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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탄생과 병고, 그리고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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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21 년 11 월 [통권 제103호]  /     /  작성일21-11-03 10:55  /   조회3,86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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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암당 고우스님의 수행 이야기① 

 

 

은암당 고우 큰스님은 평생을 수행자로 살아오신 선지식으로, 1968년 십여 명의 수좌들과 뜻 을 모아 문경 희양산 봉암사로 들어가 ‘제2의 봉암사 결사’를 꿈꾸며 수좌원융살림을 일구어 종립 태고선원의 기틀을 다지셨습니다. 1987년에는 도반 적명스님과 함께 선납회禪衲會(현 전국선원수좌회)를 창립하고 공동대표를 맡아 수행가풍 진작을 위해 헌신하셨고, 해인총림에서 5백여 명의 수좌들과 함께 ‘선화자법회’를 열어 선풍 진작을 위해 진력하셨습니다. 


특히 스님께서는 성철스님의 『백일법문』과 『선문정로』를 보시고 선의 종지와 돈오돈수에 대하 여 정안正眼을 갖추게 되셨다고 밝히고, 수행자와 불자들에게 『백일법문』을 권장하시며 성철스님의 중도사상을 선양하는 데 앞장스셨습니다. 큰스님의 삶과 수행을 조명하기 위해 박희승 교수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고향 성주와 폐결핵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은암당 고우스님은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12월 30일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에서 의성 김씨 가문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성주군 용암면에 거주하였지만, 증조할아버지 대에 인근 고령군 운수면으로 이주하여 스님은 그곳에서 나고 자라게 되었다.

부모님은 스님의 이름을 김정완金丁浣이라 지었지만 면사무소 호적 담당자의 실수로 호적상의 이름은 김정원金丁院으로 되었다. 당시 이름을 고치는 절차가 복잡하여 주민등록에도 김정원으로 되었고, 그것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스님께서 태어난 시대는 일제강점기로 우리 민족에게는 고난의 시절이었다. 스님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의 할아버지가 모두 면장을 지낼 정도로 지역 유지여서 풍족하지는 않아도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집안 어른들의 남다른 교육열로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8.15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조상들이 살던 성주로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사진 1. 환한 미소가 일품인 은암당 고우스님.

 

 

스님의 부친께서는 친구와 술을 좋아하고 노름판에 어울리느라 가정을 소홀히 하였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을 살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하실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고충도 모르고 어머님께 많이 응석을 부리고 의지하였다. 뒷날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어머님이 가끔 “내가 너희 집에 시집와서 평생 고생만 한다.”라고 하시던 말씀을 떠올리시곤 하셨다. 시집와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키우셨음에도 평생 ‘너희들 집’이라 하시며 객客처럼 사시다가 일찍 가신 어머님의 삶을 안타까워하시곤 하셨다.

 

스님 위로는 형님이 두 분 계셨는데, 둘째 형님이 똑똑하였으나 광복 뒤 진보운동을 하다가 전쟁이 나고 행방불명이 되었다.[스님께서 대중 생활을 하실 때 어른 스님들이 고우 스님에게 “스님 사상이 좋다.”라고 하셨는데, 그때는 그 말뜻을 몰라 ‘내 형님이 좌익운동한 것을 알고 저러시나?’ 하고 마음을 졸였다고 하셨다.]  

 

스님 집안은 늘 개를 키웠는데, 스님께서도 어려서부터 개를 좋아하였고 노년에 금봉암에서도 반려견을 키우며 살뜰하게 보살피셨다. 어릴 때 어머님께서는 “야야, 집에 키우는 개도 함부로 대하지 말거라. 우리가 함부로 하면 남들은 더 박대한다.” 하셨는데, 어머님의 그 말씀을 ‘가까운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으로 새겨 법문하실 때 가끔 인용하셨다. 

 

 

사진 2. 2007년 중국 선종사찰 순례 시 육조 혜능대사의 교화도량인 남화선사 조계문 앞에서 고우스님과 필자.

 

 

 스님은 신문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기도 하고 문학소년의 꿈을 키우기도 하셨다. 시골이었지만 당시 집에서 신문[‘동아일보’라 하셨다]을 구독하여, 세상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고 연재소설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다. 신문을 보며 익힌 한자가 출가 후 강원에서 경전을 보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던 스님은 이태준의 『문장강화』라는 책에 매료되어 흉내 내보기도 하고 헤르만 헤세의 『싯타르타』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성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스님은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남들이 공군이 편하다고 하는 얘기에 자원을 했지만 복무 기간이 36개월로 길었고 그곳에서 모진 고생을 하며 결핵성 늑막염, 흔히 폐결핵이라 불리는 당시로서는 불치병을 얻게 되었다. 군에서 심한 고생을 하다가 폐결핵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제대하였는데, 그때 스님께서 의지하던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어 하늘이 무너지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깊은 슬픔을 겪어야 했다. 

 

수도암으로 출가하다 

 

스님은 군에서 얻은 불치병으로 몸과 마음이 약해졌을 때 의지하였던 어머님마저 갑자기 돌아가시자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절감하고는 삶에 회의가 일어 방황하게 되었다. 1961년, 스물다섯 살의 스님이 병고에 시달리며 방황 끝에 찾아간 곳이 김천 수도산 수도암修道庵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거나 남들처럼 구도 발심으로 절에 간 것이 아니었다. 어머님의 죽음과 병고로 방황하다가 마지막으로 발길이 닿은 곳이 바로 수도암이었다.

 

지금 수도암은 이름난 선원이고 길도 잘 닦여 있고 불사도 크게 하였지만, 스님이 출가할 당시에는 마을에서 수도암 가는 길조차 없었다. 그래서 청암사靑巖寺 극락전에서 오솔길로 걸어서 올라갔다. 수도암은 참으로 깊은 암자였다.[스님께서는 입적하시기 몇 달 전에 상좌들과 마지막으로 수도암을 참배하셨다.]

 

수도암에 가니 은사 되는 법희法喜 스님이 주지로 계셨다. 법희스님은 직지사가 본사로 은사가 직지사 주지 봉인스님이었다. 봉인스님의 은사는 역시 직지사 주지를 지낸 퇴운원일退雲圓日(1877-1939) 스님이다. 퇴운스님은 근세에 유명한 제산정원霽山淨圓(1862-1930) 선사의 사제 되는 분이니, 제산스님과 법형제로 은사가 사명대사의 법맥을 이은 해인사 우송友松 스님이다. 퇴운스님은 지금 직지사에 비가 세워져 있다. 한암스님이 지은 퇴운원일선사비문에 “평소에 근검 절약하였고, 시주물을 아끼고 보호하여 논 100여 석을 사들여 그 세수로 선원의 양식으로 삼았는데, 임종 시에 유언하기를 이것을 다른 데에 쓰지 말고 선방 수좌들의 양식으로만 삼아라.”라고 한 분이시니, 그 신심과 원력을 알 수 있겠다. 스님은 여기서 법희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혜운慧雲’이라는 법명을 받아 행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 고우스님의 법맥法脈은 법희-봉인-퇴운원일-우송…사명-서산…태고보우국사로 이어지는 것이다.

 

수도암 행자 시절과 사미계 수지

 

그렇게 스님은 1961년 25세에 수도암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불교를 알고 발심해서 출가한 것이 아니라 폐결핵에 걸리고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어서 방황하다 절에 온 것이었다.

스님께서 행자 생활할 때 수도암은 건물도 많지 않고 선방조차 없었다. ㄱ자형으로 40평 되는 인법당과 옆에 세 칸짜리 요사채와 후원채가 전부였다. 마당에 연못이 있었는데 참 보기 좋았다고 한다. 

 

가끔 해인사 스님들이 해인사와 청암사로 통하는 산길을 통해 가야산을 넘어 걸어왔다. 그때 보성스님, 법전스님 등 몇 분이 수도암으로 와서 강냉이 따서 죽 쑤어먹고 그러는 것을 보았다. 보성스님의 은사인 구산스님이 수도암에서 정진하셨고, 그때 보성스님이 시봉했다고 한다. 훗날 해인사 방장과 종정에 추대된 법전스님은 1969년에 수도암을 맡아 중창불사를 해서 1975년에 선원도 열고 지금의 수도암을 만드셨다.

 

 

사진 3. 김천 수도암 전경. 고우 스님은 1961년 25세의 나이로 수도암으로 들어가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수도암 행자 생활 중에 스님은 직지사直指寺로 가서 관응觀應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관응스님은 당시에 이미 대강백으로 이름난 분이었다. 그때 수계 도반으로 설악산 영시암을 중창한 도윤스님을 만났다. 도윤스님은 은사가 관응스님으로 고우스님 보다 나이가 여섯 살 많았지만, 노년까지 교류한 도반이었다. 도윤스님은 경북 선산 출신으로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당숙이었던 김동화金東華 동국대 교수의 소개로 속리산 복천암에서 강의하던 관응스님 문하로 출가하였다. 뒤에 관응스님이 직지사로 오시자 따라와서 함께 사미계를 받았다.

 

청암사 강원 시절

 

스님이 출가한 다음 해인 1962년에 수도암과 직지사를 오가던 스님들이 수도암 아래 청암사를 정화해서 강원으로 만들자고 뜻을 모으게 된다. 당시 청암사는 대처승들이 처자식을 거느리고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청암사 강원은 청암사 극락전에서 공부했는데, 고봉스님이 강주, 우룡스님이 주지, 고산스님이 총무, 고우스님은 학인이면서 재무를 맡았고, 학인은 7~8명 되었다. 지금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대원스님, 해인사 율주를 지낸 종진스님, 종하스님 같은 분들이 학인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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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20여 년간 종무원 생활을 하다가 고우 스님을 만나 성철스님 『백일법문』을 통독하고 불교의 핵심인 중도에 눈을 뜬 뒤 화두를 체험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불교인재원에서 생활참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유튜브 생활참선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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