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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구산선문의 최초 사찰 멋진 난야蘭若의 공간으로 다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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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1 년 11 월 [통권 제103호]  /     /  작성일21-11-03 21:36  /   조회3,69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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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13 / 장흥 가지산 보림사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으로 내려가면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에 있는 가지산迦智山을 만난다.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면 육지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지만,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간다고 보면, 한반도에서 위로 올라가는 출발점이 된다. 신라의 도읍지인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보면, 서남쪽 멀리 변방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에는 이곳이 무주武州 지역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로 창건된 절이 현재의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이다. 

 

오늘날에도 보림사는 한국 불교역사에서 선종의 최초 사찰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역사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역사적 원류를 보건데, 보림사는 가지산파의 3조祖인 체징體澄(804-880) 선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신라에서 남종선을 최초로 연 이는 당나라로 건너가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도의道義(道儀 ?-?, 도당 유학: 784-821) 화상이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도당 신라승들이 많이 찾아간 오대산으로 먼저 갔다. 오대산은 중국 화엄도량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런 점에서 처음에는 그도 화엄종의 승려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 후 그는 광부廣府 즉 광주부廣州府의 보단사寶壇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한다. 조영록 선생은 그 보단사를 6조 혜능慧能(638-713) 선사가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설한 광동성 소주韶州의 대범사(大梵寺=開元寺=報恩光孝寺=大鑑寺)라고 비정한다.

 

 

 사진 1. 보조선사 체징의 비와 탑.

 

아무튼 그는 장장 37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중국 전역을 다니며 화북의 교종과 북종선도 보고 남방에서 혜능선사가 주석하였던 조계산曹溪山의 보림사寶林寺를 방문하고 건주虔州 공공산龔公山의 보화사寶華寺에 주석하고 있던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 선사 문하로 들어가 법을 전수 받아 남종선의 정통 법맥을 이어받았다.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 선사 등 당대의 여러 선장들을 만나며 남종선을 수행한 다음 신라로 귀국하여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설악산에 터를 잡고 지금의 양양 진전사陳田寺에서 남종선을 조용히 전파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신라에서는 아직 남종선이 낯선 것이고 경주의 왕실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화엄종에서는 경전을 중심으로 관법觀法으로 수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어서 신라의 중심에서는 이런 남종선은 마귀의 말(魔語)이라고 하며 배척되고 불신되어 쉽게 수용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그 제자인 염거廉居(?-844) 대사 역시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서 스승의 도맥을 이어 선종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도의선사에게 불법을 듣고자 모여드는 사람들이 산을 가득 메웠고, 염거선사에게 배우고자 모여든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체징선사는 804년 오늘날의 공주 지역인 웅진熊津에서 명망 높은 김씨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19세에 화산花山의 권법사勸法師에게로 출가하여 열심히 정진한 끝에 무리 중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며 가장 뛰어났다. 그는 이렇게 발심 수행한 이후 827년 흥덕왕興德王(826-836) 2년에 오늘날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가양협산加良峽山의 보원사普願寺로 찾아가 그곳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오늘날 이곳에는 광활한 터에 있었던 그 많은 당우들은 모두 사라져서 없고 절터만 남아 있다. 그 후 그는 억성사에 주석하고 있는 염거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그로부터 그 법인法印을 전수받았다.

 

스승에게서 공부한 후 837년에 동학인 정육貞育 화상, 허회虛懷 화상 등과 함께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안고 당나라로 건너가서 선지식을 찾아 전국의 15개 도道를 모두 편력하면서 공부한 결과, 우리나라 조사가 설한 바에 더 보탤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수고로이 이역 땅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드디어 840년 2월에 평로사平盧使를 따라 신라로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화를 펼쳐나갔다. 당시 체징선사의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찾아 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 드디어 무주의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무르게 되니 이때가 헌안왕憲安王(857-861)이 즉위한 이듬해였다.

 


사진 2. 구양순 해서 황보탄비皇甫誕碑.. 

 

헌안왕은 그 해에 체징선사의 높은 경지와 명성을 알고 선문을 열고자 서라벌로 그를 초빙을 하고, 오늘날 전북 고창군 지역인 무주 장사현長沙縣의 부수副守로 있던 김언경金彦卿으로 하여금 차와 약을 선사에게 보내게 하고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체징선사는 출가자의 삶과 혜능선사가 조계산에 들어가 보림사에 머물며 당나라 무태후武太后(690-705)가 그를 초청했을 때에 병을 핑계로 삼아 이를 사양했던 고사를 들어 헌안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도속사道俗使인 영암군靈巖郡 승정僧正 연훈連訓 법사와 봉신奉宸 풍선馮瑄 등을 체징선사에게 보내 왕의 본 마음을 설명하게 하고 거처를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기기를 청하였다. 

 

이에 체징선사는 가지산사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 가지산사는 이미 경덕왕景德王(742-765) 때 당나라와 인도에서 유학하고 월지국에서 중국을 거쳐 신라로 귀국하여 화엄종을 대대적으로 펼치며 큰 역할을 했던 원표元表 대화상이 주석하던 곳이었고, 경덕왕 18년인 759년에 나라에서 이 사찰에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워 사원의 전답을 내리고 대대적으로 물적인 지원을 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유서 깊은 곳에 체징선사가 주석하게 되자 860년 김언경은 제자의 예를 갖추고 그 문하의 빈객이 되어 사재를 내어 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을 주조하여 선사가 머물고 있는 절을 장엄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교敎를 내려 망수望水, 이남택里南宅 등으로 하여금 금160분分과 조곡租穀 2,000곡斛을 내놓아 절을 번창하게 하고, 이 가지산사를 왕의 교서敎書를 작성·공포하는 국왕 직속기관인 선교성宣敎省에 속하도록 하였다. 

 

 

사진 3. 저수량의 해서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망수택과 이남택은 신라 부호 귀족들의 가장 호화로운 집인 금입택金入宅을 말하는데, 당시 서라벌에는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 이 가운데 두 금입택에서 시주한 재산은 답畓 1,333결結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806년 애장왕哀莊王(800-809) 7년 이후부터 불교 도구를 만드는 데 금은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이 당시에 금을 시주하게 한 것이 눈에 띈다. 861년에는 사방에서 물자를 보시하게 하여 절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낙성일에는 체징선사가 친히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왕실과 진골 귀족들이 체징선사를 어느 정도로 숭모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왕실과 진골 귀족들이 선종의 고승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당시의 상황도 짐작할 수 있다. 이때가 되면, 신라의 왕실은 점차 안정을 상실해 갔고 지역에서는 호족들이 선종을 지원하여 불교의 지지를 얻어 가면서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으므로 왕실도 선종의 선사들을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후 체징선사는 자신이 도의선사, 염거선사를 이은 가지산파의 3조임을 분명히 하여 종통을 세우고 제자 영혜英惠 화상, 청환淸奐 화상 등 800여 명을 길러내면서 선종의 종풍을 드날렸다. 880년에 입적하니 나이 77세였다. 883년에 문인 의거義車 등이 행장을 모아 왕실에 비명을 세워 불도를 밝혀줄 것을 청하니 왕이 이에 응하여 시호를 보조普照라고 하고, 탑호를 창성彰聖이라고 하며 절의 이름을 보림사寶林寺라고 지어 내렸다. 이때부터 가지산사의 이름이 보림사로 바뀌었다. 이러한 내용을 적은 비를 884년에 세우니, 이것이 전액篆額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는 「보조선사영탑비普照禪師靈塔碑」이다(사진 1).

 

 

 사진 4. 보조선사영탑비의 전액.

 

이 비는 김영金潁이 짓고, 김원金薳과 김언경이 글씨를 나누어 썼다. 김영은 조청랑朝請郞과 금성군錦城郡 태수太守를 지냈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진성여왕이 왕위를 양위할 시기에 당나라로 사신으로 가서 ‘신라하정표新羅賀正表’와 ‘양위표讓位表’ 등을 올리고 효공왕孝恭王(897-912) 때 돌아온 인물로 문장에 뛰어났고 사신으로도 활약한 인물이다. 890년에 「월광사원랑선사탑비月光寺圓朗禪師塔碑」의 글도 지었고, 897년 이후 실상사 즉 심원사의 「심원사수철화상비深源寺秀澈和尙碑」의 글도 그가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체징선사비의 비문을 보면, 처음부터 앞부분은 김원이 구양순歐陽詢(557-641)·구양통歐陽通 (?-691)풍의 해서楷書로 썼고(사진 2), 7째 행의 ‘선禪’ 자 이하부터는 입조사入朝使로 활동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언경이 저수량褚遂良(596-658)풍의 해서로 썼다(사진 3). 두 사람이 비문을 나누어 쓴 것이 매우 특이하다. 김원은 당시에 오늘날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 미암면美巖面 일대인 무주 곤미현昆湄縣의 현령縣令으로 있었는데, 선림원지禪林院址에 있었던 「홍각선사비弘覺禪師碑」의 비문도 그가 지었다. 체징선사비의 글씨를 새긴 사람은 흥륜사興輪寺의 승려인 현창賢暢이다.

 

전액은 소전小篆에 가까운 전서篆書로 되어 있는데(사진 4), 887년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이 짓고 구양순·구양통풍의 해서로 비문의 글씨를 써서 쌍계사雙磎寺에 세운 「양해동고진감선사비敭海東故眞鑑禪師碑」의 전액에서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쓴 것과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사진 5). 과두문자 등 고문자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연구는 조선시대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 선생에게 와서 전개된다. 그는 그의 문자학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미수체眉叟體’의 글씨를 구사하였다(사진 6).   

 

 

사진 5. 최치원 진감선사비의 전액.


그 후 문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이다. 허목 선생과 김정희 선생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문자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그 법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당시 유행하는 일부 중국 서예가들의 글씨를 베끼며 평생 글씨를 보기 좋게 쓰려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세태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추사 선생의 글씨는 기본적으로 그의 문자학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것이고, 조선의 금석학은 바로 문자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비는 나말여초의 일반적인 석비石碑의 양식에 따른 것으로 현재도 이수螭首, 귀부龜趺, 비신碑身이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비의 글을 지은 사람, 글씨를 쓴 사람, 글씨를 돌에 새긴 사람의 이름이 분명히 밝혀져 있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크다. 이수에는 구름 문양의 판형 위에 9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비신을 받치고 있는 비좌에도 같은 모양의 구름 문양을 새겨 이수와 귀부가 자연스레 연결되듯이 조각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석비의 구조를 아래에서부터 보면, 비를 세우기 위해 땅위에 까는 바닥돌인 하대석下臺石, 그 위에 앉아 있는 거북이 네 발을 내밀고 있는 부분의 부대趺臺, 거북의 등 부분인 귀부, 거북 몸체에 붙어 있는 용의 머리인 용두龍頭, 비문을 새긴 비신을 끼워 세우기 위하여 거북등에 직사각형으로 조각하여 올린 받침대인 비좌碑座, 비좌에 꽂아 수직으로 세우는 비신, 비신의 머리 부분인 이수, 이수의 가운데 정면에 두전頭篆을 쓰는 제액題額으로 되어 있다. 

 

 

사진 6. 허목 척주동해비.

 

 그 옆에는 체징선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승탑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이 당당히 서 있다(사진 7). 승탑은 9세기 신라 하대에 선종이 들어오면서 전국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탑이다. 승탑도 그 구조를 아래에서부터 보면, 기단부基壇部, 탑신부塔身部, 상륜부相輪部로 나뉘는데, 기단부는 탑을 세우기 위해 땅위에 바닥을 까는 지대석址臺石, 그 위에 하대석下臺石 받침과 하대석, 중대석中臺石 받침과 중대석, 상대석上臺石 받침과 상대석이 차례로 쌓아진다. 이렇게 기단부가 만들어지면 그 위에 탑의 몸통인 탑신을 올리고, 다시 그 위에 이를 덮는 지붕돌인 옥개석屋蓋石을 올린다. 지붕돌 위에는 석탑의 경우와 같이 상륜부가 만들어지는데, 상륜부는 받침인 노반露盤, 그 위에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寶珠의 돌로 조각한 장식이 수직으로 올라가며 쌓아진다.

 

지금 남아 있는 승탑 중에 진전사에 있는 도의선사탑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승탑으로 간주되는데(사진 8), 제작 연도가 분명히 밝혀진 승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그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승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 전시공간에 서 있다. 법맥으로 볼 때, 보림사에 있는 체징선사의 승탑도 그 다음 것이니 현존하는 승탑 중에서 오래된 것으로 가치가 높다. 도의선사탑은 석탑의 기단에 팔각의 탑신과 팔각의 지붕돌을 쌓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염거선사탑이나 체징선사탑은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승탑의 양식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것이다.

 

보림사는 그 후 여러 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면서 고려시대 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찰로 발전하였고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사찰로 유지되어오다가 1950년 6·25전쟁 때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다가 도주하기 전에 불을 질러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 없어졌고, 천왕문天王門, 사천왕四天王, 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불타 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된 중층팔작重層八作 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쪽에 협시불을 안치하였다. 이후 근래에 와서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보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옮겨왔다. 현재의 대웅보전도 원래의 모습대로 중층의 팔작지붕으로 복원하여 건립한 것이다(사진 9).

 

 

사진 7.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호). 

 

일주문은 공포를 여러 개 얹어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다. 정면에는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라고 새로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안쪽에는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라고 큰 글씨로 쓴 현액이 걸려 있다. 이 현판에는 순치順治 14년에 예조禮曹 수어청守禦廳 양사첩액兩司帖額이라는 글자와 옹정雍正 4년 3월 시행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즉 효종 8년 1657년에 국가가 수호하는 사찰로 되고 영조 2년 1726년에 이를 시행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보림사는 조선시대 효종 때 국가수호사찰로 정해져 영조 때 시행된 절이다. 그 현판 아래에는 ‘외호문外護門’이라는 작은 현액이 걸려 있다. 이 두 개의 원래의 현판은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고, 현재 걸려 있는 것은 다시 제작하여 단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사천문四天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천왕문을 만난다(사진 10). 이 천왕문은 석등, 대적광전, 천향각의 건물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대웅보전은 이 일직선과 직각을 이루는 방향에 놓여 있다. 대웅보전에서 보면, 앞마당의 왼쪽에 천왕문이 있고 오른쪽에 대적광전이 있다. 매우 특이하다. 천왕문 안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1780년(정조 4)에 조성된 국내 목각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최근 중수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나 복장 속의 비장품은 도굴꾼들에 의하여 이미 파괴되었다고 한다.

 

 

사진 8.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보물 제439호) 

 

대적광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쌍으로 동서로 나란히 서 있고 그 두 개의 석탑 사이에 석등이 서 있다. ‘쌍탑 1금당’의 가람배치에서 그 문법대로 석등이 놓여 있다. 삼층석탑과 석등은 모두 870년 경문왕景文王(861-875) 10년에 건립된 것으로 국보이다. 다만 석등이 양탑 사이로 일직선상에 서 있는 것이 특이하다(사진 11). 어쩌면 처음에 세운 석등이 없어지고 나중에 석등을 세우면서 양탑 사이에 세웠거나 아니면 이후 석등을 옮기면서 이렇게 배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탑1금당’의 가람배치에서는 석등이 탑 앞에 놓이고 탑 뒤에 불전佛殿이 있다. 탑이 없는 곳에는 불전 앞에 바로 석등을 세우기도 한다.

 

석등의 일반적인 구조는 아래에서부터 대좌부臺座部, 화사부火舍部, 상륜부相輪部로 구성되어 있고, 대좌부는 석등을 세우기 위해 땅위에 까는 기반돌인 지대석, 그 위에 기대석基臺石, 연꽃잎을 아래로 향하게 조각한 복련석伏蓮石, 그리고 그 위에 세우는 기둥돌인 간주석竿柱石, 그 위에 복련석과는 반대로 연꽃잎을 하늘을 향하도록 조각한 앙련석仰蓮石으로 되어 있다. 화사부는 앙련석 위에 불을 피우는 팔각, 육각, 사각 모양의 화사석火舍石이 놓이고 그 위에 지붕돌인 옥개석이 놓인다. 옥개석 위에 상륜부가 구성되는데, 상륜부는 보주형寶珠形과 보개형寶蓋形이 있어, 보주형은 연꽃 봉오리나 구슬 같은 모양의 보주를 옥개석 위에 올리고, 보개형은 보다 화려하게 보륜, 보개, 보주 등을 올려 장식한다. 이러한 석등도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변하여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사진 9. 보림사 대웅보전 

 

석등은 현실적으로 어두운 절 공간에 불을 피워 사위를 환하게 밝히는 기능을 하는 것이지만, 상징적으로는 불법으로 무명을 밝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붓다의 가르침이 여기에 이르러 있다는 전등傳燈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 불이 등잔불이든 석등의 불이든 붓다의 광명지혜光明智慧가 여기에 있으니 어두운 무명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석등은 불교가 전파된 인도, 중국, 일본 등지에도 있지만, 불교적 상징물로 널리 본격적으로 세워진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래서 불교 건축양식에서 한국을 ‘석탑의 나라’, ‘석등의 나라’라고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설득력이 있는 관점이다.

보림사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승탑과 승탑비, 삼층석탑, 석등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특히 석탑의 상륜부의 장식이 지금까지 훼손됨이 없이 완전하게 남아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이러한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불교 문화재를 보려면 여기에 오면 된다.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좌상은 중생을 의미하는 왼쪽 집게손가락을 법계를 뜻하는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형태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이 좌불은 왼쪽 팔 뒷면에 주조한 내력을 양각의 명문으로 분명하게 새겨놓은 것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명문의 내용에 의하면, 무주武州 장사현의 부관副官 김수종金遂宗이 석가모니 입멸 후 1808년이 되는 858년(大中 12년) 7월 17일에 정왕情王 즉 헌안왕憲安王에게 불상 주조를 아뢰고, 왕이 8월 22일 조칙을 내려 859년에 불상을 만들었다(사진 12). 이는 보조국사비의 내용에 김언경金彦卿이 자신의 재산으로 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상충된다. 

 

 

사진 10. 보림사 천왕문.

 

 

이와 관련해서는 김수종과 김언경은 동일한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보림사 양 탑의 탑지塔誌에 경문왕 10년 870년에 왕이 헌안왕의 왕생극락을 위하여 탑을 세웠으며, 지금의 청주 지역인 서원부의 소윤으로 있는 김수종이 왕의 칙명을 받들어 한 것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김수종이 860년에는 철불을 주조하여 시주하고, 870년에는 왕의 명을 받아 석탑을 세운 사람인 것이 맞으므로 김언경이 나중에 비문을 쓸 때 철불을 주조하여 시주한 사람을 자기로 바꾸어 썼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른 경우에는 볼 수 없는, 비문의 글씨를 김원과 김언경이 나누어 쓴 것에 필히 어떤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의문을 가져보면, 김언경이 비문을 쓰면서 내용을 개작한 것이라는 가설도 가능하다고 보인다.

 

비로자나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을 의미하는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한 말로 비로사나毘盧舍那, 노자나盧遮那, 비로절나鞞嚧折那, 폐로자나吠盧遮那, 자나遮那 등으로도 불린다. 이는 발음에 따른 음역이기 때문에 한자의 의미는 별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의미에 따라 번역한 말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는 말이 있다.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비로자나, 노사나, 석가모니를 각각 보편적 진리로서의 부처의 모습을 말하는 법신法身(dhārma-kāya), 법신은 반드시 보신으로만 나타난다고 하는 과보와 수행의 결과로 주어지는 부처의 모습인 보신報身(vipakakāya), 중생 구제를 위하여 구체적인 상황에 맞추어 그때그때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는 부처의 모습인 응신應身(化身, nirmā)에 해당하는 부처로 보는데, 이 셋은 결국 동일한 부처라고 본다. 

 

 

사진 11. 보림사 쌍탑과 석등.

  

삼신三身이라는 개념은 대승불교시대에 불교의 교리가 철학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하는데, 가운데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좌우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범망경梵網經』에 따르면, 노사나불은 연화대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오른손은 가볍게 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법신인 비로자나불만이 취하는 수인手印인 지권인으로 조각하였다.

 

화마로 보림사의 원래 당우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터에 부족한 자료들을 모아 이를 근거로 당우들을 복원하고 오늘날 멋진 난야의 공간을 만들어 낸 원력에 감동을 받았다. 해가 넘어가는 길에 절을 나서며 보림사가 그 역사적 정체성에 맞게 문경 봉암사와 같이 문을 걸어 잠그고 수행자들이 정진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기원하였다.

 

 

사진 12.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국보 제117호)

 

 여전히 궁금한 것은 신라 하대에 이 땅에 남종선이 들어왔을 때 그 가르침과 수행이 어떠했으며, 승려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하는 점이다. 찬란했던 신라가 중대 이후로 오면서 그간 권력을 쥐고 호의호식하던 무리들은 오랜 세월 왕위쟁탈전으로 날을 지새웠고, 하대에 와서는 농민들이 곳곳에서 못 살겠다며 난을 일으켜 자기 살 길을 찾아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지방의 호족들도 들고 일어나는 등 혼란의 시기로 빠져들었다. 선종이 확산되어 가던 시절의 사바세계娑婆世界 풍경이다.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이 세상이 극락정토라는 것은 더 이상 믿지 못할 거짓으로 드러났고, 이제는 파리 목숨 같은 이 삶이 죽어서나마 극락왕생을 했으면 하는 가느다란 희망만이 살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도피처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지극정성으로 외우면 죽어서 극락왕생한다는 내세신앙에 희망을 걸어보기도 하고, ‘불쌍한 민초들을 구해줄 미륵불彌勒佛이 와서 우리를 구해줄지도 모른다’는, 불교의 원래 철학과는 거리가 먼 ‘믿음’이 불교인양 나타나게 되었다. 기독교도 그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면 메시아주의(Messiahism)에 빠지는 것처럼 이와 유사한 양상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 지점이 진리와는 거리가 먼 ‘종교’라는 것의 본질인지도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이는 너무나 황당한 것이리라.

 

신라 하대에도 사람 사는 세상이 이런 불안한 시대로 빠져들자 결국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불교나 도교 등의 교설과 합쳐져 기승을 부리고 아예 인간의 미래를 예언한다는 도참설圖讖說까지 날뛰게 되었다. 궁예弓裔(857?-918)가 반란을 일으키며 자신이 미륵불이라고 하고 도참을 들고 나와 세상을 현혹한 것도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런 인간의 문제 앞에서 불교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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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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