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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
업과 재생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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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  2021 년 12 월 [통권 제104호]  /     /  작성일21-12-03 14:09  /   조회3,28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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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法數 12| 무아와 윤회 ④ 

 

업설業說(kammavāda, Sk. karmavāda)은 인도에서 짜르와까(Cārvāka, 唯物 論)를 제외한 모든 종교와 철학의 윤리사상을 대표하는 교설이다. 특히 업설은 수세기 동안 인도 사회에서 계급의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업설은 인도에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상황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몇몇 학자들은 업설이 인종 차별인 카스트(Caste) 제도를 강화하는 이론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업설은 윤회설과 마찬가지로 당시 인도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사상이다. 그것을 받아들여 재해석한 것이 불교의 업설이다. 불교의 업설은 인도의 전통적인 업설과는 사뭇 다르다. 인도 바라문 전통의 업설과 윤회설은 상주常住하는 자아自我(ātman)를 인정하는 데 반해, 불교는 그러한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론을 주장하면서도 업설과 윤회설을 인정한다.

 

1. 불교의 업설

 

빨리어 깜마(kamma)는 어근 kṛ(to do)에서 파생된 명사로 ‘행위, 행함’을 뜻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행위를 업業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직 ‘의도적 행위’만을 업이라고 한다. 붓다는 “비구들이여, 내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意圖(cetanā)이다. 의도를 가지면 몸과 입과 뜻으로 행동하게 된다.”(AN Ⅲ, 415)고 했다. 따라서 의도가 없으면 어떠한 업도 지을 수 없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업설이 인간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쭐라깜마위방가-숫따(Cūḷakammavibhaṅga-sutta, 小業分別經)」(MN135)에 의하면, 수바(Subha)라는 바라문 학도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원인과 어떤 조건 때문에 [같은] 인간으로서 천박한 사람들도 있고 고귀한 사람들도 있습니까?” “바라문 학도여, 중생들은 업이 바로 그들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 업이 그들의 의지처이다. 업이 중생들을 구분 지어서 천박하고 고귀하게 만든다.”(MN Ⅲ, 202-203)고 했다. 요컨대 ‘인간 불평등의 원인’이 업業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경전에서도 인간의 차별은 과거에 지은 공덕(merit) 때문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과거의 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평등하게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태어난 이후의 업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개선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다른 종교·철학에서 말하는 업과 다른 점이다. 아리아(Ārya)인들은 자신들의 종족이나 신분의 우수성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업설을 이용했다. 하지만 붓다는 개인의 인격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업설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착한 행위를 하면 좋은 과보[善果]를 받고,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쁜 과보[惡果]를 받기 때문이다.

 

욕망이 상대적으로 선이나 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의도도 상대적으로 선이나 악이 된다. 그래서 까르만은 상대적으로 선이나 악이 된다. 좋은 업[kusala, 善業]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업[akusala, 惡業]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 ‘갈애’, ‘의도’, ‘업’은 선이든 악이든 여하튼 그 결과로써 어떤 힘, 즉 좋은 방향 혹은 나쁜 방향으로 지속하려는 힘을 갖고 있다. 선이든 악이든 업은 상대적이며, 윤회의 순환 속에 있다. 그러나 아라한阿羅漢은 비록 행동하지만 업을 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잘못된 자아 관념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윤회와 재생을 가져오는 ‘갈애’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다시 태어남[再生]이 없다.

 

모든 의도적 행위는 그 효과나 결과를 낳는다. 좋은 행위는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행위는 나쁜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행위를 심판하는 자리에 앉은 권력이나 심판자가 정하는 ‘정의’나 ‘상벌’이 아니다. 반면 이것은 법칙 자체의 성질에 스스로 좌우되는 것이다.

 

한 존재는 단지 정신적·육체적인 힘이나 에너지의 결합에 불과하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육체적인 신체가 그 활동을 모두 정지한 것을 뜻한다. 이러한 모든 정신적·육체적인 힘과 에너지는 육체적 활동의 중지와 함께 모두 멈추는 것인가? 불교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의지, 의도, 욕망, 존재하고 윤회하고 더욱더 많아지려는 욕망은 모든 생명체와 모든 존재를 움직이고, 전 세계조차 움직이는 엄청난 힘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고 가장 큰 에너지이다. 불교에 의하면, 이 힘은 죽음인 육체의 기능 정지와 함께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어 지속되며, 재생再生이라고 부르는 윤회를 낳는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업설을 강조하는 까닭은 죽어서 천상(deva)에 태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악업惡業(pāpakamma)을 짓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몸과 입과 뜻으로 의도적 행위를 행함으로써 업業을 짓는다. 그가 지은 업으로 말미암아 당장 괴로움이라는 과보를 받는다. 또 그가 지은 업은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 든 남아 있다가 내생을 결정짓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선善을 행하면 행복해지고, 악惡을 행하면 불행해진다. 이 때문에 선행 혹은 악행을 행하는 것이지 결코 내세에 선취善趣(sugati)나 악취惡趣(duggati)에 태어나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재생再生의 의미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만약 아뜨만(ātman, 自我)이나 지와(jīva, 영혼)와 같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실재나 본질이 없다면, 죽은 후에 다시 존재하거나 태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온五蘊의 집합, 즉 육체적·정신적 에너지의 결합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두 연속적인 순간에도 같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다. 매 순간마다 그것들은 태어나고 죽는다. 그러므로 이 생애 중에도 매 순간마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지만 우리는 지속한다. 만일 이 생에서 자아 혹은 영혼과 같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본질이 없이도 우리가 존속한다면, 왜 몸의 기능이 정지한 후 그 배후에 자아 혹은 영혼이 없이도 그러한 에너지 자체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육체가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에너지는 육체와 더불어 죽지 않고, 우리가 다른 삶이라고 부르는 어떤 다른 형상이나 모습을 계속 취한다. 어린이에게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지적 능력이 미숙하고 약하지만, 그 내부에 완전히 성숙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른바 존재를 형성하는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는 그 내부에 새로운 형태를 취해서 점점 자라나 완전히 성숙하게 되는 힘을 갖고 있다.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재가 없듯이,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통과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아주 명백하게,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통과 하거나 윤회할 수 있는 영원하거나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파괴되지 않고 지속되지만 매 순간마다 변화하는 것은 하나의 연쇄이다. 이 연쇄는 사실대로 말하면 단지 운동일 뿐이다. 이것은 밤을 새워 타는 불꽃과 같다. 이것은 똑같은 불꽃이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불꽃도 아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60세의 사람이 된다. 분명히 60세의 그 사람은 60년 전의 어린아이와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다. 이처럼 여기서 죽고 다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도 아니다(na ca so na ca anno)’. 그것은 동일한 연쇄의 지속인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의 차이는 오직 한 순간의 생각이다. 금생에서 마지막 생각의 순간이 이른바 내생에서의 처음 생각의 순간을 조건 짓는데, 이것은 실로 동일한 연쇄의 윤회이다. 금생 자체에서도 한 순간의 생각은 다음 순간의 생각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불교적인 시각에서는 죽은 후의 삶의 문제는 대단한 신비가 아니며, 불교신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결코 근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존재하고 재생하려는 ‘갈애’가 있는 한 윤회는 계속된다. 실재實在·진리·열반을 보는 지혜를 통해 이것의 추진력인 이 ‘갈애’가 단절되었을 때, 비로소 윤회를 멈출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최고선最高善(summum bounm)은 사후에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열반涅槃(nirvāṇa)은 금생에 실현될 수 있으며, 열반을 이루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열반인 진리를 깨우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는 모든 강박 관념과 망상,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의 정신 건강은 완벽하다. 그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며, 미래를 염려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재를 충실하게 산다.(SN , 5) 그러므로 그는 자아투영自我投影 없이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을 음미하고 즐긴다. 그는 즐겁고 당당하며, 청정한 삶을 즐기고, 그의 감각 기관은 충족되며, 고뇌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온하다.(MN Ⅱ, 121) 그는 이기적인 탐욕·증오·무지·자만·자존심을 비롯한 모든 ‘오욕’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보편적인 사랑·자비·친절·동정, 이해와 관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가 아주 순수하다. 그는 자아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있고 무엇인가 되려는 탐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심지어 정신적인 것까지도 획득하거나 축적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업설은 인도의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비록 업이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업설의 개념은 인도의 다른 종교사상과 불교의 개념이 다르다. 불교의 업설은 의도를 말하며, 결코 숙명론이 아니다. 붓다는 숙명론을 거부하였으며,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업설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윤회 혹은 재생에 대한 설명도 전혀 다르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의미가 다르다.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아뜨만(ātman, 自我)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reincarnation)’하는 것을 윤회라고 하지만, 불교는 금생의 흐름[santati, 相續]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재생再生(rebirth)을 윤회라고 한다. 이러한 차이점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실재적인 아뜨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지만, 업과 과보가 없다거나 윤회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윤회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지만 윤회는 인정한다. 이것이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윤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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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에서 학사와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샤카무니 붓다』, 『잡아함경 강의』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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