿아 2021년 12월 23일에 성철스님 생가터에 창건한 겁외사劫外寺의 주지에 임명되어 큰 신심을 보일 기회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생한 두 상좌에게 수고했다고 한마디씩 덕담을 해 주고 점심 공양으로 소소한 자축연을 했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허전했습니다. 더 많은 상좌나 조카 스님들이 학위를 받았으면 하는데, 그런 마음을 내는 스님들이 가뭄에 콩 나듯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큰스님께서 아신다면 “쯧쯧쯧” 혀를 차실 일이지만 말입니다.

 

소납이 출가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백련암 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마당에 떨어진 신문 쪼가리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큰스님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해 호되게 불호령을 맞은 일이 있었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간화선 선사였던 큰스님 눈에는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습니까. 그러니 상좌들이 학위 받는 일에 이런저런 마음을 내고 있는 저를 보신다면 또다시 불호령을 내리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림 상좌가 떠난 뒤 5년여 동안 백련암에 행자 등록이 없다가 지난 10월에 오래간만에 행자들이 찾아들었습니다. 문도들과 의논하여 “제가 이제 승납이 50년이 다 되어 가니 상좌는 받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제들에게 나누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소회를 밝히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출가한 행자 중에 나이가 45세인 행자가 한사코 소납을 은사로 삼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주위의 양해를 얻어 상좌로 들이기로 했습니다. 그 노행자와 의논하여 일림 상좌와 같은 방식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편입하여 기본교육 과정을 밟기로 했는데, 동안거 결제가 가까워오자 봉암사 선원에 입방하겠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마흔다섯 살에 출가하고 보니 다른 스님보다 훨씬 늦깎이인데, 대학에 가서 4년 동안 불교학 공부를 하기보다는 참선에 정진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뜻대로 하도록 하긴 했지만 한편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세 명의 행자들이 승려 기본교육을 받기 위해 각각의 길로 백련암을 떠나고 난 뒤에 뭔지 모르게 불편함이 몰려왔습니다. 그게 뭘까 한참을 고심하던 차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수기로 작성한 원고를 입력할 일이 있거나 자료를 찾을 일이 있어서 행자들에게 부탁하고 나서 돌아서면 어느새 출력한 원고와 자료들이 제 책상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백련암 대중들이 너나없이 비슷한 사양의 스마트폰을 쓰고 있어도 법랍이 어느 정도 된 스님들은 그저 전화기로 사용하고 있고, 이제 들어온 행자들은 정말 스마트하게 폰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컴퓨터는 이미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 도구였던 것입니다. 

 

사진 2. 일학스님의 논문 「『육조단경』과 『명추회요』에서의 ‘念’의미 비교 연구」와 일림스님의 논문 「백일법문에 나타난 퇴옹성철의 중도사상」.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여든이라는 나이를 눈앞에 둔 소납으로선 디지털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사회의 패러다임을 이렇게 빠르게 변화시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출가자로 살면서 세상 문물에 신경 쓸 일이 뭐 있겠나 싶어 무심하게 지내 온 탓도 있습니다. 한편으론 이렇게 빠르게 기술이 발전하면 손가락 하나와 말 한마디로 모든 게 척척 이루어지는 때가 올 테지 하면서 기다린 탓도 있고요. 그러니 저희 아버지 세대들은 문맹의 시절을 살았다면 저는 디지털과 AI 시대에 컴맹 무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디지털 무식꾼이 되어 가고 있는 이즈음, 상좌들은 학위논문으로 기쁨을 주고, 장경각에서는 1천여 쪽이 넘는 『정독 선문정로』가 인쇄에 들어가 발간을 앞두고 있어서 그나마 아날로그 스님으로서 다소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머잖아 이 두 상좌가 수행자로서의 본분사에도 전념하며 석사학위 논문 제목을 더 깊이 있게 연구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들고 올 날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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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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