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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다도]
다선일미의 대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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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10:25  /   조회4,72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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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茶道 5 / 센 리큐 2

 

일본 다도의 대성조로 일컫어지는 리큐(千利休1522-1591)의 선다도는 어떤 것일까. 리큐의 제자가 쓴 다서 『야마노우에소지키山上宗二記』에 다인은 먼저 선종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다도의 목적을 첫째는 불법을 수행하여 득도하는 것이라 하였다. 전편에 소개한 ‘다도는 찻물을 끓여 차를 마시는 그 근본을 알지니’라는 노래는 이러한 뜻을 함축한다. 또 다른 노래인 ‘다도는 찻물을 끓여 그저 차를 마실 뿐일지니’는 득도 후 자유 자재한 경지에서 나오는 모습의 다도를 말해준다.

 

대덕사의 승려인 다이린 소토와 리큐의 스승인 조오는 이미 다미茶味와 선미禅味가 다르지 않다고 언급하였다. 즉 승려가 아닌 거사로서, 선방이 아닌 다실에서, 참선이 아닌 차로서, 불법을 수행 득도하여 다선 일미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다선일미’를 대성한 리큐는 다도로 재가선수행의 새로운 모범을 보였다고 평가 받는다. 

 

  대암待庵, 초암다실의 극치

 

  다실은 선다도의 입장에서 보면 수행자의 참선방과 같은 도장이며 다도의 경지를 보여주는 공간이 된다. 이러한 다실의 변천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중국의 명물을 장식하여 감상하는 공간이었다. 이를 서원書院이라고 하였다. 한꺼번에 여러 점의 명물을 장식할 수 있을 만큼 넓고 누가 보더라도 근사하고 훌륭한 공간이다. 다음은 슈코가 선다도를 시작하면서 방장에서 유래한 4첩반(이하 다다미 한 장을 첩畳으로 표기) 다실이 생겨났다. 그 후 중국 명물을 갖지 못한 다인들이 차를 할 수 있는 4첩 이하의 고마小間가 생겼다. 3첩 다실이라면 주인이 차를 낼 때 사용하는 한 첩과 손님을 모시는 객석 한 첩, 그리고 주객이 함께 공유하는 한 첩으로 이루어진다. 흔히 초암 다실이라고 할 때는 4첩반 이하를 의미한다. 이처럼 다실은 다인의 다도 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된다. 

 


사진1 대암待庵 

 

바로 이점에서 리큐는 초암 다실의 극치를 보여주는 2첩다실, 대암待庵을 만들어 냈다(사진 1). 대암은 오로지 행다석 한 첩과 객석 한 첩만으로 이루어진다. 주인과 손님 사이에 두었던 한 첩마저도 과감히 없앴기 때문이다. 주객은 더없이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숨결까지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대신 객석 위 천정을 높여 주객의 구분을 두되 동시에 주객의 구분이 없는 경지에 이른 극치의 공간을 이루었다. 도코노마는 아무런 장식성이 없는 자연의 흙으로 벽 전체를 감쌌다. 

 

그 위에 묵적과 다화를 걸었다. 손님의 출입문인 니지리구치는 고개를 숙여야 만 겨우 들어갈 수 있게 낮았다. 다실 내부는 밝은 빛을 들이지 않는다. 그저 한지 창문을 걸러 들어오는 부드럽고 고요하며 어스푸레한 음영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명상하는 공간과 같은 분위기에서 주객은 오롯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다회에 임한다. 따라서 차를 내는 다도구는 눈으로 감상을 하기 위한 화려한 명물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대암 다실에는 두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하나는 대암이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히데요시가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또 대암의 특징인 흙벽과 창문, 니지리구 치는 습기가 많은 여름 중심의 일본 전통적 목조건축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현재까지는 조선의 민가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기일회一期一会 

 

리큐는 다회에 임할 때 다인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으로서 일기 일회를 강조하였다. 일생에 단 한 번 밖에 없는 만남의 뜻으로 나의 이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므로 지금 여기에 오롯이 집중하라는 것이다. 특히 초심자는 이를 마음에 새길 것을 가르쳤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정 스님께서 『일기일회』라는 책을 남기셨는데, 각자覚者의 가르침은 공통하는 것 같다. 

 


사진2 흑쟁반에 담긴 흑칠기 

 

초심자가 일기일회의 다회에 집중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가르침이 있었다. 시비와 논쟁의 소지가 있는 화제를 금기시했다. 금전문제, 정치문제, 종교문제, 남녀문제, 가정사문제, 전쟁문제 등이다. 이뿐만 아니라 다회가 길어져서 연회로 변질될 것을 경계하여 시간은 4시간을 넘지 않도록 하였다. 또 번잡한 다회가 되지 않도록 초대하는 손님의 수도 5명을 넘지 않도록 한정했다. 

 

다도구의 개혁 

 

리큐는 자신이 추구하는 다도를 위해 종래의 다도구를 개혁하였다. 그는 장식성을 요구하는 일체를 없앴다. 중국에서 들여온 명물들은 대부분 장식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명물을 장식하는 선반인 다이스는 서원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그는 장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초암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초암의 도구는 장식하는 도구가 아니라 다다미 위에 직접 놓을 수 있는 일상생활 속의 도구였다. 그러므로 일상이 곧 수행이 되었다. 

 

선종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기본으로 하므로 선종 사찰에서는 수행자들이 직접 농사짓고 요리한 음식을 다 함께 공양한다. 이러한 일상을 백장청규와 같은 규범으로 만들어 매우 중요한 수행으로 삼았다. 다도는 이러한 선종을 따라 일상을 실천적 수행으로 삼았던 것이다.   

 


사진3 뚜레박 물항아리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가이세키에 사용되는 그릇이었다. 종래에는 붉은 칠그릇이나 금은 칠을 한 마키에 그릇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장식을 없앤 흑칠기를 사용하였다. 검은 칠기에 담긴 음식에 마음을 집중하게 하였다. 상차림 또한 달라졌다. 상의 다리를 잘라내고 만든 쟁 반(오시키折敷)에 음식을 차렸다(사진 2). 음식의 가지 수도 일즙삼채로 소박하게 내고 공양법 또한 선종 사찰처럼 음식물을 남김없이 비우고 깨끗한 그릇으로 돌려주었다. 

 


사진4 조선다완 미시마三島 16세기  

 

차를 내는 다도구의 변화도 실로 엄청났다. 그 예로서 뚜레박 물항아리를 들 수 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뚜레박을 다실 안까지 들여온 것이다. 리큐 이전 조오는 뚜레박을 다실부엌에서 사용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리큐는 중요한 다도구의 하나인 물항아리로서 다실 안으로 옮겨와 사용하였던 것이다(사진 3). 종래 서원에서 청자나 청화백자 물항아리를 사용한 것과 비교하면 뚜레박은 천양지차의 대극적 변혁이라고 하겠다. 

 


사진5 라쿠다완楽茶碗 대흑大黒 

 

다완도 중국의 천목다완에서 조선다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다완은 처음부터 다완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조선의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사발이라 특별한 장식성을 요구하지 않았고 그러한 모습이 일본 초암 차가 추구하는 바와 부합하였기에 일본 다인에 의해 처음으로 찻사발 즉 다완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사진  4). 이후 리큐는 자신이 추구하는 다도에 적합한 다완을 직접 디자인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라쿠다완楽茶碗이다(사진 5). 라쿠다완은 일체의 장식성을 완전히 배제한 오로지 차를 내기 위한 다완이었다. 리큐가 디자인하고 조선에서 건너갔다고 전해지는 기와장 초지로長次郎에게 만들게 하였다. 그 외에도 꽃을 담는 화병을 종래 사용하던 도자기에서 대나무나 박 또는 바구니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리큐의 다도구의 변혁은 수행의 초점이 특별함을 요구하는 장식성에서 평범한 일상성으로 옮겨감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행다법에서도 나타났는데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자연스러운 행다

 

리큐의 일곱 제자 가운데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1543-1615)라는 다이묘 제자가 있었다. 어느 날 오리베와 리큐의 행다를 차례로 볼 수 있는 찻자리가 있었다. 먼저 오리베가 차를 내었다. 그의 행다는 눈에 띄게 개성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이와는 달리 리큐의 행다는 물 흐르듯 하여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났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행다를 지향하였음을 알게 한다. 

 

청결이 제일

 

한편 자연스러움 만큼 리큐가 중요시했던 수행은 청정함을 요구하는 청결이었다. 수행자는 마음의 청정함을 가장 우선시하지만, 다도에서 그것이 청결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시골의 다인이 리큐에게 ‘아무거라도 좋으니 다도구를 하나 사서 보내 달라’고 거금과 함께 편지를 보내왔다. 리큐는 흰 행주를 넉넉하게 사서 잔금과 함께 보내주었다. 리큐가 보내온 다도구는 오로지 흰 행주뿐임을 알게 된 시골 다인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동봉된 리큐의 편지에 ‘다도는 청결한 흰 행주만 있으면 충분합니다’라고 씌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세辞世의 시 

 

역사적 다인으로서의 리큐는 역시 히데요시를 떠나서 생각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겠다. 리큐는 히데요시에게서 자결의 명을 받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출병 반대설, 염가 다도구의 고액거래, 리큐의 딸을 첩으로 달라는 히데요시의 요구 거절설, 다도관의 차이 등 여러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대덕사의 산문인 금모각金毛閣 이층에 세워진 리큐의 목상 아래로 히데요시를 지나가게 했다는 불경죄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또한 분명치는 않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리큐가 세상을 하직하기 전 남긴 한시와 와카로 된 사세辞世의 시가詩歌이다. 이 시가에는 리큐의 선다의 경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마무리로 소개하고자 한다(사진 6).

 


사진6 리큐 사세辞世의 시 

 

 


 

내 칠십 인생 야~ 탁~  

이 내 보검으로 부처도 달마도 죽였다.       

허리에 찬 내 구족의 다검조차     

바로 지금 하늘에 던져 버리노라 

     1591년 2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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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
한일차문화연구자, 우라센케유파다도사범, 예술학 박사. 현재 일본에서 한일차문화교류연구회와 국제전통예술연구회 디렉터로 활동. 저서로 『소소의 철학(麁相の哲学)』(思文閣, 2019), 『소소-차의 이상적 모습을 찾아서(そそう―茶の理想的姿をもとめて)』(f.c.l Publish 2017) 등이 있다. 공저로 『茶室露地大事典』(淡交社, 2018)과 번역서로 『일본다도의 이론과 실기』( 월간다도, 2007)가 있다. 2014년 일본 타카라즈카대학에서 「예도 수행에 대하여-소소와 수파리를 중심으로(芸道の修行について―そそうと守破離を中心に)」라는 논문으로 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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