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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진감선사비와 고운 최치원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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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2 년 1 월 [통권 제105호]  /     /  작성일22-01-05 09:57  /   조회3,82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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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15 | 하동 삼신산 쌍계사 ② 

 

 

진감선사眞鑑禪師(774-850)에 대해서는 최치원 선생이 지은 비문에 가장 상세하게 나와 있다. 진감선사는 774년에 태어났는데, 그의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의 고관을 지냈는데, 수나라가 요동을 정벌할 때 고구려로 귀화하여 옛 한사군漢四郡 지역인 전주의 금마金馬, 즉 오늘날 익산 지역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불법을 익혔으며, 부모의 상을 치른 후 804년(애장왕 5)에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뱃사공으로 자원하여 당나라로 들어가 창주滄州의 신감대사神鑑大師에게 출가하여 공부하고, 810년(헌강왕 2)에 숭산崇山 소림사小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다시 학림으로 돌아왔다. 

 

그 후 어느 때인가 신라에서 먼저 당나라에 들어와 불교를 공부하던 도의화상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사방을 두루 주유하면서 불법을 익혔다. 그러던 중 도의화상이 821년(헌덕왕 13)에 먼저 신라로 돌아가고, 그는 그 길로 장안長安의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3년간 더 도를 닦고, 다시 저자로 내려와 짚신을 만들어 보시하면서 3년을 또 수행하였다. 그는 이런 수행을 하면서도 고국을 잊을 수 없다고 하며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여 상주尙州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에서 주석하며 선을 펼쳤다. 

 

 

사진 1. 진감선사비.  

 

높은 도덕과 법력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조금 넉넉한 강주 지리산으로 내려갔는데, 그때 호랑이들이 나와 길을 인도 하였고, 맹수들이 머무르는 곳에 가니 동굴의 석문이 있어 그곳 화개곡花開谷에 옛날 삼법화상이 세운 절의 터가 남아 있어 여기에 당우를 마련하였다. 838년 민애왕閔哀王(838-839)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부처의 자비에 깊이 의탁하고자 하여 국서를 내리고 재를 지낼 비용을 보내 발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에 선사는 “부지런히 선정을 닦으면 될 뿐, 발원할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하고 응대하였다. 민애왕은 선사의 가르침에 깨달은 바 있어 혜소慧昭라는 호를 내리고, 그 절을 대황룡사大皇龍寺에 적을 두게 하였다. 

 


사진 2. 구양순의 화도사비. 

 

여러 차례 왕이 왕경으로 오기를 초빙하여도 꿈적도 하지 않고 수행에 열중하였다. 홈을 판 대나무를 가로질러 절 주위에 시냇물을 끌어다가 사방으로 물을 대고, 절의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고 지었다. 선사는 법통을 세우고자 조계의 현손임을 분명히 하고 6조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흰 벽을 화려하게 채색하여 장식하여 중생을 인도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즉 6조혜능-남 악회양南嶽懷讓(677-744)-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창주신감滄州神鑑-진감혜소眞鑒慧昭라는 법통을 말한다. 이 법통 이야기는 문경의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 靜眞大師圓悟塔碑’에 나오는 내용인데, 학자들 중에는 중국의 문헌에는 창주신감 대사에 관한 흔적이 전혀 없고, 창주와 숭산의 거리가 너무 먼 점과 범패가 하남성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한 점을 들어 하남성河南省 당주唐州 운수산雲秀山의 신감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있다. 운수산의 신감대사라고 하더라도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 화상처럼 마조도일 선사의 뛰어난 적전 제자들 중에 손꼽히는 사람은 아니다.  

 

진감선사비는 진감선사가 입적하고 36년이 지난 뒤에 조성되었다. 진감선사는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된 신무왕神武王(재위 839. 4~7월)의 아들인 문성왕文聖王(재위 839-857) 12년 즉 850년에 입적하였는데, 이 당시에 문성왕은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려 했으나, 부도와 비를 세우지 말라는 뜻에 따라서 탑비를 세우지 않았다. 그 뒤 삼기三紀 즉 36년의 세월이 지나고 문하의 제자들과 내공봉內供奉 양진방楊晉方, 숭문대崇文臺 정순일鄭詢一이 비석을 세워줄 것을 아뢰니, 경문왕景文王(재위 861-875)의 태자였던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이 ‘진감선사’라 추시追諡하고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사진 3. 우세남의 공자묘당비. 

 

885년에 28세의 최치원 선생이 신라로 귀국하였고, 신라는 황소黃巢의 난이 평정되었음을 축하하는 사신을 당나라로 보냈다. 그런데 비석을 세우기도 전에 헌강왕이 평소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던 황룡사皇龍寺의 백고좌회百高座會의 효험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헌강왕의 동생인 정강왕定康王(재위 886-887)이 선왕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를 계승하여 추진하였다. 이때 정강왕이 인근에도 옥천사라는 절이 있어 사람들이 서로 혼동하므로 절을 둘러싸고 흐르는 계곡의 시냇물이 합쳐지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고받고 옥천사를 쌍계사雙溪寺로 이름을 바꾸도록 하였다. 그리고 최치원 선생에게 비문을 지을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탑비의 비문을 최치원 선생이 짓고 또 붓을 들어 글씨도 직접 썼다. 비는 888년(정강왕 2) 7월에 건립되었다. 그해에 정강왕은 황룡사의 백고좌회에 몸소 참석하기도 하고, 한주漢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찬伊湌 김요金蕘를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기도 하였으나, 5월에 병이 들어 결국 여동생인 만曼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죽었다. 헌강왕처럼 보리사菩提寺의 동남 쪽에 묻혔다. 이 여동생이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이다.

 

진감선사비는 귀부龜趺, 비신, 이수螭首 형태의 덮개돌이 완전하게 남아있다. 탑비의 높이는 363㎝이고, 덮개돌의 전면 중앙에 사각형으로 깊이 판 제액에 ‘양해동고진감선사비敭海東故眞鑑禪師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의 글자는 2,423자이다. 승려 환영奐榮이 비문의 글씨를 비석에 새겼다(사진 1).

진감선사비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나 비를 보호하는 비각도 없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 비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오래되어 비신의 일부는 마멸되었지만 다행히 그 이전의 탁본이 전하고 있어 그 비문 내용이 완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 비는 최치원 선생의 유명한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가장 먼저 완성된 것으로서, 그가 신라로 귀국한 직후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도 가치가 크다. 

 

사진 4. 저수량의 안탑성교서.

  

나는 진감선사비를 보려고 쌍계사에 몇 차례 온 것 같다. 진감선사의 비는 진감선사와 관련된 불교에 관한 내용 이외에 최치원 선생의 문장과 사륙병려문으로 쓴 글에서 구사한 유가, 불가, 도가의 사상이 어우러진 최치원 선생의 삼교융합적 지식 체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느 하나의 생각에 얽매여서는 안 되고 모든 지식에 대한 섭렵과 이의 종합과 분석, 그리고 이에 대한 평가와 더 나아가 능력이 미친다면 자기의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그 본연의 일이다. 당시 당나라 등 중국으로부터 유가, 불가, 도가적 지식이 신라로 유입되었지만, 최치원 선생은 그 전체의 모습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고 보니, 이 사상들 중에 가치가 있는 것은 수용해야 인간이 문명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가, 불가, 도가의 핵심을 보면, 이미 우리 신라인들의 삶과 생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하고, 신라의 풍류사상風流思想이 그것이라 고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서술하였다. 유교가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시대에 와서는 마침 최치원 선생이 짓고 쓴 진감선사의 비가 지금의 자리에 있고 그 자리를 중심으로 대웅전이 들어서고 새로운 사역이 조성되면서 최치원 선생에 대한 현창 또는 숭모의 공간도 만들었다. 

 

구 사역에 혜능대사의 진영을 모셨던 것과 대비하여 최치원 선생의 진영을 모시는 영당을 지었다. 1793년에 쌍계사에서 제작하여 모신 최치원의 진영은 1825년 화개의 금천사琴川祠로 옮겨질 때까지 여기에 있었다. 도교에서 사후에 신선이 되었다고 믿는 최치원의 진영은 현재 여러 점이 남아 있는데, 쌍계사에서 조성한 이 진영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최치원을 2명의 동자승이 좌우에서 시봉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현재 운암영당雲岩影堂으로 옮겨져 있는 이 초상화는 그 후 어느 때인가 불교적 색채가 있는 동자승의 그림이 지워지고 그 위에 책과 같은 다른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아무튼 쌍계사에는 최치원 선생에 대한 존숭의 식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 시기가 있었다. 

 

 

사진 5. 구양통의 도인법사비. 

 

진감선사비는 최치원 선생이 짓고 직접 글씨를 쓴 것이어서 한국서예사에서 보면, 최치원 선생의 글씨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해서체楷書體가 정립되어 정자체의 표준이 되는 글씨여서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 유학생들은 거의 당나라 해서체를 표준으로 삼아 글씨를 썼다. 그런데 당나라 해서는 구양순歐陽詢(557-641)이 규범적이고 방정하며 소 쇄하고 미려한 글씨체를 만들어 내어 가장 중심이 되었고(사진 2), 여기에서 다소 온화하고 자유로운 우세남虞世南(558-638)과 저수량褚遂良(596-658)의 글씨체가 있었다(사진 3, 4). 

 

신라 유학생들은 거의 구양순체를 썼으며,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비문의 글씨를 써서 682년경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서 쓴 구양순체의 글씨가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왕희지王羲之(307-365)체를 기본으로 하되 위·진·남북조의 비석의 글씨(碑書)를 충실히 연구한 바탕 위에 창출된 구양순의 글씨체는 그 아들 구양통歐陽通(?-691)에게 이어졌는데, 구양통은 그 아버지의 글씨체를 기본으로 고수하되 너무 엄격한 부분을 다소 완화 시켰다(사진 5). 아버지와 그를 이은 아들의 글씨가 모두 뛰어나 당시 사람들은 두 명필을 ‘대소구양大小歐陽’으로 불렀는데, 이러한 명필 구양통은 당 고종高宗( 628-683)의 후궁이었던 무측천武則天(624-705)의 눈 밖에 나 결국 투옥되었다가 살해되었다.

 

 

사진 6.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비문. 

 

최치원 선생의 진감선사비의 글씨는 바로 이 구양순-구양통풍의 글씨체로 쓴 것으로 보인다(사진 6). 이런 서풍에서 보면, 당나라 4대 서예가로 꼽히는 안진경顔眞卿(709-785)의 장중하고 웅혼하며 살이 많은 둥근 분위기의 글씨는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의 서풍과는 근본에서 다르다. 통일신라 말기 선사들의 비는 대부분 구양순체의 글씨로 쓰여졌는데, 예컨대 ‘보림사 보조선사탑비寶林寺普照禪師塔碑’, ‘월광사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가 그것들이다. 신라 하대에 최치원에 이어 구양순체를 구사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그의 종제인 최인연崔仁渷(=崔彦撝=崔愼之, 868-944)과 최인연의 아들로 후진後晉에 유학을 간 최광윤崔光胤(?-?)이 있다.

 

서예사적 면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가 직접 쓴 비의 전액이다. 여기에는 ‘양해동고진감선사비’라고 전서로 썼는데, 그 전서가 진시황시대에 만든 소전이 아니고 그 이전의 올챙이 모양을 닮은 과두전蝌蚪篆의 글씨에 버들잎 모양을 딴 유엽전柳葉篆의 풍이 가미되어 있다(사진 7). 이것을 보면, 신라시대에 고대 문자 즉 고문자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사용한 것인가? 도 당유학생은 당나라에서 고문자를 많이 접하고 이를 익혔는가? 아니면 최치원 선생은 이런 옛 전서의 글씨를 어떻게 학습하고 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 하는 등등의 질문이 제기된다. 이 고문자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 선생에게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연구 수집되었다. 허목 선생은 글씨를 멋있게 쓰기 위해 공을 들이는 행태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면서 문자의 원리와 철학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의 자세와 문자에서도 고문자의 중시와 탐구는 연구체계에서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부분이다. 

 

고대 문자가 어떠했는지는 모두 알기는 어렵다. 중국에서 남아 있는 고문자를 모아 사전을 편찬한 것이 있다. 쉽게 생각하면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를 생각해 보면 된다. 글씨나 자수를 쓴 병풍이 유행되기도 했는데, ‘복福’ 자와 ‘수壽’ 자를 백 가지 종류로 서체를 달리하여 쓴 것이다. 이런 것은 중국에도 있는데, 이런 글씨가 모두 근거를 가지는 것인지 아니면 글씨를 쓴 사람이 일부 창작하여 다양한 모양의 글자꼴을 만들었는지는 아직 검증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이런 것이 고문자라는 것이다.  

 

 

사진 7.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비 전액.  

 

조선시대 역관 김진흥金振興(1621-?)이 유엽전, 새머리로 장식한 조전鳥篆, 벼이삭으로 장식한 수서穗書, 거북이들을 이은 귀서龜書, 기자전奇字篆, 벽락전碧落篆, 과두서科斗書, 고전古篆, 대전大篆, 조적서鳥迹書, 옥근전玉筋篆, 정소전鼎小篆, 용 발톱으로 장식한 용과전龍瓜篆, 봉황 꼬리로 모양의 봉미서鳳尾書, 떨어지는 이슬 모양의 수로전垂露篆, 전도전剪刀篆, 현침전懸針篆, 구슬로 이은 모양의 영락전纓絡篆, 태극전太極篆, 조충전雕蟲篆 등 38가지의 전서체로 『대학大學』을 쓴 『전대학篆大學』이라는 책이 있다. 역관들은 고문자를 모은 자료들을 가지고 업무에 활용하였던 듯하다.

 

혜소화상은 원래 선교를 같이 공부하였지만 당나라에 유학을 하던 중 40대 초반에 도의화상을 만나 선에 대해 눈이 열였다고 본다. 그리고 둘이서 장강의 남북을 오가며 선종과 관련된 곳을 유람하면서 홍주종洪州宗의 선풍을 익혔다. 그런 후 신라로 귀국하여 옥천사에 둥지를 마련하고 홍주종을 펼쳐나갔다고 본다. 그는 적멸에 들면서 문인들에게 “모든 법이 다 공하다. 한마음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써 수행하라.[萬法皆空, 一心爲本, 汝等勉之.]”라고 붓다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리고 부디 탑 같은 것 세워 껍데기(形骸)를 묻지 말 것이며, 비를 세워 내가 걸어온 흔적을 기록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세속의 인간들은 시호를 내리고 탑을 세우고 비문을 지어 행적을 기록하고 이를 돌에 새겨 비로 세웠다. 

 

나는 육조정상탑을 보고 싶어 옥천사 영역으로 몇 번이나 갔다. 그리고 쌍계사에 갈 때마다 진감선사비를 찾았다. 이렇게 쌍계사를 들락거렸다. 늘 내려오는 길은 어둠이 산골짜기로 밀려들 무렵이었다. 놓칠세라 부도 탑들도 또 보았다.

“이 사람아, 자네도 내 말을 정말 안 듣는군. 뭐땜시 돌덩어리를 읽고 보고 난리냐 말일세. 헛고생 그만 해!” 삼신산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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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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