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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선사상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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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1 년 11 월 [통권 제103호]  /     /  작성일21-11-03 22:17  /   조회6,80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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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11 /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② 

 

 

『육조단경』에서 설정하는 ‘불성’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마음[自心]’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성품[自性]’으로 귀결시키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성품[世人性]’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특히 『단경』에서는 자신 이외의 ‘다른 부처[他佛]’에 귀의하지 말 것을 지극히 강조하는데, 이는 사조師祖인 도신道信이 입도入道의 방편方便으로 설정한 염불念佛과 좌선坐禪의 형식적인 틀을 과감하게 부수는 파격을 보이고 있다.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도신의 선사상에서 ‘방편’을 걷어내고 그 핵심을 바로 설시設施하고 있다고 하겠다. 도신의 ‘오문선요五門禪要’는 바로 ‘심체心體’와 ‘심용心用’을 ‘앎[知]’으로부터 출발하여 ‘수일불이守一不移’로 귀결시키고 있으며, 그를 계승한 홍인弘忍은 그를 구체적으로 ‘수본진심守本眞心’으로 설한다.  

 

더욱이 『최상승론最上乘論』에서는 “자심이 본사가 됨[自心爲本師]”, “자심이 저 부처를 염하는 것보다 수승함[自心勝 念彼佛]”을 논하고, 나아가 “수본진심은 타불他佛을 염念하는 것보다 수승하다.”(주1)라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단경』에서 ‘자심’을 ‘불성’으로 설정하여 “다만 너희의 ‘자심’으로, 다시 다른 부처는 없음[只汝自心, 更無別佛]”을 강조한 것은 바로 동산법문을 계승하여 사상적인 향상向上을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사실상 『단경』에서 시설하고 있는 ‘불성’에 대한 논의는 결코 간단하지 않으며, 결코 쉽게 방하착放下著할 수 없는 미묘한 내재적 논리를 함축하고 있어 그것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성’, ‘자심’, ‘세인성’으로서의 ‘불성’에 대한 깨달음을 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단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법에는 돈頓·점漸이 없지만, 사람에게는 예리함[利]과 둔함[鈍]이 있다. 어리석으면 ‘점’을 권하고, 깨달은 사람은 돈수頓修한다. 자신의 본심을 안다면 본성本性을 보는 것이고, 깨닫는다면 바로 차별이 없지만, 깨닫지 못한다면 기나긴 겁劫에 윤회輪迴한다.(주2)

 


육조혜능대사 

 

본래 정교正敎에는 돈·점의 구분이 없으며, 다만 인성에 예리함과 둔함이 있을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점수漸修하며, 깨달은 사람은 ‘돈수’한다. 만약 스스로 본심을 깨달아 스스로의 본성을 본다면, 바로 차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돈·점은 모두 이름을 빌려 세운 것이다.(주3)

 

이로부터 『단경』에서는 깨달음에 있어서 돈오頓悟와 점오漸悟를 모두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성’이 있다는 불성론에 입각한 것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원칙론일 뿐으로 『단경』에서는 ‘점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여 ‘돈오’의 입장에서 본다면 ‘점오’를 통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것은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고 하겠다.

 

궁극적인 깨달음에 있어서 ‘돈오’인가 ‘점오’도 가능한가에 대한 ‘돈점논쟁’은 ‘돈오’를 처음으로 제창한 도생道生의 시대에 있어서 이미 발생했던 문제이다. 그를 모두 소개하는 것은 짧은 지면에 가능하지 않지만, 도생의 ‘돈오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령운謝靈運의 다음과 같은 문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석씨釋氏의 논論에서 성도聖道는 비록 멀지만 배움이 쌓이면 능히 이를 수 있고, 쌓임이 다하면 생生을 비추므로 마땅히 점오漸悟가 아닌 것이다.  ……  새롭게 논하는 도사가 있어, 고요히 비춤이 미묘하여 단계[階級]를 허용하지 않고, 학學의 쌓임은 끝이 없는데 어찌 스스로 끊겠는가?(주4)

 

이로부터 사령운은 석존은 비록 적학積學, 즉 ‘점오’의 방식을 취하였지만, 궁극적인 깨달음에 있어서는 결국 ‘점오’가 아니라 ‘돈오’임을 논하고, 도생의 ‘돈오’에서는 단계를 허용하지 않으며, 적학積學을 부정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도생이 논한 대표적인 ‘돈오’를 설명하는 구절에서 보다 명확해진다.

‘돈頓’이라 하는 것은 이치를 나눌 수 없음[理不可分]을 밝힌 것이고, ‘오悟’는 지극히 비춤[極照]을 말한다. 불이不二의 깨달음으로 나눌 수 없는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치[理]와 지혜[智]가 함께 희석됨을 ‘돈오’라고 한다.(주5)

 

도생이 ‘돈오’를 도출하는 과정은 바로 법성法性과 반야般若의 관계 문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법성은 ‘이理’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것이며, 나아가 그 ‘이’와 우리 존재의 주체와 관련된 탐구의 과정에서 ‘돈오’를 도출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이’는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세상, 즉 제법을 의미하며, ‘지’는 바로 반야지般若智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소所[대상]’를 의미하고, ‘지’는 ‘능能[주체]’에 해당되며, 그것이 함께 희석[兼釋]되는 상태를 ‘돈오’라고 칭함을 유추할 수 있다. 이로부터 ‘돈오’는 바로 나와 남, 즉 능소能所가 ‘불이不二’, 혹은 ‘여일如一’의 상태에 이르고, 그 궁극적인 자리에서 비춤[極照]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결국 사령운이 말한 바와 같이 ‘단계’나 ‘적학’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무엇인가 배우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배우려는 주체, 즉 ‘능’이 현현하여야 하고, 그렇다면 당연히 배우는 대상, ‘소’가 현현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오’ 의 입장에서는 단계적인 ‘점오’는 결코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단경』에서는 비록 형식적으로 돈점을 모두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지만, 결국 ‘돈오’를 귀결점으로 삼는다. 그에 따라 “어리석으면 ‘점’을 권하고, 깨달은 사람은 ‘돈수’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점수’하며, 깨달은 사람은 ‘돈수’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내가 홍인弘忍 화상 처소에서, 한 번 듣고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여 진여본성眞如本性을 돈견頓見하였 다. 이러한 까닭에 이 교법敎法을 후대에 유행하게 하여, 도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보리菩提를 돈오하게 하고, 자신의 본성으로 하여금 돈오하게 하려는 것이다.”(주6)라고 설하고, 직접적으로 “자성을 스스로 깨달아[自悟] 돈오돈 수頓悟頓修하는 것이지 점차漸次는 없는 것이다.”(주7)라고 선언한다.

『단경』에서 ‘돈오’에 입각하고 있음은 이른바 ‘계정혜’ 삼학三學 가운데 ‘정혜定慧’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혜’를 규정하고 있다.

 

나의 이 법문은 ‘정혜’를 근본으로 한다. 대중들은 미혹하여 정定과 혜慧가 다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정’과 ‘혜’는 하나의 체體로서 둘이 아닌 것이다. ‘정’은 ‘혜’의 체體이고, ‘혜’는 ‘정’의 용用이다. ‘혜’에 나아갈[卽] 때 ‘정’이 ‘혜’ 가운데에 있으며, ‘정’에 나아갈 때 ‘혜’는 ‘정’ 가운데에 있다. 만약 이 뜻을 깨닫는다면, ‘정’과 ‘혜’를 평등하게 배우는 것[定慧等學]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정’이 먼저 있어 그 후에 ‘혜’가 발휘된다거나 혹은 먼저 ‘혜’가 발휘된 후에 ‘정’이 나타나니 각각 다르다.”라고 말하지 말라. 이러한 견해를 갖는다면 법에 바로 두 가지 ‘상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주8)

 

이러한 ‘정혜’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전통적인 불교에서는 ‘정’으로부터 ‘혜’가 발현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예컨대 남북조南北朝 시기에 출현한 『대지도론소大智度論疏』에서는 삼매三昧를 논하면서 “처음에 ‘정’으로부터 ‘혜’가 발휘됨을 밝힘[初明從定發慧]”(주9)이라고 하고, 선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당대唐代 이통현李通玄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에서도 “정에 의지하여 혜가 발휘됨[依定發慧]”(주10)를 제창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단경』이 출현한 이후인 송대宋代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까지도 “정으로부터 혜가 발휘됨이 사事를 인하여 이치를 드러냄[從定發慧, 因事顯理]”(주11)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단경』에서는 명확하게 ‘정혜등학定慧等學’을 제창하고 있다. 여기에는 북종 신수神秀의 ‘종정발혜從定發慧’의 입장(주12)을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다고 하겠다.

 

사실상 ‘정혜등학’의 제창도 명확하게 ‘돈오’의 입장에서 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도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법계일상法界一相’을 강조하였는데, ‘정’과 ‘혜’가 각별하다면 일법一法에 이상二相이 되어 버리고, 그렇다면 ‘돈오’의 입장과도 괴리가 발생하게 된다. 후에 논하겠지만, 명대明代 왕수인王 守仁이 『단경』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양명학陽明學을 일으키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제창하는데, 이 ‘지행합일’의 사유 양식은 바로 ‘돈오’를 바탕으로 한 ‘정혜등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단경』은 철저하게 ‘돈오’의 입장에서 전체적인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단경』에서는 이러한 ‘돈오’에 도달하는 수행법을 과연 어떻게 시설하고 있을까? 이른바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 無住’의 삼무三無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에 이를 고찰하고자 한다.

 

주)

(주1) [唐]弘忍述, 『最上乘論』(大正藏48, 377b), “守本真心勝念他佛.”

(주2)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c),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即漸勸, 悟人頓修. 識自本心, 是見本性, 悟即原無差別, 不悟即長劫輪迴.”

(주3)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3a), “本來正教, 無有頓漸, 人性自有利鈍. 迷人漸修, 悟人頓修. 自識本心, 自見本性, 即無差別. 所以立頓漸之假名.”

(주4) 謝靈運, 『辯宗論諸道人王衛軍問答』, [唐]道宣, 『廣弘明集』 卷18(大正藏52, 224c-225a), “釋氏之論, 聖道雖遠, 積學能至, 累盡鑑生, 不應漸悟. …… 有新論道士, 以爲寂鑑微妙, 不容階級. 積學無限, 何爲自絶?”

(주5) [唐]慧達, 『肇論疏』(卍續藏54, 55b), “夫稱頓者, 明理不可分, 悟語極照. 以不二之悟符不分之理. 理智兼釋, 謂之頓悟.”

(주6)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51a), “我於忍和尙處, 一聞言下大悟, 頓見眞如本性. 是故將此敎法流行後代, 令學道者頓悟菩提, 令自本性頓悟.”

(주7)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58c),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주8) 앞의 책(大正藏48, 352c), “我此法門, 以定慧為本. 大眾勿迷, 言定慧別. 定慧一體, 不是二. 定是慧體, 慧是定用. 即慧之時定在慧, 即定之時慧在定. 若識此義, 即是定慧等學. 諸學道人, 莫言先定發慧, 先慧發定, 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38b), “我此法門, 以定惠為本. 第一勿迷, 言惠定別, 定惠體一不二. 即定是惠體, 即惠是定用, 即惠之時定在惠, 即定之時惠在定. 善知識! 此義即是定惠等. 學道之人作意, 莫言先定發惠, 先惠發定, 定惠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

(주9) [南北朝]慧影初撰, 『大智度論疏』 卷6(卍續藏46, 804a).

(주10) [唐]李通玄, 『新華嚴經論』 卷23(大正藏36, 874c).

(주11) [宋]延壽述, 『萬善同歸集』(大正藏48, 965b).

(주12) 『大乘無生方便門』(大正藏85, 1274b),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정定이라 하고, 지智라 하며, 이理라 한다. 이근耳根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색色이라 하고, 사事라고 하며, 혜慧라고 한다. 이 움직이지 않음은 정定으로부터 혜慧가 발휘되는 방편인 것이다.[心不動是定, 是智, 是理。耳根不動是色, 是事, 是慧. 此不動是從定發慧方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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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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