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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가치다신교 시대와 악견惡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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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09:46  /   조회4,79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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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여명은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밝았다. 유일신에 대한 주술적 신념은 해체되자 마법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이성이었다. 이제 인간의 삶은 신의 소명이나 ‘거대한 존재의 고리Great chain of Being’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가 삶과 가치의 주체가 되어야 했다. 자연히 획일적 가치와 이념은 퇴색하고 다양성이 선善으로 통용되었고, 저마다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신봉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막스 베버는 근대의 이런 특성에 대해 가치다신교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일수사견一水四見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견해와 주장은 그것이 무엇이든 개성으로 존중받는다. 게다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견해는 때로 주권에 관한 문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치다신교 시대가 초래한 견해의 다양성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다양성은 곧 무수한 생각들의 경쟁을 의미하며, 수많은 주의주장이 충돌하며 갈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때로는 용납하기 힘든 반사회적 견해들까지 다양성을 명분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런 세태 속에서 타인과 충돌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일수사견一水四見의 태도가 요구된다. 일수사견이란 『능가경』에 나오는 말로 갠지스 강을 두고 사람은 물로 보지만, 물고기는 집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신들은 보배 궁전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견해의 다양성을 용인하는 것으로 가치다신교 시대에 부합하는 마음가짐일 수도 있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생각의 차이를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시비를 다투지 않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물론 이런 태도에도 긍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양떼들 속에 이리들이 숨어 있듯이 다양성으로 포장된 견해들 중에는 자신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들도 많다. 따라서 다양성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주의 주장을 다 수용할 수는 없다. 불교는 상대적 진리관을 취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보면 불교는 정견을 강조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진리에 입각해서 세상을 관조하는 정견正見을 강조하셨고, 팔정도의 제일항목으로 정견을 제시했다.

 

따라서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견해의 다양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외도外道들의 사상을 62견見으로 분류하고, 그것이 갖는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다. 62견은 견해의 다양성에 대한 나열이 아니라 그릇된 견해를 비판하고 바른 견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인 것이다.

 

악견의 본성과 작용

 

올바르지 못한 견해를 유식唯識에서는 악견惡見이라고 한다. 악견은 번뇌를 일으키는 여섯 가지 근본적 번뇌심소 중의 하나로 ‘그릇된 견해’라는 뜻이다. 갖가지 진리[諦]와 이치[理]에 대해 잘못 이해하거나 곡해하여 자신의 견해로 내면화 한 것이 악견이다. 악견은 왜곡된 인식에 의해 ‘오염된 지혜’이기 때문에 염혜染慧이며, ‘바르지 못한 견해’이기 때문에 부정견不正見이며, ‘번뇌에 더렵혀진 견해’이므로 염오견染汚見 등으로 부른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악견은 “모든 진리와 이치에 대해 뒤바뀌게 추측하고 헤아리는 오염된 지혜가 본성이며, 능히 바른 견해를 방해하여 고통을 초래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고 정의하고 있다.

 

첫째, 악견의 본성은 여러 가지 진리와 이치에 대해[於諸諦理] 사실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거꾸로 탐구하고 헤아리는 것[顛倒推求度]이다. 왜곡되게 형성된 견해는 거짓과 번뇌에 ‘오염된 지혜[染慧]’가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사성제와 같이 부처님이 설법한 진리를 잘못 이해하여 받아들이거나, 인과법因果法 등 도덕적 근간을 부정하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악견의 작용에 대해서는 “바른 견해를 방해하여 고통을 초래하는 것[能障善見 招苦為業].”이라고 했다. 악견의 작용은 선견善見, 즉 바른 견해를 방해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실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체가 있다고 믿고 집착하는 것 등이다. 이런 견해를 가지면 존재에 대한 집착과 번뇌가 생겨나고, 여기서 삶에 대한 고통이 수반된다.

 

바른 진리는 존재의 실상을 깨닫게 하여 번뇌와 집착을 제거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그런데 악견에 빠져 바른 이해를 등지면 그로 인해 번뇌와 고통이 따르게 된다. 그래서 “악견을 가진 사람은 많은 고통을 받는다[惡見者多受苦].”고 했다. 자신의 견해 때문에 스스로 고통 받게 되는 것이 악견의 작용이다.

 

다섯 가지 악견

 

악견은 작용하는 특성[行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세분된다. 첫째, 유신견有身見으로 몸이라는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유신견은 “오취온五取蘊에 대해 나와 나의 소유로 집착하는 것[執我我所]”이다. 육신은 오온의 화합으로 이루어졌기에 오온은 내가 아니며, 오온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도 나의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일시적인 현상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신견에 빠지면 육신을 실체적 자아로 믿게 되고, 육신을 구성하는 오온을 자신의 소유라고 집착한다. 오온이 실체적 자아라는 주체에 대한 욕망은 허구이므로 종국에는 그런 믿음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다.

 

둘째, 변집견邊執見으로 극단적 사유에 집착이다. 달리 변견邊見이라고도 하는데 극단에 치우치는 이분법적 사유를 말한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변집견은 유신견의 대상이 되는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해 단멸 또는 상주라는 이분법적 사유에 집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실체가 있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상견常見과 ‘나는 실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 단견斷見에 집착하는 것이다. 존재의 중도성이라는 실상을 통찰하지 못하고 극단적 견해에 빠져 희론戱論에 놀아나는 것이 변견이다. 극단에 치우친 변견은 “마음이 중도에 머물거나[處中]과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작용[障處中行出離為業].”을 한다.

 

사실 『백일법문』에서 강조하는 불법의 핵심은 중도설이다. 변견은 중도를 버리고 유무有無, 단상斷常과 같은 극단적 사유에 목매다는 것이다. 현실을 돌아봐도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등 온갖 이분법적 사유에 빠져 대립하고 갈등한다. 성철 스님은 모든 이분법적 사유를 버리고 중도적 통찰을 얻는 것이 불법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셋째, 사견邪見은 팔정도의 제일항목인 정견正見의 반대로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그릇된 견해를 말한다. 5가지 악견 중에서 유신견과 변견 등으로 구분한 4가지 범주 이외의 모든 삿된 견해가 모두 사견에 포함된다. 이를테면 선행이나 악행의 과보가 없다며 인과因果를 부정하거나, 국가와 사회 등 세간을 부정하거나, 진정한 아라한이 없다며 출세간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 등이다.

 

사견에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갖가지 종교적 견해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제석천이나 범천은 영원히 상주하며 변화가 없다는 견해, 자재천 등의 신들이 모든 사물의 원인이라는 견해 등이다. 이는 신들은 영원불변하다거나, 신들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등의 견해도 모두 사견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아가 여러 가지 삿된 해탈[邪解脫]을 참다운 해탈이라고 보는 것, 도道가 아닌 것을 도라고 집착하는 것도 사견에 포함된다.

 

넷째, 견취견見取見은 잘못된 견해를 올바르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악견 중에 유신견, 사견, 변견 등의 잘못된 견해에 빠져 그것이야말로 탁월한 가르침이라며 집착하고, 그런 것들을 통해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된 견해는 내면적 사유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표출되고, 타인에게 강요하게 됨으로 갈등과 분란을 초래한다. 그래서 『성유식론』에서는 견취견에 대해 ‘모든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一切鬥諍所依為業].’고 했다. 모든 갈등과 분열은 삐뚤어진 견해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계금취견戒禁取見으로 갖가지 잘못된 계법에 집착하는 것이다. 계금취견은 두 가지로 나눠지는데 첫째는 외도들의 잘못된 계법에 현혹되어 좋은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고, 둘째는 불교의 계법이라도 그 취지를 이해하여 실천하기보다 조문과 형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계금戒禁이란 계법戒法 또는 종교의 행위윤리인 계율을 뜻한다. 하지만 확장해 보면 세속의 법률이나 규칙 등에 집착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계법은 어디까지나 악행을 막고 번뇌를 다스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취지를 망각하고 조문과 형식에 매달려 시비만 따지면 주객이 전도되어 오히려 번뇌를 부르는 단초가 된다. 데바닷타는 부처님보다 더욱 엄격한 계율을 내세웠지만 그것이 오히려 교단의 분열을 조장했던 것도 이런 차원에서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상과 같은 악견은 마땅히 물리쳐야할 번뇌들이다. 설사 다양성이 중요해진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악견은 수용할 대상이 아니다. 다양성을 이유로 악견을 수용하면 당장 눈앞의 시비는 피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는다’며 대중집회를 강행하다 집단감염을 초래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망치고, 공동체를 위기로 빠뜨린다. 따라서 악견은 다양성으로 용인할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잡아야할 대상이다.

 


봄 눈 내린 북한산의 설경 사진: 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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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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