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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네 가지 부정심소不定心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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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2 년 1 월 [통권 제105호]  /     /  작성일22-01-05 09:26  /   조회3,74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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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105 | 대수번뇌심소④ 

 

 

마음의 다양한 작용에 대해 유식학에서는 51가지로 세밀하게 분류하여 심소心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 51가지의 심소는 각각의 특성에 따라 다시 여섯 가지 주제별로 분류되는데, 이를 육위심소六位心所라고 한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변행심소 5가지, 별경심소 5가지, 선심소 11가지, 번뇌심소 6가지, 수번뇌심소 20가지, 부정심소 4가지가 그것이다. 

 

이번 호에 살펴볼 내용은 육위심소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정심소不定心所인데 달리 불결정심소不決定心所라고도 한다. 부정심소에 속하는 네 가지 심소는 그 특성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심소라는 뜻이다. 선심소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뇌심소도 아니기 때문에 굳이 분류하자면 무기無記에 속하는 심소로 분류된다. 따라서 이미 고찰한 다섯 가지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고 별도의 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렇게 그 특성이 규정되지 않는 네 가지 심소는 수면隨眠, 악작惡作, 심尋, 사伺가 그것이다.

 

수면睡眠, 인식과 감각기관이 몽롱한 상태

 

부정심소의 첫 번째 항목은 수면睡眠(middha)이다. 수면은 말 그대로 졸음과 같은 상태로 마음을 암매闇昧에 빠지게 하는 작용을 말한다. 암매란 ‘어렴풋하고 어둡다는 뜻’으로 인식이 명료하지 못하고 흐릿하여 대상을 분명하게 인지하여 지혜롭게 판단하지 못하는 심리상태를 의미한다. 

 

수면은 한 글자로 줄여서 ‘면眠’이라 하기도 하고, ‘수면’을 붙여서 한 단어처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식학에서는 수와 면에 대해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즉, ‘수睡’가 의식이 깊이 잠든 상태를 뜻한다면 ‘면眠’은 전오식前五識이 캄캄하여 작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수는 인식이 잠에 빠진 것처럼 명료하게 작동하지 않는 ‘암闇’의 상태를 말하고, 면이란 안이비실신이라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명료하게 작동하지 않는 ‘매昧’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수면은 수행을 방해하는 요소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졸음의 마귀라는 뜻에서 ‘수마睡魔’라고 했다. 화두를 들어야 하는 수행자나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수험생에게 쏟아지는 졸음은 말할 수 없는 방해요소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졸음운전을 비롯해 일상생활에서도 졸음의 상태는 큰 사고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수면은 번뇌심소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졸음은 단지 생리현상일 뿐이지 그것은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므로 유식에서는 이를 선도 악도 아닌 부정심소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수번뇌심소에 포함된 혼침惛沈과 수면이 혼돈될 수 있다는 점이다. 보통 수행을 방해하는 두 가지 요소를 말할 때 혼침昏沈과 도거掉擧를 든다. 그리고 혼침의 상태에 대해 설명할 때는 통상 ‘침을 흘리거나 꾸벅꾸벅 졸면서 의식이 명료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한다. 하지만 유식학에서는 수면을 별도의 심소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혼침과 수면이 다른 심소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혼침이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아 쳐지는 심리적 현상이라면 수면은 생리적 현상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좌선하면서 조는 것은 혼침이라기보다 수면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방이나 수행현장에서는 수면 상태의 심소를 혼침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악작惡作, 지난 일에 대한 후회

 

부정심소의 두 번째 심소는 악작惡作(kaukṛitya)이다. 악작은 한문이 담고 있는 글자의 의미대로 보면 ‘나쁜 행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악작의 유식학적 의미는 과거에 일어난 자신의 행위에 대한 후회後悔를 의미하므로 간단히 ‘회悔’라고도 한다. 이전에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하며 괴로워하는 심리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간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서 마음이 그것에 매달려 후회하는 것이므로 달리 ‘추회追悔’라고도 한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회悔심소는 지은 것을 미워하는 것을 말한다. 지은 업을 미워하여[惡所作業] 후회함이 본성이고(追悔爲性), 사마타[止]를 방해함이 작용[障止爲業]”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내용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 악작이라면 악작은 선심소로 분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악작에 대해 ‘이전의 잘못된 행위를 후회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므로 잘못된 행위를 미워한다는 의미에서 ‘오작惡作’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악작이 무기심소에 포함된 것을 간과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악작은 “먼저 지은 업을 미워하고[先惡所作業], 나중에 비로소 후회하기 때문이다[後方追悔故]. 이전에 하지 않은 것을 뉘우치는 것[悔先不作]도 역시 악작에 포함된다[亦惡所攝].”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미뤄보면 악작은 후회하는 내용에 있어 선악의 성격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과거의 나쁜 행동을 뉘우쳐서 선善으로 가기도 하지만 반대로 바르게 행동했던 선행善行까지도 후회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악작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연말 모임에 가서 분위기에 휩쓸려서 자선행사에 기부금을 내거나, 타인의 시선 때문에 모임의 밥값을 자신이 혼자 낼 때도 있다. 분명 그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에 후회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술이 깨고 나면, 자신이 했던 행동이 분명 선행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이 악작이다. 어쩔 수 없이 바른 선택, 자신이 손해 보는 선택을 했을 때 후회하는 일들이 악작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악작은 과거 잘못을 뉘우쳐서 바르게 고치겠다고 다짐하는 선심소가 아니라 지난 일을 후회하며 스스로 괴롭히는 심리작용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부파불교의 논서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에서는 악작에 대해 ‘이미 지은 악행을 후회하는 것’, ‘이미 지은 선행을 후회하는 것’, ‘이미 지은 악행을 철저히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 ‘이미 지은 선행을 철저히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으로 4가지 유형의 후회를 들고 있다. 선행도 후회하고, 더 철저하게 악행을 저지르지 못한 것도 후회하는 것을 악작으로 설명하고 있다.

 

심사尋伺, 대상에 대한 개괄적 인식과 세밀한 이해

 

부정심소에서 셋째와 넷째는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작용과 관련된 항목이다. 먼저 심尋(vitarka) 심소는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대략적인 살펴봄과 분별을 의미한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심尋’ 심소에 대해 ‘찾아 구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심구尋求’라고 규정짓고, 마음이 의식의 대상에 대해 ‘거칠게 굴림이 본성[麤轉爲性]’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찾아 구함’은 인식의 대상이 무엇인지 찾아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일종의 인식활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작용을 ‘추전麤轉’이 라고 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대략적으로 굴린다’, ‘거칠게 굴린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말에도 ‘머리를 굴린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추전은 대략적으로 머리를 굴려 대상을 언어적 맥락으로 파악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넷째, 사伺(vicara) 심소는 크게 보면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을 살펴보고, 의미를 찾는 작용이라는 점에서는 ‘심尋’과 동일하다. 다만 ‘사伺’는 좀 더 미세하게 분별하고 살펴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사심소는 ‘살펴본다’는 뜻에서 ‘사찰伺察’로 정의하고, 마음이 대상에 대해 ‘미세하게 굴림[細轉]’을 본성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의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법에 대해 정밀하고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마음을 미세하게 굴리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심과 사의 동질성은 둘 다 대상에 대해 언어작용을 통해 인식하게 만드는 마음작용이다. 두 심소 모두 몸과 마음이 느긋하고 편안할 때에는 천천히 작용하지만 몸과 마음이 불안할 때에는 조급하게 작용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반면 차이점으로는 심尋은 대략적인 맥락을 거칠게 살펴보는 마음작용으로 개괄적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사유하는 마음작용인 반면 사伺는 세밀하게 고찰하는 마음작용으로 ‘정밀한 살펴봄’을 뜻한다.

 

 

성철큰스님 좌상(산청 성철스님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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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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