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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근대기 대표하는 사회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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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1 년 4 월 [통권 제96호]  /     /  작성일21-04-05 11:41  /   조회4,34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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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4/양계초梁啓超 상上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중국 근대를 대표하는 계몽가이자 사상가이다. 중국 근대 많은 사상가들, 강유위(康有爲, 1858-1927), 담사동(譚嗣同, 1865-1898) 등 당시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양문회(楊文會, 1837-1911)의 제자로서 불교 연구에 몰두하였고, 양계초도 이러한 흐름에 속한 인물이었다. 양계초를 불교 사상가로 위치지우는 것에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는 1920년대에 『청대학술개론』 등을 포함하여 십여 편의 불교 저술을 하였고, 그의 계몽 활동을 지지하는 응용 철학으로서 일찍부터 작용하였다. 양계초의 불교 사상에 대한 연구도 최근에 많이 이루어지고 있고, 근대적 불교학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만큼 그를 불교사상가로 파악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고 보여진다. 

 


사진1. 젊은 시절의 양계초

 

양계초는 1873년에 중국 광동성에서 태어났다. 6세에 할아버지와 어머니 슬하에서 사서四書와 『시경詩經』을 배웠으며 8살 전에 오경을 독파했다. 12세에 수재 시험에 합격하고 18세에 거인이 된, 어린 시절부터 신동이라 불리는 명민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양계초가 소년 시절을 보낸 중국의 1870년- 80년대는 아편전쟁을 겪은 뒤 중국의 정치나 사상은 유지하면서 서양의 군사기술을 배우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전개되던 시기이다. 양계초 역시 그 시기의 다른 중국 청년들처럼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읽으며 과거를 위한 공부를 하다가 18세의 양계초는 당시 광서제에게 변법(變法. 제도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는 강유위(康有爲, 1858-1927)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까지 훈고학과 사장학에 몰두했던 양계초에게 강유위는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청산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리고 양명학과 함께 개략적인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양계초는 비로소 “생애 처음으로 세상에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강유위의 삼세설과 무술변법운동

 

양계초의 스승인 강유위는 유가 사상을 이용하여 제도개혁을 주장했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는 것이 당시 중국을 구제할 길이라고 생각하고, 공자의 『춘추春秋』가 실은 미래의 제도개혁을 위해 쓴 책이라고 주장하였다. 강유위의 주장에 의하면, 공자는 세상이 거란세據亂世에서 승평세升平世로 진화하고 승평세에서 대동세大同世로 진화한다고 예언했으며, 사람은 그 시대의 변화를 알아채고 각각의 세상에 맞는 제도로 개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삼세설三世說에 의하면, 거란세는 군주제의 시대이며 승평세는 입헌군주제, 대동세는 민주제의 시대이다. 강유위는 당시 중국을 승평세라고 판단했으며, 따라서 중국은 군주제를 청산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보았다. 강유위는 이같은 주장을 광서제에게 상소로 올렸다. 광서제가 강유위와 함께 도모한 개혁이 바로 1898년의 무술변법운동戊戌變法運動이다.

 

양계초는 일본 망명 전에 강유위 변법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양계초는 평생 한 가지 견해를 고수하지 않고 시대에 따라 사상적· 정치적 입장이 크게 변화한 사상가였다. 이는 당시 격변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중국에 알맞은 사상이나 제도 등을 모색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 단계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나누어볼 수 있다. ① 1896-1898년: 변법 시기 ② 1901-1903년 초반: 서양 문명 수입 시기 ③ 1903후반-1918년 개명전제의 시기 ④ 1919-1929년: 유학의 현대화 시기. 양계초의 역사 인식은 공양파의 춘추삼세설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춘추삼세설은 변법운동의 사상적 기초였다. 역사가 거란據亂 → 승평升平 → 대동大同의 순서로 발전하며, 각 시대마다 적절한 정치 제도를 채용하는 것이 공자의 뜻이며 현재의 중국은 승평의 정치인 입헌군주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 강유위의 삼세설이었다. 

 

양계초는 처음에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일본 망명 이후 일본어로 번역된 수많은 서양 사상서를 읽으며 점차 강유위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그리하여 승평의 경쟁 시대를 거쳐 배타적 욕망과 경쟁이 사라지는 대동의 세계로 진화한다고 본 강유위의 삼세설에 반대하고, 당시를 민족주의에서 민족제국주의 시대로 이행하는 시기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기초는 양계초가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과 관련이 있다.

 

양계초와 불교사상

 

실제로 양계초가 불교를 처음 접촉한 것은 1891년 강유위의 만목초당에서 공부하며 불경을 읽었던 때이다. 그는 강유위에 대해 “양명학에서 불교로 들어갔다. 따라서 선종에서 가장 많이 얻었고, 화엄종을 귀결점으로 삼았다”고 하여, 강유위가 화엄종을 숭상하고 선종의 경향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또 하증우(夏曾佑, 1865-1924)가 담사동과 양계초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변법운동을 형성하며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진여생멸 두 문의 상황에 대해 불교에는 견해가 있는 것같았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크게는 인사가 누적되고 오랫동안 육근이 시키는 대로 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했으며 나아가 타락할까 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여, 출가를 희망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하였다. 이것은 불교 사상을 통해 무량세계를 구하고자 한 의도와 연관된 것이다. 

 

 

사진2. <불학연구십팔편>, 천진고적출판사, 2005, 양계초가 불교에 대해 쓴 중요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중국의 패배는 양무운동의 파산을 선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은 새로운 자구책을 모색해야 했는데, 강유위가 주도하는 변법파가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양계초는 강유위를 도와 변법운동의 중앙에 서서, 1895년부터 변법을 추진하는 거인들의 모임인 강학회强學會의 서기가 되어 활동했으며, 1896년에는 『시무보時務報』라는 잡지의 주필을 담당하면서 변법을 설명하고 선전하는 글인 「변법통의變法通議」를 연재하였다. 그러나 1898년 광서제의 결단에 의해 탄생한 변법정부는 서태후를 필두로 하는 보수파의 반격으로 100일 만에 무너졌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일본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동지였던 담사동은 망명을 거부하고 “중국 개혁을 위해 피를 흘리는 자, 나로 시작하리라.”는 말을 남기고 기꺼이 수구파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양계초는 동지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자신은 사회 개혁을 위해 또 다른 방법을 쓰겠다고 결심하였다. 

 

일본 망명 후의 활동

 

일본에 망명한 양계초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청의보淸議報』를 창간하여 왕성한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1896년의 『시무보』부터, 1898년의 『청의보』, 1902년에 창간해서 1907년까지 계속된 『신민총보新民叢報』 시절이, 중국인에 대한 양계초의 영향력이 가장 극대화된 시기였을 것이다. 그 잡지에 실린 양계초의 글을 통해, 헌법, 정당, 화폐제도, 학교제도, 인재선발제도 등의 근대 정치 제도를 비롯해, 데카르트, 루소, 칸트 등의 근대 철학자까지 서양의 새로운 사상들이 중국에 전해졌다. 새로운 중국을 건설할 중국 청년들, 호적胡適, 주작인周作人, 고힐강顧頡剛, 노신魯迅, 진독수陳獨秀, 모택동毛澤東 등은 물론 한국의 근대 사상가들도 양계초의 글을 읽고 새로운 세계의 꿈을 키웠다. 일본은 서양의 사상과 성취들을 왕성하게 번역하여 전달하였고, 위로부터의 정치적 개혁을 통해 이삼십 년 안에 일본식 근대를 선보였다. 일본에 망명한 양계초는 식지 않는 구국열과 타고난 영민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순발력으로 몇 년 안에 광범위한 사상들을 편력하며 그것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국체國體 문제에서는 현상을 유지하면서 정체政體 방면에서 이상의 실현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현존의 국체를 유지한다는 것은 혁명이 자신의 사업은 아니라는 것이며, 정체 방면에서 이상의 실현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상은 공화제로 두더라도 반드시 현재 상태에서 공화정을 추구하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진3. 젊은 시절의 양계초

 

무술변법시기의 그의 정치적 주장은 스승 강유위와 공유하는 것으로서 입헌군주제의 수립이었다. 일본에 망명 후 '신민설'을 통해 전개된 그의 입장은 공화제에 가까운 것이었다. 실제로 민주공화제의 수립을 추구하는 혁명파와 접근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곧 그는 다시 입헌군주제의 입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발 더 후퇴해 중국인들이 공화국의 국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출 때까지 개명된 군주에 의한 전제를 채택하자고 까지 주장했다. 역시 일본에 근거지를 두고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발족시킨 혁명파와 대결할 시기, 즉 1905년을 전후해서 양계초의 계몽가로서의 주도권은 혁명파에게 넘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양계초는 개명군주제를 주장하는 보수로 전락했으며, 실제로 중국은 신해혁명을 거쳐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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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석·박사 졸업.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초빙교수를 지냈다. 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조계종 불학연구소 전문연구원 역임. 『웅십력 철학사상 연구』, 『신유식론』,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등 다수의 저서 및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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