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도, 깨달음의 경계 바로 직접 현시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불화의 세계]
달마도, 깨달음의 경계 바로 직접 현시


페이지 정보

이은희  /  2021 년 4 월 [통권 제96호]  /     /  작성일21-04-05 10:20  /   조회4,882회  /   댓글0건

본문

선종화의 대표적 소재로 심우도와 달마도가 있다. 심우도가 깨달음의 과정을 열 단계로 나누어 각각 보여준다면, 달마도는 깨달음의 경계를 직접적으로 바로 제시하여 보여준다는 점이 차이라고 하겠다. 선禪 미술로서의 달마도는 특히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심법心法에 의거하는 선종의 특질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심전심의 법을 전하는 증명의 표시로써 달마도는 그 진수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당대에 형성된 선종은 근원적인 본래심, 즉 불성을 자각하고 그 지혜와 덕성을 일상 속에서 완성하고 전개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장 본질적인 가르침이 선수행이라고 여겼고 이 전승의 출발은 석가모니로부터 시작한다. 첫 번째 조사는 가섭 존자이며 두 번째는 아난 존자이다. 이후 27조 반야다라 존자를 잇는 28조가 바로 달마 대사이다.

 

  남인도 향지국의 태자였던 달마 대사는 인도 28조이면서 중국 초조初祖가 된다. 그로부터 2조 혜가 대사, 3조 승찬 대사, 4조 도신 대사, 5조 홍인 대사에 이르렀고, 홍인에게서 6조인 혜능 대사가 나왔다. 그래서 서천 28조와 동토 6조를 합쳐 33조사를 헤아리고, 이를 지혜의 등불을 잇는 전등傳燈의 정통으로 삼는 전통이 생겨났다. 석가모니로부터 마하가섭에게로 이어진 깨달음이 28대 조사인 달마 조사에 의해 중국으로 이식된 것이다. 

 

  이러한 전등의 초조가 되는 달마 조사를 소재로 하는 달마도가 최초로 그려지기 시작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국 당나라 때인 8-9세기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선승들이 선의 최종 목적이라 할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이르기 위한 실참실수實參實修 수행의 길에서 깨달음의 경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그 계기라고 하겠다. 즉 정진 도중에 법열에 겨워 탈속적 일필휘지를 휘둘렀던 것인데, 이는 선의 황금시대라 일컬어졌던 당·송 대代의 분위기와도 맞아진 것으로 보인다. 수행 과정에서 증득되는 내면의 직관적인 세계가 표현되는 것으로는 달마도만한 것은 없었다. 달마가 전한 선종은 다음의 네 구절을 통하여 뚜렷한 종지宗旨를 알 수 있다.

 

  不立文字  말이나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敎外別傳  경전 밖에서 따로 전하며

  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파악해

  見性成佛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바로 이 메시지가 석가모니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여 체험에 눈뜨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오로지 깨달음으로 향하는 달마의 수행법은 경전에 의존하거나 문자의 풀이를 따라가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단번에 들어가 자기의 본래 모습을 보고 부처가 되는 가르침이었다. 

 

 

2-4-1. 사진 1. 김명국 달마도.

 

 

 우리나라에서 달마도가 그려진 최초의 기록은 『도은집陶隱集』에 전하며 고려 공민왕 때 그렸다는 ‘달마절로도강도’ 이다. 이와 함께 송도의 운거사라는 사찰에 ‘달마화상’이 있었다는 기록이나 이두첨이 그린 ‘달마도’ 등과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달마 화상’ 이나 ‘달마 대사상’이라는 언급을 통해 볼 때 고려시대에 달마도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민왕 때 「달마도」를 그렸다는 기록은 고려시대의 선의 확산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기록만 전할 뿐 현재 전하는 그림이 없어 아쉬움을 더한다. 

 

  이후 우리나라의 선종화로서 최고의 걸작 달마도는 17세기 연담 김명국의 「달마도」(사진 1)라 하겠다. 김명국은 직업화가지만 선승들과 친분이 많았던 불자로 전해온다. 이 걸작의 달마도는 김명국이 일본에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갔을 때 그렸던 것인데 당시 일본에서 인기가 높아 그림 요청으로 밤잠을 못 잘 지경이었다고 『사행록』에 전하고 있다. 

 

 

2-4-2. 사진 2. 경봉 스님 달마도. 

 

 

  이와 함께 조선 중기 화단의 거장인 심사정의 「달마도」와 김홍도가 그린 몇 점의 「달마도」가 현재에 전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와 근대에 이르러 다수의 달마가 그려지고 현재 전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내장사에서 선풍을 일으켰던 백학명 스님의 「달마도」와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셨던 경봉 스님의 「달마도」(사진 2)는 특히 주목된다. 경봉 스님은 달마 그리는 솜씨가 뛰어나셨다. 그림을 배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결과임을 경봉 스님의 「달마도」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불화 단청 인간문화재이셨던 일섭 스님과 만봉 스님의 「달마도」가 있으며 이를 이어서 석정 스님은 다양하고 많은 「달마도」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달마도」는 탱화처럼 그려지고 봉안되기보다는 수행의 일환으로 그려지거나 벽화로 나타내는 경우가 대체적이어서 정형화되어 전승되는 형식이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보살의 경우처럼 예배의 대상으로 추앙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성불할 수 있는 불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전제에서 달마 정신의 표현에 초점이 맞추어지므로 정형성보다 상징성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2-4-3. 사진 3. 해인사 약수암 달마탱. 

 

 그러한 가운데 드물게 탱화의 형식으로 전하는 「달마도」가 있어 주목된다. 먼저 해인사 약수암 「달마탱」(사진 3)을 들 수 있겠다. 이 「달마탱」은 수묵담채의 기법으로 그렸는데 의습을 그린 필선이 불화만 그리는 불모의 솜씨가 아닌 일반미술에 대한 기량도 가진 화사畵師의 그림으로 보인다. 화면 우측의 소나무 아래의 소림굴에서 달마조사가 입설단비立雪斷臂하는 혜가에게 얼굴을 돌려 법을 전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그렸다. 달마 조사와 혜가 사이에 보이는 배경의 파초는 끊은 팔을 파초 잎에 얹어서 바쳤다는 설화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해와 폭포는 장엄으로 배치한 듯하다.

 

  이와 함께 송광사 삼일암 「달마조사탱」(사진 4)은 드물게 볼 수 있는 본격적인 탱화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즉 달마 대사가 소림굴 안에서 성성한 안광을 내뿜으며 불진拂塵을 들고 앉아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화면 우측 상단의 방제方題에는 ‘달마 조사’라고 존상명을 적어 그림 속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으며 하단에는 탱화에서 일반적으로 화기를 적는 형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서 불모 일섭 스님의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아울러 승보사찰 송광사의 품격品格 드러내 주고 있다.

 

 

2-4-4. 사진 4. 송광사 삼일암 달마조사탱. 

 

 

  이러한 「달마도」를 그리는 데에 있어서 그 형식은 대체로 3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사진 1>의 김명국과 <사진 2>의 경봉 스님 「달마도」와 같이 얼굴과 가슴 정도까지만 그리는 흉상이 있으며 두 번째는 좌상으로 주로 벽관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경우는 입상立像이라 하겠다. 첫 번째 경우인 흉상은 달마의 얼굴이 초점이 되어 안광眼光을 성성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달마의 기개와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으며 두 번째 좌상은 면벽좌선의 상황이 중점이 된다. 그리고 입상은 「도강도渡江圖」 나 「절로도해도折蘆渡海圖」라는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달마가 갈대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모습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와 함께 많이 그려지는 입상의 소재는 「척리달마隻履達磨」라는 제목으로 그려지는 짚신 한 짝 매단 지팡이를 둘러메고 있는 모습이다. 

 

  현재 한국에 있어서 「달마도」는 벽화로 형상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사찰에서나 채색 벽화로 그려지고 있는데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사진 5)가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언급하였듯이, 달마 대사는 스승이던 반야다라 존자의 열반을 마지막으로 인도 내의 교화를 제자들에게 맡기고 중국으로 건너온다. 당시 양나라의 왕이던 무제를 만났으나 무제는 대사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대사는 그 길로 낙양의 숭산 소림사에서 9년이란 긴 세월 동안 면벽하며 시절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렸다. 

 

 

사진5. 송광사 혜가단비도

 

 

  대사의 말 없는 교화가 9년째이던 어느 해 엄동설한에 유불선의 이치를 통달한 신광神光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법의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면벽한 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신광은 춥고 눈 내리는 긴 겨울밤을 지새웠다. 대사가 하룻밤의 얄팍한 덕으로 지혜를 얻고자 하느냐며 꾸짖자 신광은 칼을 빼어 왼쪽 팔을 잘라 구도 결심의 척도를 보였다. 이에 땅에서 파초 잎이 솟아나 팔을 받쳤고 대사는 신광의 입문을 허락하여 혜가慧可라 하였다. 혜가는 달마 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중국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는 내용을 그린 것이다. 「혜가단비도」는 벽화뿐 아니라 예로부터 회화의 소재로 많이 그려지기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나 위의 내용을 사실적이고 인상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은희
위덕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철학박사). 김해시청 벽화공모전, 전통미술대전 심사위원역임. 미술실기 전서-산수화의 이해와 실기(공저)
사)한국미술협회 한국화 분과위원, 삼성현미술대전 초대작가. 국내외 개인전 11회, 단체 및 그룹전 300여 회.
다수의 불사에 동참하였으며 현재는 미술 이론과 실기 특히, 한국 불화의 현대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은희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